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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내 지난 삶은 너무도 파란만장해서 소설로 써도 대단한 분량이다"는 말을 곧잘 한다. 그렇다면 파란만장(波瀾萬丈)의 뜻은 무얼까? 이는 바로 사람의 생활이나 일의 진행이 여러 가지 곡절과 시련이 많고 변화가 심함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지금껏 직장을 15번이나 바꿔야 했던 '비정규직' 박봉인 나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되고 부합되는 삶이 아닐까 싶다. 박복하고 불운까지 한 바람에 나는 고작 생후 첫돌을 즈음해 생모를 잃었다. 삶의 의욕을 잃으신 아버지께선 허구한 날 알코올만 끼고 사셨다.

나는 초등학교의 졸업식 날에도 학교에 가지 못 했다. 왜냐면 원치 않은 소년가장이 되어 6학년 1학기 무렵부터 고향 역 앞에 나가 구두닦이를 했기 때문이다. 6학년 때는 정말이지 학교에 간 날보다 못 간 날이 더 많았다. 그러함에도 학교에선 나를 제적(除籍) 처분하지 아니했으니 이는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덕분으로 나는 그나마 유일한(!)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갈 '자격'을 얻었으니 말이다. 역전에서 구두를 닦는 일은 하지만 그리 돈이 되지 않았다. 하여 비가 잦은 여름엔 우산도 떼다가 팔았는데 이게 그나마 돈이 좀 되었다. 이렇게 어렵게 살던 와중임에도 아버지께선 가장의 책무마저 포기했는지 아무튼 술을 더 드셨다.

그 모습이 하도 미워서 미리 입을 맞춘 초등학교 1년 선배를 서울서 만나기로 하곤 편지 한 장만 달랑 써놓고 집을 탈출했다. 그 선배의 주선으로 인천 제물포 역 근방의 철공장에 들어가 '공돌이'로 일했다. 그러나 롤러에 끼어 손이 순식간에 잘라지는 등의 너무도 잦은 산업재해에 대한 공포심이 보름을 못 넘기고 거길 그만두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용서를 빌고 이번엔 '직장'을 시외버스 터미널로 옮겼다. 광주리에 간식과 음료, 찐 계란 등을 담아서 파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친구가 공사장에 나가 노가다(노동)를 하자고 꼬드기기에 방위병으로 입대하기 전까지 그 일을 했다. 전역한 뒤 안정적인 직업을 찾던 중 학력보다는 능력이 우선이라는 영어회화 교재와 테이프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회사에 창립사원으로 입사했다.

앞만 보고 열심히 뛴 결과 전국 최연소 영업소장이 되었다. 그러나 불과 6개월도 안 되어 그만 회사가 부도가 나 공중 분해되었다. 그러니까 그 짧은 기간이 나로선 처음이자 마지막의 '정규직'이란 안전판이었던 셈이다. 그 회사를 나와 이번엔 아동용 전집류를 월부로 파는 회사에 들어갔다. 한데 가가호호 방문하는 것이 영 체질에 안 맞았다.

그래서 이번엔 카메라를 전문으로 파는 대리점에 입사했다. 거기서 돈을 제법 벌어 어학교재 대리점을 교육도시 청주에 냈다. 그러나 1년도 안 되어 쫄딱 망해서 돌아왔다. 이번엔 여간해선 안 망한다는 순대 전문 식당을 냈다. 하지만 그 또한 나에겐 들어맞지 않았다.

나는 또 무일푼이 되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세일즈맨으로 일을 시작했다. C일보 대리점에 들어가 정기간행물인 월간지와 주간지를 열심히 팔았다.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자 수입도 늘어 아내에겐 슈퍼마켓을 차려줄 수 있었다. 혼자서 벌 때보다 둘이서 벌면 우리도 머지않아 부자가 되리라 믿고 열심히 뛰었다.

새벽부터 문을 연 가게는 자정이 넘어서야 닫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IMF라는 괴물이 순식간에 나타나 그런 소박한 바람마저 또 다시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다. 대추나무에 걸린 것과도 같은 빚을 갚고자 경쟁사인 D일보 대리점에서 2천만 원을 선가불(先假拂)로 받아 빚잔치를 하였다.

6년여를 일해 그 빚을 겨우 갚고 나니 사장님께선 앞으론 전도무망하다며 그 사업을 접으셨다. 그를 인수한 새로운 사장님이 계속하여 같이 일하자고 했으나 배짱이 안 맞아 선배와 사무실을 얻어 독립했다. 4년 가까이를 그 선배와 한솥밥을 먹었는데 그러나 이 시기가 나로선 가장 고되고 힘든 시기였다.

