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기다리던 MBC <주말의 명화>와 KBS <토요명화>를 기억하는가. 별다른 선택이 없었기에 더 아련하고 흥분됐던 주말의 밤이었다. 각 영화사 시그널 음악이 시작을 알리면 심장도 같이 '두드드드' 떨렸더랬다. 요새는 영화를 흔하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그 옛날 영화 보여주는 TV는 사라졌지만, 지상파 3사의 영화 소개하는 TV가 그 시절 아련한 흔적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에겐 가장 손쉬운 타임머신이 있다. 귀에 익은 시그널, 주말마다 이불 속에서 눈 비비게 했던 별천지 세상. 온가족 쭈뼛거리게 만들던 달콤한 키스신과 점점 야무져 가는 이상형들 너는 주윤발, 나는 주성치. 그 시절 공유했던 한 순간 떠오르게 하는 영화야말로, 진정한 타임머신이다." (KBS <영화가 좋다> 192회 중 추억의 부스러기 163화 내레이션) 토요일 오전엔 KBS <영화가 좋다>와 SBS <접속 무비월드>가, 일요일 낮에는 MBC <출발 비디오 여행>이 시청자로 하여금 주말 오후 영화관을 찾도록 만들고 있다. 이들은 지상파 3사의 유일한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자, 유사한 포맷 속에서도 서로 다른 매력으로 꾸준히 사랑받는 장수 프로그램들이다. 덧붙이자면 지상파 3사를 통틀어 시청률보단 그 주 소개한 개봉 영화의 관객 동원 수에 프로그램 영향력이 판가름 나는, 이른바 시청률 무풍지대 프로그램들이기도 할게다.
다 같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이들 모두 영화 소개라는 같은 프로그램 성격상 매주 개봉하는 영화 소개와 영화계 소식 그리고 유사한 신·구 두 작품을 비교하는 등 기본 구성 포맷이 비슷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거기에다 나오는 영화 신작들도 한정돼 있고 셋 모두 상업영화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주마다 비중 있게 소개하는 영화들 역시 거의 겹친다는 점에서 어느 것 하나 킬러 프로그램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셋은 각자 나름의 코너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특징적인 메인 코너로 프로그램 이미지를 포장하는데 사활이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이들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는 코너들은 비슷한 듯 다르며, 주축으로 내세우는 코너 역시 달라 서로 다른 방법으로 영화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셋 중 대한민국 영화전문 프로그램 원조로 가장 오랜 기간 방영(15년) 중인 MBC <출발 비디오여행>은 나머지 두 프로그램이 한 회당 5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있는 반면, 매주 7~8편의 영화를 같은 시간 안에 깊이 있는 해설과 함께 재치 있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영화 전문가이드 프로그램 베테랑답게 그동안 '영화 대 영화', '결정적 장면' 등 많은 인기 코너를 배출하면서 3사 프로그램 중 가장 뚜렷하게 이미지가 잡혀있다.
박경추, 양승은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이뤄지는 <출발 비디오여행>은 현재 6개의 코너가 진행 중이다. 독립영화 감독 윤성호의 설명으로 영화 촬영장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함께 세편의 신작을 소개하는 코너 '영화 뭘 볼까'는 소개되는 영화와 괘를 같이 하는 다른 영화들을 함께 버무려 소개하거나 감독들의 전작과 비교하는 등 풍부한 소개를 덧붙이고 있다.
또 박경추 아나운서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영화에는 항상 즐거움이 있다, 유비무환'은 개봉 예정작 중 한 편을 심도 있게 분석하는 코너로 내외적으로 드러나는 영화의 중요 포인트를 짚어준다. 어느덧 <출발 비디오 여행>의 마스코트가 된 김경식과 김생민 특유의 내레이션과 제스처가 돋보이는 코너 '영화 대 영화'와 '기막힌 이야기'는 나머지 두 후발주자가 벤치마킹하기도 한 대표 코너다.
