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61년을 함께 하신 어머니, 아버지
61년을 함께 하신 어머니, 아버지 ⓒ 이재연

"너 고춧가루 안 가져가니?"

올해 초 어느 주말 아침, 캐나다에 살다 잠시 한국에 들어온 내게 친정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표면적인 용건은 지난가을 아버지가 직접 수확한 고추로 빻은 고춧가루를 가져가라는 것이었지만, 내심은 막내딸과 사위를 기다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뭐라고 말을 거들던 엄마가 수화기를 가로챈 듯한데, 언제 올 거냐고 묻는 엄마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엄마!! 엄마! 무슨 일 있어?"
"아… 니… 다……."

단 세 음절의 강한 부정에 더 의구심이 커졌습니다.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어 보여 바로 달려간 친정집은 의외로 폭풍전야처럼 조용하기만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억지 평화일 망정 괜한 질문으로 분위기가 깨어질까 하여 호기심을 자제하며 엄마와 나란히 싱크대 앞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며 물었습니다.   

"엄마… 아버지랑 싸웠어?"
"늙어서 싸움은 무슨…."
"그럼. 엄마 목소리가 왜 그래?"
"휴, 니 아버지보고 엄마한테 좀 잘하라고 해라~"

엄마도 팔순이지만 여자입니다. 굳세게 자존심을 사수하려는 엄마를 살살 꼬드겨 듣게 된 아버지의 죄(罪)목은 '아내의 고통을 간과한 죄'. 부부 사이는 젊으나 늙으나 서로에 대한 무심(無心), 늘 그것이 문제인 듯합니다.

"아버지보고 엄마한테 좀 잘하라고 해라"

전말은 이랬습니다. 새벽마다 다리가 저린 엄마가 CT 촬영을 했고, 며칠 후 병원에서 나오는 결과를 기다리던 중, 같은 병원서 종합검진을 하신 아버지가 진료 후 엄마의 검진결과를 한 번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왔다는 것입니다. 늙어서도 젊을 때와 변한 게 없다며 밤마다 통증에 잠도 못 이루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 엄마의 주된 분노였습니다. 너무 서운해서 많이 울었다는 엄마는 딸 앞에서 또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십니다. 그러니까 싸움은 싸움인데 80대 부부의 사랑싸움인 셈입니다. 하소연과 함께 눈물을 쏟아 놓는 엄마 앞에서 막내딸인 나는 생뚱맞게 웃음이 났습니다.

"엄마! 80평생 그렇게 사신 아버지께 뭘 기대하우. 남편을 잡을 거면 진즉 잡았어야지. 그리고 아버지가 엄마 아픈 거 관심 없어서 그냥 오신 게 아니라, 아버지도 80 노인이라 깜빡 잊은 거 아닐까?"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리시던 엄마가 힐끗 쳐다보더니 역정인지 힐난인지 볼멘소리를 하셨습니다. 

"이 가시나는 만날 지 아버지 편만 들고…."

신문을 보는 척, 우리 대화를 엿듣고 계시던 아버지가 슬쩍 끼어들며, "헛 참, 내가 깜빡 잊어서…"라고 하셨지만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의 이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히 상황이 짐작이 가는데, 어쩌면 엄마도 무관심이 아니라 아버지의 단순한 실수였다는 걸 알면서 복수혈전을 하는 게 아닌가 싶긴 했습니다. 젊은 날 도박에 외도에 일탈을 일삼던 아버지의 과거사가 보통 복잡해야지요.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더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어 그 미움을 삭이느라 엄마가 등산하러 다닌다고 일전에 말했던 기억 때문입니다.

외간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같은 방에서 자던 밤, 막내인 나를 가슴에 껴안고 귀 닫고, 입 닫고, 생각을 닫은 채 죽은 듯 잤노라고 마치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하던 엄마에게 나는 "엄마는 여자도 아니었냐"고 되레 화를 냈습니다. 엄마보다 더한 분노가 일었기 때문이죠.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그날 밤으로 돌아가 그 여자랑 아버지를 요절을 내고 싶은 심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엄마가 과거를 잊고 마음을 회복해서 편안해지기 위해서는 위로와 어떤 처방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엄마, 만약 아버지 안 계시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적막강산일 사람은 엄마야. 효자 열 자식이 무슨 소용이야. 살가운 남편에 지 새끼 거두느라 마음은 있어도 모른 척하며 살 걸? 아버지가 저렇게 엄마 속 긁는 지금이 아마 무척 그립지 않을까?"
"흥! 뭔 소리! 내가 지금이라도 혼자 나서면 어디 가서 밥 못 먹고 살 줄 아냐. 자알! 살 수 있다. 니 아버지가 불쌍하지."

