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이지아 이혼' 파문과 관련해 모 케이블 방송사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참여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 '내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다'고 제작진에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비겁했던 것 같다.
가수나 배우, 탤런트는 공인이 아니며 그들의 활동과 사생활은 별개라는 게 지금까지 내가 가진 입장이었다. 그들이 결혼을 하건, 이혼을 하건 아님 바람을 피우건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들 외의 다른 누군가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표절이나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면 서태지와 이지아씨의 사적인 영역은 보장해줘야 한다. 이게 내가 가진 생각이었다.
그런데 '서태지-이지아 파문'이 불거졌을 때 좀 멈칫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서태지가 가진 영향력과 파급력 때문이었을까. 아님 눈치를 본 걸까. 모르겠다. '다르게 볼 여지'는 없는 것일까 - 이런 부분을 계속 고민했던 것 같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비겁했다. 다르게 볼 여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미친 척 날뛰는 언론보도' 이제 그만 중단해라
어차피 이런 사건이 터지면 인터넷과 스포츠신문은 미친 척 날뛰기 마련이다. 표현이 좀 심한 것 같은가. 아니다. 미친 척 날뛴다는 표현은 오히려 좀 완화시킨 것이다. 더 심한 표현을 쓴다 해도 그들의 보도행태를 제대로 묘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그래서 이 글에서 종종 거친 표현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일부 인터넷 매체와 연예매체 그리고 스포츠 신문들은 포털에 빌붙어 이참에 조회수나 늘려보자고 계산했을 것이다. 이해도 못 하겠고, 공감도 어렵지만 '원래 그런 매체들'이니 일단 일단 논의대상에서 제외로 해두자.
하지만 정론지를 지향한다는 매체들까지 이번 광풍에 미쳐 날뛰는 것을 보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아니 짜증난다. '서태지-이지아 관련 진상 보도 베스트3'을 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진상 1위 : 중앙일보 '톱스타들 사로잡은 이지아···그녀는 별들의 블랙홀?' 지난 23일 <중앙일보> 3면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톱스타들 사로잡은 이지아···그녀는 별들의 블랙홀?>이라는 기사가 3면 가득히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스타를 사로잡은 이지아의 매력이 뭘까'란 내용의 기사를 종합면, 그것도 1면 다음으로 비중이 큰 3면에 내보내다니···. 온 나라가 '서태지-이지아 파문'에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고백하나 하자면, 나도 이런 종류의 얘기를 주변 사람들과 한 적이 있다. 개인적 호기심과 가십거리에 대한 일종의 수다떨기였다. 그것도 남들이 들을까봐 주변사람들과 소곤대며 조심스럽게 했다. 그런데 <중앙일보>는 '이런 가십거리'를 거의 한 면을 털어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기사로 내보냈다. 정말이지 개그 프로그램에서 한때 유행했던 말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이거 정말 미친 거 아냐?" 대한민국 정론지를 표방하는 매체의 수준이 이거밖에 안 된다. 비극이다.
진상 2위 : '서태지-이지아' 보도 위해 LA 특파원 동원한 MBC 지난 24일 MBC <뉴스데스크>는 재보궐 선거 관련 리포트 2개를 내보내더니 '서태지-이지아' 관련 소식을 두 꼭지 연속 배치했다. "재보궐 선거 못지 않게 관심 끄는 뉴스가 서태지 이지아씨 소식이죠"라는 앵커 멘트와 함께.
이로써 MBC는 4·27 재보궐 선거와 '서태지-이지아' 파문을 거의 동급으로 여기고 있음을 세상에 고백했다. '서태지-이지아' 파문이 머리뉴스 다음 꼭지로 보도될 만한 사안인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더 가관인 건, 이지아씨가 5년 전에 이미 미국에서 재산권을 포기했다는 리포트를 한 당사자가 LA 특파원이었다는 점이다. 미주 <한국일보>가 제공한 이혼 판결문을 바탕으로 그 내용을 상세히 해설해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대체 언제부터 특파원들이 <섹션TV 연예통신> 리포터들과 경쟁을 했을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아니 특파원들만 경쟁을 하는 게 아니다. 지금 <뉴스데스크>는 <섹션TV 연예통신>과 경쟁을 하고 있다.
진상 3위 : 서태지 결혼 보도, 15년 만에 '특종' 확인한 KBS 공영방송 KBS는 지난 23일 <뉴스9>에서 15년 전에 서태지 결혼을 특종 보도한 기자를 인터뷰해서 내보냈다. "결혼 사실이 이미 15년 전 보도됐지만 '오보 소동'으로 끝났던 일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면서 "15년 만에 특종으로 밝혀진 기사를 썼던 당시의 기자"를 KBS가 만난 것이다.
만약 이 내용을 KBS <연예가 중계>에서 내보냈다면 그냥 '재미있게' 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 KBS는 <연예가 중계>가 아니라 <뉴스9>에서 기자 리포트로 처리했다. KBS가 앞으로 톱스타들 결혼 소식을 <뉴스9>에서 비중 있게 처리하려나 보다. 스포츠신문의 과거 특종까지 꼼꼼히 챙기면서 <뉴스9>에서 별도 리포트로 처리하는 걸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MBC는 LA 특파원이 <섹션TV 연예통신> 리포터와 경쟁을 하더니, KBS는 보도본부 기자들이 <연예가 중계> 리포터들과 경쟁을 하려고 한다. 종편 출범을 앞두고 연예뉴스가 언론계의 '킬러 콘텐츠'로 떠오르고 있는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데, 문제는 기존 관습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정론을 표방하는 언론의 비슷한 '진상 짓'이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곰도리의 수다닷컴'(http://pressgom.tistory.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