최근 들어 신설된 '영화 속 뒷이야기, 코멘터리'는 감독과 영화 배우가 실제 영화 중간 중간 직접 촬영 비화를 소개하는 내레이션을 삽입하는 스페셜 무비 비하인드다. 끝으로 특정 영화 소개에서 벗어나 매주 영화와 관련된 한 가지 기획을 놓고, 가령 배우로 거듭난 아이돌 가수 연기 열전과 같은 특집 코너가 방송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KBS, SBS 영화 가이드 프로그램의 모델이 된 <출발 비디오여행>은 나머지 두 프로그램에 영감을 준 원조임에도, 실험적인 코너들을 꾸준하게 도전함으로써 여전히 풍부한 코너를 가진 프로그램으로 앞서나가고 있다.
미는 코너 따로 있고, 되는 코너 따로 있다
워낙 다양한 코너로 시청자에게 영화를 전달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출발 비디오여행>의 대표 코너를 손꼽을 수는 없지만, 뭐니 뭐니 해도 장수 코너 김경식의 '영화 대 영화'와 김생민의 '기막힌 이야기'가 지금의 <출발 비디오여행>을 가능케 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2006년 11월과 2007년 9월 뒤늦게 전파를 탄 KBS <영화가 좋다>와 SBS <접속 무비월드>는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또 비슷한 포맷을 수밖에 없는 원조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각자 따로 미는 코너가 하나씩 있다(MBC와 마찬가지로 신작소개 코너로 SBS는 '개봉박두'를 KBS는 '신작열전'를, 닮은 꼴 두 영화 비교 코너로 각각 '영화 공작소', '동시상영관'을 방영중이다). <접속 무비월드>의 '영화는 수다다'와 <영화가 좋다>의 '추억의 부스러기'가 그 것.
'영화는 수다다'는 칼럼니스트 김태훈과 평론가 이동진이라는 두 영화 전문가가 라디오 부스를 연상시키는 스튜디오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화제작을 선정, 영화 감독과 배우 한 사람을 초대해 수다를 떤(?)뒤 촌철살인 멘트로 영화를 평가하는 코너다. <출발 비디오여행>의 '영화 속 뒷이야기, 코멘터리'를 발전시킨 형태로 <접속 무비월드>의 대표코너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MC 전현무 아나운서의 영화인 인터뷰 코너 '전씨네 全 cine 인터뷰'와 함께 '영화는 수다다' 코너는 회를 거듭할수록 영화 가이드를 원하는 시청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접속 무비월드>의 색깔을 흐리고 있다.
실제 지난 9일 방송분 '전씨네 인터뷰'는 전체 45분 분량 중 1/4인 15분을 신예 여배우 세 사람과의 인터뷰로 채웠으며, 이동진, 김태훈의 만담과 전문적인 해설과 영화 비판으로 이목을 끌었던 '영화는 수다다' 역시 출연 게스트 중심의 개봉영화 홍보 쪽으로 치우치면서 둘 모두 흡사 자회사 연예정보프로그램 <연예가중계>를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어졌다.
그렇다면 KBS <영화가 좋다>의 '추억의 부스러기'는 어떤가.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명작을 따라 추억의 그 시절 그 영화를 다시 음미해 보는 코너(자체 홈페이지 소개 인용)로 3사 프로그램을 통틀어 가장 차별성 있는 코너라 할 수 있다. 특히나 한편의 시를 보는 듯한 내레이션은 '추억의 부스러기'만 따로 모아두는 열혈 시청자가 있을 정도로 영화 마니아들의 감성에 소구하는 코너다.
TV 시청자와 영화 관객의 본능결국 이 영화 가이드 프로그램들의 성패요인은 쉬우면서도 간단한 본질에 있다. 영화를 사랑하는 시청자들에게 영화를 즐기는 프로그램은 이 기나긴 분석이 아니더라도 마음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이라고 보는가.
영화에 무한매력을 느끼는 한 사람으로서 '영화가 좋아' 시청자를 가이드 하고자 하는 프로그램과 '방송을 위해' 영화를 가이드하는 프로그램은 본능적으로 다가온다. <출발 비디오 여행>, <영화가 좋다>, <접속 무비월드>의 미미한 시청률 차이는 분명 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주말 저녁 시작을 알리는 영화 시그널 음악에 함께 '두드드드' 떨렸던 심장들이 어디 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