"엄마 힘들고 분하면 이혼해버려"

적당히 위로하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엄마의 맺힌 한이 워낙 크기 때문인지, 반발이 예상외로 강해, 어쩌면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불꽃이 튀어 역효과를 낼 것만 같았습니다. 작전을 바꿔 강수를 두기로 했습니다.
  
"하긴, 엄마가 참고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엄마가 정말 참기 힘들고 분하면… 지금이라도 이혼해버려. 요즘은 황혼이혼이 흔하다는데 아버지는 늙어서도 속만 썩이니까 차라리 엄마 혼자 사는 게 편할지도 몰라. 엄마가 없어 봐야 소중한 줄 아실 거야. 이혼 그거 뭐 별거 아냐. 1분이면 끝나… 서류는 내가 내일 구청 가서 가져다줄게."

그간 엄마의 화풀이를 대신하려는 듯 내일 당장 구청에서 이혼 서류 가지고 올 기세로 아버지 흉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음먹으면 저질러 버리는 딸의 성격을 잘 아는 엄마는 잠시 당황하는 듯 눈치를 보시더니 슬그머니 발을 빼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니 아버지… 자식들 사랑하는 마음이야 세상에서 따라올 사람이 읍따. 너는 엄마보다 아버지 좋아하잖아. 젊을 때 비하면 많이 달라지긴 했으…."
"달라지면 뭘 해. 엄마가 아프면 매일 병원에 모시고 가서 치료하고 차 타고 가서라도 결과를 알아보고 처방전 받아서 약 사오고 신경을 써야지. 아버지 몸 이상 없다는 말만 듣고 신나서 오셨겠지. 요즘 아버지 같은 남편이랑 살아 줄 여자는 엄마밖에 없어…."
"아녀. 요새 설거지도 도와주고 내가 교회 갔다 오면 라면도 끓여 드시고 한다."

설거지에 라면 끓여 먹는 것도 가사노동이라 생각하시는 엄마. 지나가는 새도 웃을 일이지만 세숫대야에 따끈한 물 받아서 방안에 대령하면 텔레비전 시청하면서 발 닦던 아버지였으니 엄마에겐 엄청난 사건인 것입니다. 속으로 터지는 웃음을 꾹 참으며 수습에 들어갔습니다.

 영화 <노트북>에서 치매에 걸린 앨리와 노아는 변함없는 사랑을 간직한 채 여생을 함께한다.
영화 <노트북>에서 치매에 걸린 앨리와 노아는 변함없는 사랑을 간직한 채 여생을 함께한다. ⓒ CJ엔터테인먼트

"엄마, 우리 엄마 고생하며 살아온 것 다 알아. 그러니까 아버지 건강하신 것만도 복이라 생각하고… 엄마가 우리 아버지 좀 용서해 줘."

신문을 보는 척 우리의 대화를 다 듣고 계시던 아버지의 팔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돈도 안 드는 말! 그거 좀 따뜻하게 하시면 안 돼요? 딸한테 하는 것처럼, 옆집 아줌마한테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시면 아무 일 없잖아요. 관광 가실 때 옆자리 앉는 과부 아줌마, 다른 여자들 그거 다 뜬구름이야. 아버지의 로또는 엄마예요. "

맛있는 것 있으면 엄마 먼저 챙겨주고, 차 타면 먼저 엄마 자리 잡아주고, 남들 앞에서 엄마 체면 세워주고, 여행가면 손 꼭 잡고 다니면서 말씀하실 땐 소리 지르지 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시고… 사실은 젊은 내 남편에게 바라는 수십 가지를 나열했습니다.

"알았따!"

경상도 본토 기질을 80년 동안 굳건히 지키며 사신 아버지께 살가운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고춧가루와 말린 나물들을 차에 실어준 다음, 우리가 떠나는 걸 지켜보려고 나와 계시는 두 분을 바라보니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61년을 해로한 부모님이 너무 귀엽습니다. 차창을 내린 뒤 팔을 내밀어 엄마의 손을 잡았습니다.

"엄마. 철없고 생각 없고 평생 잘못하는 줄도 모르는 뻔뻔한 우리 아버지. 엄마! 우리 아버지 좀 부탁해. 응?"

그리고 떠나는 차 뒤로 엄마의 싫지 않은 목소리가 따라왔습니다.    

"하이고! 가시나야! 니 아버지 부탁 고마해라. 내가 니 새엄마냐!"


#아버지#친정 부모님#철없는 남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87,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캐나다 그리고 춘천을 오가며 서식하고 있습니다. 호기심과 열정을 뿜어내는 에너지 넘치는 삶의 이야기로 읽는 이들 모두가 더 가까워지고 모두가 행복한 이야기 쓰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