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에게 5월은 4월보다 더 잔인한 계절이다. 들어오는 돈은 그대로이나 쓰는 돈은 다른 달보다 두 배이기 때문이다. 이번 해 첫 조카가 태어났다. 백일이 겨우 지난 아기이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조카의 첫 어린이날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날 좋은 5월의 봄날, 주말마다 잡힌 결혼식은 또 어떠한가. 바쁜 걸 핑계 대며 몸은 가지 않을 수 있어도 '마음을 담은 정성(우리가 축의금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반드시 가야 한다.
그래도 무엇보다 대대적인 출혈의 역사일은 바로 '어버이날'이다.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거나 귀곡산장에나 나올 법한 가성으로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라며 노래를 부르는 건 어버이들이 진심으로 원치 않으시는 건 이미 알고 있다(물론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어버이들은 용돈을 두둑이 넣은 흰 봉투를 받으며 "뭘 이런 걸 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가장 좋아하신다. 그리고 "올해는 제발 시집가라"는 끝나지 않을 잔소리에도 딸내미가 짜증내지 않고 활짝 웃으며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을 그 다음으로 좋아하신다.
매달 얼마간의 용돈을 드리는 것은 이미 월급쟁이가 되면서부터 하고 있는 일. 월급날 지나기가 무섭게 각종 자동이체들이 내 통장에서 기승을 부리고 나면 이미 잔고는 0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런데 어버이날이 있는 5월이 과연 내게 감사와 기쁨의 달이 될 수 있겠는가. 처자식 없는 싱글녀도 이렇게 부담스러운데, 가정을 꾸린, 아래위로 어버이와 어린이가 있는 그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쌈짓돈으로 아이들 선물사려는 어버이들...짠하다
어린이와 관련된 업종에 있는 터라, 5월 5일 어린이날 나는 근무했다. 그날은 대목이었다. 각종 할인과 이벤트 행사에 어린이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식의 손을 잡은 어버이들로 매장이 가득 찼다.
파격 반값 할인 행사에 부모들은 그간 비싸서 사지 못했던 아이들의 상품을 지르셨다. 충분히 할인된 가격이었지만, 뭔가 더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여 묻고 또 물었다. 금액별로 주어지는 사은품에도 목숨을 걸었다. 200원이 모자란 3만 원, 2000원이 모자란 10만 원은 그냥 눈감아 줄 수 있었으나, 2만원 구입에 5만 원 사은품을 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어버이와는 승강이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파격 할인으로 물건을 구입한 어버이들은 막무가내로 5만 원 사은품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싱글녀는 힘으로도 말발로도 눈빛으로도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처음엔 당황스럽다가도 나중엔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쌈짓돈을 꺼내 이것 하나, 저것 하나 좀 더 얻으려고 하는 것들을 보면 사실 어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린이 잔치 소식에 서울 외곽까지 나와 바글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자식새끼에게 뭔가 하나 더 품에 안겨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와 그녀들은 이 땅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진정한 부모들이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사흘 후엔 그 어버이들의 어버이를 챙겨야 한다.
가정의 달, 20~40대 기혼자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앞길을 가로 막고 도무지 전진하지 않는 똥차를 피해 일찍 결혼한 동생네 부부는, 어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정석대로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가졌다. 자연스럽게 동생은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제부만이 하루 종일 주방에서 불과 열을 마주하며 일하고 있다(직업이 요리사다).
수입은 반으로 줄었는데, 아이가 하나 생겼고, 부모는 넷이 생겼다. 어린이날 기념 과잣값 인상을 시작으로 모든 물가가 오르고 있는 현실에서 동생네 부부의 5월은 정말 기쁨이 넘치는 달이 될까. 한 가장이 벌어오는 돈으로 어떻게든 시부모님껜 용돈을, 친청부모님껜 선물을 알뜰하게 챙기는 이들을 보니 결혼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둥의 말 같은 건 꺼내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결혼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참으로 단순하게도 그렇게 쌈짓돈으로 자녀들 장난감 고르는 것보다 나를 위한 옷을 사기 위해, 영화관 가는 것을 좀 더 즐기기 위해 이 시간을 연장하고 있는 이기적인 욕심에서 출발한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가정의 달, 월급 빼고 모든 물가는 다 오르는 세상에서 아이 키우며 부모님 모시며 살아가는 20~40대의 기혼자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격려하고 싶다.
동생은 오늘도 살살거리며 내게 전화했다. "언니네 회사에서 좀 더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아님 공짜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갓 100일 넘은 아기에게 벌써 동화책 싸게 살 방법이 없냐고 묻는 그녀가 출혈의 달 5월엔 그다지 밉지 않다. 오히려 물심앙면 도와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