여름이면 흡사 한증막과도 같은 허름한 월세의 사무실은 겨울이면 또 삭풍이 휘몰아치는 시베리아 벌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서울로 유학 간 딸의 바라지까지 해야 했으므로 나는 정말이지 얼추 5년 동안이나 만날 집에서 도시락을 싸 가지고 출근해야 했다.

반찬이라곤 늘 신김치였으며 어쩌다 그에 곁들이는 국물을 먹을 수 있는 컵라면이라도 하나 있는 날은 그게 바로 '진수성찬'이었다. 추운 새벽에 나와 갈탄으로 난방을 시작하자면 얼굴은 이내 까만 아프리카 토인이 되었고 흰 셔츠 역시 더러워져 '이 지긋지긋한 생활도 이젠 그만!!'이란 생각이 결심이 틀었다.

작년 2월, 그토록이나 기다렸던 아들과 딸이 이틀 간격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이젠 학비 부담이 사라졌구나 싶어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아울러 이젠 아침마다 개고생도 그만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에게 그간의 고마움을 조촐하나마 식사대접으로 인사하고 현재의 직장으로 옮긴 게 바로 작년 5월이다.

다행히 현재의 직장은 사장님이 참 좋으셔서 점심도 공짜로 사 주신다. 다만 월 매출은 형편없고 터무니조차 없이 마구 곤두박질하여 차마 면목이 없긴 하지만. 오늘은 어버이날이어서 숙부님과 숙모님께 인사를 드리려 건강식품과 카네이션  꽃을 사 들고 충남 아산에 갔다.

선친께선 이미 26년 전에 작고하신 때문으로 내게 있어 유일한 혈육이라곤 숙부님뿐인 터여서 해마다 찾아뵙는다. 그런데 숙모님께선 닷새 전에 허리 수술을 하시는 바람에 천안의 모 병원에 입원중이시라고 하셨다. 당초엔 건강식품과 카네이션 꽃만으로 어버이날의 선물을 모두 '해결'코자 하였다.

한데 막상 숙모님께서 입원하셨다고 하니 빈손으로 병원에 간다는 게 퍽이나 망설여졌다. 지갑엔 집으로 돌아갈 돈 밖에 없는데. 잠시 좌고우면 끝에 24시 편의점을 운영하시는 제수씨에게 20만 원을 급히 차용했다. "죄송해요! 통장으로 송금해 드릴 게요."

숙부님의 차에 편승해 병문안을 하면서 숙모님께 그 돈을 봉투에 담아드렸다. "맛난 거 사 드시고 어서 쾌차하세요!" "너도 어려울 텐데 왠 돈을?" "아닙니다. 이젠 저도 돈 들어갈 데가 없어서 살만 하거든요" 그러나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직장인이 된 아들과 달리 딸은 대학원에서 여전히 공부하고 있다.

올부턴 한 푼도 안 보태주기로 한 딸이었는데 그게 맘처럼 안 된다. 그래서 지금도 월 30만 원을 보내주고 있는데 이 돈마저 나로선 참 벌기가 힘든 게 현실이고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현재 처지는 '물장수 삼 년에 궁둥잇짓만 남았다'.

즉 이는 오랫동안 애써 수고한 일이 보람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물론 이같은비유는 나의 경제적인 면에 국한하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비정규직에서 벗어나 정규직의 안정된 직장으로 입사하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지천명이 되던 지난 2008년에 3년 과정의 사이버 대학에 들어가 작년에 졸업했다는 것이다.

작년 여름엔 또 부단한 별도의 노력으로 모 문학회를 통해 수필가로도 등단했다. 그러나 바뀐 건 하나도 없다. 나는 여전히 비정규직이다. 현재의 생업만으론 입에 밥도 못 밀어 넣는 형국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투잡'의 일환과 방편으로 5곳의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여하튼 천만다행으로 얼마 전 딸은 이런 용기의 말을 해 주어 날 감격시켰다는 것이다.

"아빠, 지금도 저 땜에 고생이 많으셔서 죄송해요! 그렇지만 기왕지사 고생하신 거 올해만 더 고생하세요. 내년부턴 저도 돈을 벌거니까요." 

15번이나 직장을 바꾼 명실상부의 파란만장 세일즈맨인 나의 처지는 여전히 '붕어 밥알 받아 먹듯' 그렇게 무일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굴하거나 남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딸 말마따나 올해만 지나면 나에게도 이젠 '고생 끝, 행복 시작'의 서광이 밝게 비출 것이라 믿기에.

덧붙이는 글 | '이직 때문에 생긴 일' 공모 기사입니다.



태그:#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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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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