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 자리에 섰다. 온몸이 불기둥이 되어 민주광장을 가로질러 달려오던 20년 전 오늘 1991년 5월 1일 12시 30분. 불기둥은 쓰러지고 그 속에서 마지막 절규가 터져나왔다.
"공안탄압 분쇄, 노태우 정권 타도!"사람들이 달려가서 옷으로 깃발로 불기둥을 덮었다. 급히 학생회관에서 가져온 소화기를 뿌렸다. 화마는 쉽게 그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붙어 올랐다. 넋이 나간 여자 후배들이 머리를 감싸고 서로 부둥켜안은 채 오열했다.
"선배, 영균이가 안 보여요. 영균이…."그랬다.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불을 당긴 이는 그날 아침 내가 단과대 학생회실에서 집회 알리는 대자보 좀 붙이라고 부탁했던 영균이였다.
안동병원에서 응급처지를 마치고 대구에 있는 경북대병원으로 옮겨 이틀 동안의 긴 사투를 벌인 영균이는 끝내 일어나질 못했다. 5월 2일 저녁 8시 13분 운명. 병원 공중전화로 학교(안동대)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다.
"죽었다. 영균이가 방금 전 죽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울음소리만 오가고, 나는 수화기를 손에 든 채 주저앉고 말았다. 후배들 때문에, 몰려든 기자들 때문에 참아온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울고 있을 여유조차 허락지 않았다. 시신 탈취를 위해 백골단이 치고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기자들 속에서 돌았다. 가족들은 다음 날 화장으로 가족장을 치르겠노라 발표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병원을 에워싼 가운데 100여 명의 학생들이 영안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뜨거운 불길에 죽어간 사람을 어떻게 다시 화장하냐고, 울면서 절규했다.
그러나 유가족은 끝내 국민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육신은 화장장을 향했고 영혼은 학교로 돌아와 5월 15일 학교 뒷산에 묻혔다.
나는 아직도 가끔 그때의 악몽을 꾼다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다. 안동 시내에서 6월 10일 6·10항쟁기념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죽어가는 영균이의 병상을 지켰던 친구가 안기부로 연행됐다. 20여 일 동안 온갖 고문과 협박을 당하며 그는 '분신 배후'가 되기를 요구받았다. 군에 복무하던 사람, 휴학생 등이 줄줄이 기무사, 안기부로 연행됐고, 당국은 '반미애국학생회'라는 이적단체를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지인의 회상은 아직도 섬뜩하다.
"야 임마. 이젠 털어놔. 너도 할 만큼 했잖아. 그렇지 않으면 오늘부터 여기서 밤새는 거야. 야 이 새끼야! 고집으로 될 일이 따로 있지!" 집요하게 분신 배후에 대해 물고늘어진다. "미련한 새끼야. 앞으로 더 견뎌낼 것 같아? 계속 잠을 자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넌 잠의 맛을 알기 때문에 이젠 이틀도 못 견뎌. 알겠어? 이 새끼야!"회유. 잡혔을 때보다는 긴장이 많이 느슨해졌다. 별 진척이 없자 "네가 영균이에 대해 그렇게밖에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반미애학(반미애국학생회)을 터뜨릴 수밖에 없어. 이 멍청한 자식아. 지금 벌써 군 기무사, 군경, 안동경찰서 합동으로 연행과 조사를 착수했어. 지금도 늦지 않았어. 선배라는 놈이 후배들 징역살이시켜서 되겠어?"- <김영균 열사 10주기 추모자료집> 중에서잡혀가지는 않았으나 졸지에 수배자가 된 세 명은 교수님의 차를 얻어 타고 학교를 탈출했다. 후배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7시 뉴스에서 나를 포함한 수배자 이름이 나오고 27명 규모의 조직사건이 발표됐다. 이후 분신 배후 혐의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으로 옮겨가 버렸지만 수배자가 된 많은 사람들의 기나긴 수배생활은 김영삼 정부 출범 전까지 계속됐다. 몇 년의 수배생활. 나는 아직도 가끔 그때의 악몽을 꾼다.
그래서, 여전히, 너의 꿈은, 서럽게도, 유효하다4월 30일 안동에서 버스를 내려 지인의 차를 타고 전야제가 준비되어 있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으로 향한다. 창밖으로 보는 산 빛깔이 곱다. 붉은 영산홍도 보이고 마지막 남은 벚꽃류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린다. 그해 5월도 이랬을까? 그해 5월에도 산천 이렇게 아름다웠고 꽃들도 피어 있었을까?
기억이 없다. 눈물과 분노, 결의와 악다구니. 잡혀가지 않고 살아남아야 죽어간 사람의 내일을 대신 살 수 있다는 절박감이 전부였던 그해 5월. 5월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회색빛의 하늘 아래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김지하 시인의 일갈은 나와 많은 이들에게는 아직도 화인으로 남아 있다.
