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3월 13일 새벽, 뉴욕에서 28살의 키티 제노비스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살해당했다. 이 살인사건은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미국에서는 1년에 약 만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제노비스 살인사건은 그 만 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특별한 점이 있었기에 이 사건으로 미국이 충격에 빠졌을까.
사건발생 며칠 후에 살인범 윈스턴 모즐리가 체포되었고 범행일체를 자백했다. 모즐리는 결혼해서 부인과 두 자녀가 있는 가장으로 낮에는 천공기 제조회사에서 일했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회사 사장도 모즐리가 모범적인 직원이자 꼼꼼한 근로자였다고 진술했다.
하긴 대부분의 연쇄살인범들이 겉으로는 평범하고 멀쩡해 보인다. 나아가서 이성에게 호감을 주는 외모와 언행을 가진 살인범들도 많다. 문제는 이들이 일정 주기만 되면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못 견딘다는 것이다.
윈스턴 모즐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키티 제노비스를 살해하기 이전에도 여러 명의 여자들을 살해한 경험이 있다. 사람을 죽일 때 별다른 이유는 없다. 모즐리는 연쇄살인범이면서 동시에 시신을 강간한 시체애호가이기도 했다.
자신의 집 앞에서 살해당한 28세 여성디디에 드쿠앵의 2009년 작품 <누가 제노비스를 죽였는가>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 제노비스 살해사건을 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은 범인의 내면이나 심리, 또는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제노비스가 살해될 당시에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경찰서장은 제노비스 살해사건의 공범이 무려 38명이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38명의 범인이 각자 칼을 들고 28살짜리 여자를 위협하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경찰서장은 '공범'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보다는 '방관자'라는 말이 더욱 적당할지 모른다.
제노비스가 살해된 장소는 자신의 집 앞이었다. 그때 주변 아파트 주민들 38명이 제노비스가 공격당하는 모습을 창 밖으로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 중 아무도 제노비스를 도와주지 않았고, 하물며 경찰에 신고전화 조차 하지 않았다. 제노비스는 살인범에게 30분넘게 공격받으며 계속해서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파트 주민들 중에서 한 명이라도 밖으로 나와 제노비스를 도와주었다면, 경찰에게 전화 한 통만 했더라면 제노비스는 살았을 것이다. 아마 지금까지도 살아있을지 모른다. 왜 이들은 전화 한 통 하지 못했는지 의문이다.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어서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도와줄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주위의 방관자들 덕분에(?) 제노비스는 죽었다. 범인 모즐리는 감방에 갇힌 채 아직까지 살아있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범인의 모습과 당시 목격자들의 모습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밖으로 나가서 피해자를 도와주었을까?
냉혹한 살인자와 무관심한 목격자이 사건 이후로 '제노비스 신드롬'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만들어졌다. 그녀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의 수동적인 태도 때문에 생겨난 용어다. 긴급상황에서 목격자의 수가 많을수록 책임이 분산된다. 목격자는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노비스가 죽을 당시 목격자들의 태도는 이런 신드롬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설명한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제노비스 사건은 미국에 긴급구조번호 911 서비스를 만들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
제노비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자 미국인들은 충격 속에서 생각에 잠긴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데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또는 위험요소가 사라지고 나서야 도움을 주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살인범도 문제지만 방관자도 문제다. 잔인한 폭력도 무섭지만, 그 폭력이 방관된다는 사실도 무섭다.
덧붙이는 글 | <누가 제노비스를 죽였는가> 디디에 드쿠앵 지음 / 양진성 옮김. 황금가지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