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가 왔다.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자신의 두 번째 단편영화 <분장실>을 들고 왔다.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내심 기대했던 작품이었다. <분장실>은 연극무대의 분장실을 배경으로 한다. 이 분장실에는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가을소나타>를 올리는 두 배우가 등장한다. 딸 '에바'역을 맡은 '김광덕'과 엄마 '샬롯'을 맡은 '예수정'이다.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영화 <가을소나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가을소나타>는 모녀에 관한 이야기다. 엄마는 이기적이며 냉정하고 딸은 그런 엄마에 늘 주눅이 들어 있다. 딸은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나, 엄마는 그런 딸이 이해 불가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모녀 갈등과 모순이 영화의 줄거리를 이룬다.
다시 <분장실>이야기. 지난 4월 30일, 전주 메가박스 6관에서 상영된 <한국단편경쟁3>에서 <모험>(감독 배종대), <나쁜교육>(감독 고수경), <분장실>(감독 추상미)이 상영됐다. 상영이 끝난 후, 관객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 추상미·고수경 감독이 참여했다. 배종대 감독은 개인 사정으로 불참했다. 영화 <분장실>을 중심으로 추상미 감독과 대화를 정리해본다.
우린 누구나 '어른아이'다 영화 속 대사의 반 이상은 연극의 대사가 차지한다. 영화 속에 연극이 중첩된 독특한 구조다. 연극 <가을소나타>를 배경으로 한 까닭은 무엇일까.
"재작년, 내가 실제 '에바'를 연기했다. 그때 겪은 개인적인 경험이 작용했다. 그냥 배우로서의 긴장감을 나타내면 관객들과 접점을 찾기 힘들겠다 싶어 고민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성인아이'를 생각해 내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었다.우리는 누구나 자기 안에 '성인아이'를 가지고 있다. 어린시절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그대로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몸은 멀쩡한 어른인데, 마음은 어린시절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는 어린아이다. 그런 내 안의 '성인아이'를 달래주고 안아주면서 치유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이 영화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영화에서 김광덕 역할을 맡은 배우(실제 이름이 김광덕이다)는 '김광덕'과 '에바'를 오가며 연기한다. 이러한 구조가 관객에게 약간 혼란을 주지만 이게 바로 감독이 노린 교묘한 속임수다.
김광덕이 에바의 대사를 중얼거리는 장면에선, 저게 김광덕 심리인지, 에바 심리인지 헷갈린다. 물론 정답은 없다. 에바이기도 하고 김광덕이기도 하다. 에바와 마찬가지로 김광덕 역시 자신의 엄마에게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에바의 엄마는 너무 도도하고 차가워서 문제지만 배우 김광덕의 엄마는 딸의 첫 공연날. 축하전화는 못 할망정, 사고 뒷수습이나 떠맡기는 '60살 먹은 아기'다.
"심리적 위기를 겪게 되면 누구나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성인아이'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다. 그럴 때 아이처럼 달래주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상처가 치유되는 것 같다. 나도 그런 비슷한 경험을 했고, 그렇게 치유하였다."배우 김광덕은 무대에 오르기 직전, 극도의 강박관념에 이른다. 그녀 트라우마의 중심에는 항상 엄마가 있다. 엄마는 사고뭉치다. 엄마와 얘기 안 한 지 오래되었다는 대사로 보아 그녀와 엄마의 관계는 불편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손숙, 박정자... 대선배 존재만으로 기가 눌린다그러나 무대에 오르기 전, 김광덕은 엄마와 극적인 화해를 한다. 엄마와 통화하면서 김광덕은 아이처럼 울며 말한다. "엄마, 나 오늘 첫 공연이야. 오늘 너무 힘들어." 그 전까지의 팽팽한 갈등에 비해, 화해는 다소 싱겁기까지 하다. 하지만 배우 '김광덕'이 화해하고 치유하여야 할 대상은 친엄마뿐 아니다. 에바의 엄마 '샬롯'을 연기하는 대선배 '예수정'과의 화해도 필요하다.
선배 '예수정'은 초조하고 예민한 김광덕에 비해 시종일관 여유 있다. 분장실로 공연 축하 꽃바구니가 배달되고, 딸에게 공연축하 전화도 걸려온다. 모든 스태프과 기자도 이 선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 선배는 광덕의 연기까지 터치한다. 광덕으로서는 자존심 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광덕이 대사를 중얼거리면 선배가 맞받아친다. 이 팽팽한 긴장감. 실제 분장실의 분위기는 어떨까?