짐을 풀고 저녁을 먹자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전야제가 시작되었다. 무대를 여는 공연은 아이들이 먼저다. 상처 하나씩 간직한 엄마 아빠들 앞에서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라는 노래를 누구는 귀엽게, 누구는 참 씩씩하게 부른다.
세월이 흐르긴 참 많이도 흘렀다. 새 세상 열겠다고 한 몸 불살라 간 지 20년. 묵은 쑥대 밑에 새싹이 돋아나듯 아이들은 참 예쁘게 크고 있는데, 세상은 그때보다 조금은 나아졌을까? 나는 죽어간 그들의 내일을 위해, 저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 그때의 열정과 다짐을 얼마나 간직하며 살고 있을까?
영균이의 친구인, 이제는 마흔이 된 후배는 두 돌 지난 아이를 등에 업고 무대에 섰다. 눈물을 찍어내면서 아픔과 희망을 이야기했고, 환경운동가로 이름이 꽤나 알려진 또 다른 후배는 열사의 후배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노라고 말했다.
경남 진주와 그 일대에서 문화예술센터로 널리 알려진 '큰들'은 세 명이 단원이 열사의 후배라는 인연으로 서른 명의 대식구가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와 추모곡을 불러주었다. 반가움으로 애뜻함으로 비 오는 밤이 깊어갔다.
5월 1일. 영균이가 쓰러진 민주광장에서 김영균 열사 20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약력 소개와 추모사에 이어 선배인 안상학 시인의 추도시가 낭송된다.
살아 스무 살 청년아/ 죽어 스무 살인 청년아/ 지금 너는 어디선가못다 한 공부도 하고 연애도 하며/ 참하게 살아가고 있겠지 믿는다만행여 이 땅일랑 돌아보지 말아라/ 이게 뭐냐고, 도대체 무엇들 하느냐고행여 두 번 다시 불을 놓을 생각일랑 말아라/ 잘못됐다 잘못했다 잘못이다그래, 이 땅은 지금 청년들이 불꽃도 없이 투신하고 있다그래, 이 땅은 지금 산과 강들이 생매장당하고 있다이 땅의 아픈 사람들은 여전히 아프다/ 갈라선 이 땅은 여전히 하나가 아니다그래서, 여전히, 너의 꿈은, 서럽게도, 유효하다- 안상학 시인의 시 <살아 스무 살 청년아, 죽어 스무 살 청년아!> 중에서 분향 순서. 국화꽃을 받아들어 영전 앞에 바친다. 애써 외면해온 영정 속 얼굴을 또 다시 바로 보지 못했다. 아직 눈물이 남아 있던 걸까? 무대 뒤로 돌아와 피우지 않던 담배를 문다. 여기저기 숨죽여 우는 소리가 들린다. 영혼을 묻은 묘소에 참배하는 것을 끝으로 이틀의 일정이 끝났다. 묘소를 뒤로하고 하산하는 길. 멀리서 장꿩 우는 소리가 잘 가라는, 잘 살라는 배웅 소리처럼 들린다.
영균이와 나,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광주시민을 총칼로 제압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민정당을 만들고, 3당 야합으로 민자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또 다시 한나라당 바뀐 20년 세월. 민주주의는 여전히 압살의 지경에 있고 정권의 인권의식은 후퇴되었다는 목소리가 높다.
20년 전 후배의 죽음에 "타도 노태우, 해체 민자당"을 외치며 산 스물여섯의 나는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 여전히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다. 죽어간 후배가 있던 자리,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가 틀리지 않음을 나는 오늘 보았다. 그때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고 그 투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경향신문>은 4월 24일자에 이렇게 썼다. "'91년의 봄'이 20년을 맞았다. 4년 전인 87년의 6·10항쟁이 대통령 직선제라는 가시적 성과물을 거두며 '승리의 기억'으로 남았다면, 91년 5월투쟁은 참담한 패배이자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나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991년 5월투쟁, 그 서글픈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 죽음에 분노해 거리에 나온 많은 사람들에게 패배를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잔혹하고 섣부르다. 등록금 때문에 대학생이 자살하고, 자식에게 짐 될까봐 노부부가 목숨 끊는 현실. 군사독재와 민주세력의 대척점이던 전선은 민주와 반민주, 인권과 반인권, 빈과 부, 권력과 자치 등 수많은 전선으로 살아움직이고 있다. 역사가 어디 한 순간의 현상만으로 무 자르듯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
1991년 5월, 그 서글픈 죽음들이 20년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오고 있다. 패배라고 낙인 찍기보다는, 그들이 꿈꾼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의 할 일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