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나섰다. 현 정부의 '재벌 옥죄기' 논란속에, 곽 위원장은 대기업을 '거대권력'으로 규정하고, 이를 견제할 효과적인 수단까지 제시했다.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 연기금이 주주권을 올바르게 행사하라는 것이다.
이같은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는 과거 참여정부 시절에도 꾸준히 제기돼 왔지만, 재계 등에서 "연금 사회주의"라며 강하게 반발하면서 제대로 공론화되지 못했다.
실제 곽 위원장의 이날 발언이 알려지자,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재계에서 '기업 옥죄기', '관치'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재계에선 현 정부가 작년 하반기부터 검찰, 공정위, 국세청 등 사정기관을 동원해 대기업을 조사하고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이 '초과이익공유제'를 들고 나온 데 이은 또 다른 압박카드로 보고 있다.
'친기업' 정책을 추진해 온 현 정부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 경제참모인 곽승준 위원장의 이날 발언이 실제 어떻게 실현될지 주목거리다.
"이건희보다 지분 많은 국민연금, 삼성전자 견제 제대로 했는지 의문"곽 위원장의 발언은 26일 오전 서울 롯데호텔서 열린 '공적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및 지배구조 선진화' 토론회 기조연설에서 나왔다.
그는 이날 신한금융을 비롯해, 삼성전자, 포스코, KT 등 구체적인 기업의 이름을 직접 거론해가면서, 작심한 듯 자신의 발언을 이어갔다. 국내 대기업들이 자신들의 재무구조 안정 등에는 성공했지만, 내부 돈만 쌓아놓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곽 위원장은 한발 더 나아가, "국내 인재와 자원이 집중돼 있는 대기업이 우리 국민들의 미래 먹거리가 될 신수종 분야의 개발이나 중소기업과의 동반성장에 미온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국가 전체적으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비판은 계속됐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 구현을 위한 성실납세, 동반 성장 등이 취약하다면서, "정부의 요구가 있어야 마지 못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이나,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 등 문제에 정부의 직접 개입보다는 공적 연기금이 보유한 주주권 행사를 통해 접근하는 것이 더 시장친화적인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거대 권력된 대기업 견제 위해 공적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적절"곽 위원장은 지난해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신한금융의 경영권 분쟁 사태를 들면서, "2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일본계 주주 등과 달리 전혀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은 불합리한 사례"라고 말했다.
이어 "삼성전자도 현재 국민연금이 2대 주주로 보유지분(5.0%)이 이건희 회장(3.38%)보다 많다"면서 "하지만 경영진에 대한 견제와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제대로 해왔는지 매우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삼성전자가 이미 수년 전부터 스마트폰 시대가 예고돼 왔지만, 기존 핸드폰 시장에 안주하면서, 아이폰 쇼크에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또 포스코와 KT 등 오너십이 부족한 대기업도 방만한 사업확장 등으로 주주가치가 침해되고, 국내 경제에 역효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경영진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기업 위주의 과점체제와 수직계열사 확대 등으로 경제 전체의 창의력과 활력이 약해지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스스로의 혁신이 없는 시장은 성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거대권력이 된 대기업을 견제할 효과적인 수단으로 자본주의 원칙에 입각한 공적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가 가장 적절하다"면서 "국민연금의 내부 역량을 대폭 강화하고, 연금 자체의 지배구조 개편으로 기금 운용의 투명성과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곽 위원장은 주장했다.
전경련 등 재계, "이번엔 곽승준이냐...연금사회주의 다름없다"미래기획위원회에 따르면, 국민연금 적립액의 경우 작년말 324조 원에 달했고, 오는 2043년이면 2500조 원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한 금액은 작년말 현재 55조 원. 적립금의 17%에 달한다. 이 가운데 5%이상 지분을 보유한 업체는 139개 회사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국내 주요 대기업 등이 거의 다 들어있다.
이날 세미나에 나선 국내외 전문가들은 공적 연기금의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박경서 고려대 교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는 종합적인 투자방식으로 연기금의 사회책임 투자가 필요하다"면서 "국민연금이 주주제안, 주주협의회 구성, 사외이사 후보추천, 주주소송 등을 제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우찬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공무원연금의 주주권 사례를 소개하면서, "의결권 행사지침의 구체화 등 주주권 행사 뿐 아니라, 국내외 기관투자자와 연대해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곽 위원장의 이날 발언이 알려지자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재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지나친 경영권 간섭부터 연금사회주의라는 불만까지 터져 나왔다. 한켠에선 현 정부의 대기업 옥죄기의 또 다른 카드라는 인식도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 목적은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이 아니라, 기업들의 가치 극대화에 맞춰져야 한다"면서 "단순한 정치논리에 따른 관치를 위한 지배구조 개선은 지나친 경영권 간섭이며, 이는 기업가치 하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황인철 본부장은 "공적 연기금의 주주권을 통해 기업을 움직이겠다는 것은 '연금 사회주의'나 다름없다"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에서는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대기업 한 임원은 "과거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때도 연기금을 통한 기업지배 이야기가 있었다"면서 "정운찬 위원장의 초과이익공유제에 이은, 또 하나의 대 정부 압박카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