"분명히 분장실에서는 배우 간 기 싸움이란 게 존재한다. 특히 <가을소나타>처럼 2인극인 경우에는 더한다. '손숙'이나 '박정자' 선배님들과 연기하면 그 자체만으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때문에 위축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극 긴장의 균형을 유지해주는 에너지다. 오히려 그런 기싸움은 상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평소엔 친하게 지내다가도 상연날짜가 다가오면 왠지 거리를 둬야겠다는 느낌이 든다. 공연을 앞두고 습관처럼, 분장실에서 대사를 중얼거리는 데 함께 있던 상대 배우가 내 대사를 맞받아치기도 한다. 그러면 다시 내가 또 대사하고... 이런 팽팽한 긴장감이 분장실에 있다."이 영화는 분장실이라는 독특한 공간이 주는 다중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잘 살렸다. '현실도 아니고 무대도 아닌' 그 경계에 서 있는 배우들의 심리적인 갈등과 혼란을 잘 그려냈다. 특히 고장난 조명이 깜빡거리는 불빛이나,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 상대 여배우의 화려한 액세서리 등을 통한 주인공의 감정이입 효과는 굉장히 세련되었다. 연극과 영화를 넘나드는 연출도 아마 두 무대를 모두 경험한 감독 추상미의 연출 덕분이다.
<블랙스완>과 비슷하다고?무대를 앞둔 배우의 강박관념과 노이로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최근 화제가 되었던 <블랙스완>이 연상된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블랙스완>이 몇 차례 언급되었다. 이에 대한 추상미 감독의 설명.
"영화를 찍을 당시 <블랙스완>이라는 영화 자체를 몰랐다. 나중에 교수님께서 (<블랙스완>) 보았느냐고 물어보셨다. 그때 처음으로 그런 영화가 있다는 걸 알았다. 영화 촬영을 모두 마친 뒤, 시간 내서 보았는데 나도 깜짝 놀랐다. 엄마에게 계속 전화가 걸려오는 장면이나 그 외 몇몇 장면이 상당히 비슷해 나도 소름 돋을 정도였다."
이날 <한국단편경쟁 3>에는 추상미 감독의 <분장실>외에 배종대 감독의 <모험>과 고수경 감독의 <나쁜 교육>도 함께 상영됐다.
두 여성의 자아찾기를 주제로 한 <모험>은 자신의 잃어버린 꿈과 도전에 대해 조용하고 나긋나긋하게 얘기하는 영화다.
주목할만한 작품은 고수경 감독의 <나쁜교육>.
시골 분교에 막 부임한 선생님과 선생님보다 더 영악스런 네 명의 초등학생이 등장하는 <나쁜교육>은 아이들의 입을 통해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희망에 차고 순수한 교사와는 반대로 이 학교에 있는 네 명의 아이들은 영악스럽다.
자살, 부동산, 돈 거래, 야동, 영어교육 등 현재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사회문제를 그대로 잘 보여주고 있다. 네 명의 초등학생 연기가 압권이다. 영악스러움과 타락의 극치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 아역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훌륭하다. 따로 연기지도를 한 건가."전문 아역배우이기 때문에 특별한 어려움 없이 연기했다. 이 영화에선 아이들의 뻔뻔스럽고 영악스러운 연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이들이 쭈뼛쭈뼛하면 안된다. 캐릭터에 대해 설명을 몇 번 해주자 쉽게 이해했다.
- 영화 배경은 시골 분교인데 아이들 옷차림과 말투는 강남 대치동 아이들같이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 일부러 그런 것인가."비현실적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처음엔 현실감 있게 시골아이들 모습대로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비현실적으로 가기로 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할지는 관객 각자의 몫이다.
- 이 영화의 모티브는 어디서 얻었나. 실제 주변에 이런 아이들이 있나.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봤다. 한 고등학생이 시체와 함께 찍은 사진을 홈피에 올렸다. 영화 속에 시체를 가지고 돈벌이를 하는 아이가 등장하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 나머지 3명의 캐릭터는 좀 더 살을 붙이고 만든 거다."
<나쁜교육>은 23분 짧은 단편영화지만 한없이 무거운 영화다. 물론 영화는 보는 내내 유쾌하고 포복절도할 만큼 웃기다. 하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2011년 현재 대한민국의 초상을 무서우리만치 꼬집어내어 비틀고 꼬집는다.
하지만, 이런 아이들이 과연 영화 속에만 존재할까? 그게 가장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