"아빠, 이 줄 만지면 전기 통해요?"
"그래, 전기 통하니까 만지면 안 된다."
백운산 등산로 초입에 어른 엄지손가락 굵기의 검은 선이 계곡을 따라 정상으로 끝없이 뻗어 있습니다. 산에 오르며 그 선을 무심코 흘려 봤는데 아이들은 검은 선이 낯설고 신기합니다.
지난 23일 늦은 아침을 챙겨먹고 백운산으로 향했습니다. 조계산 다녀온 후 매일 아침이면 두 아들이 들이대는 지도책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산은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높이가 1200m 이상입니다. 차를 몰고 옥룡계곡 끝까지 달렸습니다. 차에서 내려 산을 보니 절반 이상은 오른 듯합니다. 산이 높다 한들 이 정도면 오를 만하다는 생각에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봄향기를 한껏 들이키며 열심히 정상을 향해 걷는데 전선처럼 생긴 정체모를 검은 선이 계곡과 숲속을 관통하며 끝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등산로 초입부터 계속 우리와 함께 걷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추측해서 내린 결론은 위쪽에 큰 공사를 할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검은 선이 한두 가닥도 아니고 여러 줄입니다. 그 검은 선이 저와 아이들 시선을 계속 건드립니다.
아름다운 계곡을 사진에 담으려 하면 어김없이 그곳에 버티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피해가며 사진을 찍으려 해도 한 두 가닥이 아니라 곤란합니다. 결국 풍경 담는 일은 포기하고 정체모를 선을 유심히 관찰하며 산행에 집중하기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는데 정상과 신선대로 나뉘는 갈림길에 빨간 통이 보입니다. 검은 선은 빨간 통 안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그리고 저는 빨간 통 부근에서 검은 선의 정체를 알게 됐습니다.
그 선은 공사를 위한 전선이 아니었습니다. 등산로 초입부터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오며 아름다운 풍경을 망쳐놓던 검은 선은 고로쇠 수액을 받기 위해 설치한 선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안 순간 허탈한 마음에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듭니다. 꼭 이렇게 까지 해서 고로쇠 수액을 받아 마셔야 할까?
정상 향하는 마지막 길, 차라리 일천배가 낫다
백운산은 여수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주변의 지인들이 이미 정상을 찾은 곳입니다. 그러나 왠지 저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이번이 초행길입니다. 하여 이번 참에 두 아들과 멋있게 정상을 밟아 보고자 못이기는 척 길을 나섰습니다.
백운산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등산로를 자세히 알아보려고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산행을 극구 말립니다. 정상을 향하는 마지막 길은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곳이랍니다. 차라리 일천 배가 더 쉽답니다. 그런 곳에 두 아들과 함께 오르는 일은 눈물을 머금는 일이 될 거라며 애당초 말리지 않았다고 애꿎은 사람 원망 말고 깨끗이 포기하랍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더 오기가 생깁니다.
조계산도 함께 넘은 실력이라 코웃음 치며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정상을 코앞에 두고 친구가 극구 말렸던 심정을 깨달았습니다. 경사가 절벽에 가깝습니다. 두 녀석도 정상을 앞에 두고 그만 오르겠다고 합니다.
결국 두 녀석을 양손에 끌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높은 산에 오를 땐 어떻게든 두 녀석은 떼놓고 와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결심을 더욱 굳히게 만든 일은 두 녀석의 얄미운 행동 때문입니다.
"니들은 노래가 나오냐? 나는 죽을 맛이다"
두 녀석은 힘들다며 아빠 손을 구원의 밧줄인양 요청하더니 덥석 손을 잡아 이끌자 몇 걸음 떼지도 않아서 함께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한마디 했습니다. "그래, 니들은 노래가 나오냐? 나는 죽을 맛이다."
그렇게 정상을 향했습니다. 산 아래는 봄꽃이 지는데 정상 부근은 아직 쌀쌀합니다. 바람은 거세고 기온은 벗었던 겉옷도 한껏 여미게 만듭니다. 바람결에 눈송이도 맞은 듯합니다. 저와 두 아들은 기다시피 올라 힘겹게 정상에 발을 딛고 아래를 내려다 봤습니다. 그리고 와! 함성을 질렀습니다.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비록 칼바람에 오래 서 있지 못했지만 꼬맹이들 눈에도 그 광경은 틀림없이 색다른 경험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정상에 잠시 머물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 불어오는 바람에 황급히 내려왔습니다.
산을 내려가기 전 정상부근에서 마지막 남은 김밥으로 배를 채운 뒤 가파른 길을 또다시 내려갔습니다. 도중에 오르면서 보지 못했던 작은 옹달샘도 발견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 발길이 머물지 않는 그곳에 또 다른 생명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휘감긴 백운산을 보다
가파른 산길을 내려와 시원한 물소리가 가까워지자 또다시 검은 선이 보입니다. 산을 오르는 길에 빨간 통 옆에서 제가 사진 찍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 본 큰 애가 재차 묻습니다.
"아빠 이 선 전깃줄 맞아요?"
더 이상 전선이라고 속일 수 없어 사실을 이야기 했더니 그 후, 쏟아지는 두 녀석의 질문에 한참을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질문에 답변이라고 내놓은 말들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왜 사람들은 세상에 더 맛있는 음식이 많은데 하필 나무를 찔러서 나온 물을 마실까요? 건강 때문일까요? 솔직히 고백하건데, 저도 고로쇠 수액 마시러 간다고 할 때 몇 차례 마지못해 따라 나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무심코 투명한 액체를 마셨는데 그때 마신 물이 이렇게 채취될 줄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번 산행을 통해 두 아들에게 배웠습니다. 인생길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천지 널려 있는 맛있는 음식 다 맛보기도 빠듯합니다.
그런데 굳이 나무에 구멍 뚫고 받은 수액을 몸에 좋다며 먹어 본들 건강에 득 될 것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고로쇠 수액 마시려면 그 시간에 두 녀석 데리고 산에 한 번 더 다녀오렵니다.
그나저나 정상을 향해 한없이 뻗어 가던 그 검은 선은 어디가 끝일까요? 정상과 신선대로 나뉘는 곳에서 제가 택한 정상 길에는 검은 선이 멈췄는데 신선대쪽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와 두 아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탐욕의 선으로 휘감겨 있는 백운산을 보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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