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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4년에서 5년마다 한 번씩은 정치적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서게 되지만, 한국인들 대다수는 정치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넌 너무 정치적이야, 정치꾼, 정치싸움 그만 해라 등등 우리는 '정치 죽이기'에 여념이 없다.

 

아이러니 하게도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는 참으로 많은 말들을 한다. 국가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는 이것도 안 하고 뭐 하느냐 등등 무슨 큰 문제만 터지면 우리는 정당이라는 정치 집단이 리더십을 행사하는 국가를 타박한다.

 

정치 혐오증과 국가에 대한 높은 기대의 부조리한 동거. 이는 사실 민주주의와 민주적 토론 및 경쟁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해서 생겨난 증상이 아닐까 한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국가의 힘과 역할이 막강했지만 합리적인 말'싸움'과 표'싸움'은 많이 경험해보지 못했다. 오히려 비판과 견제에 대해 늘 '발목 잡기'라는 비판을 하고, 목숨을 건 '투쟁'이 아니면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곤 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싸움이다. 스포츠가 제도화된 혈투이듯 민주주의도 제도화된 말의 혈투라 할 수 있다. 무엇을 둔 혈투인가? 정치적 이념, 이념이 구체화된 정책, 그리고 현실적인 이해관계의 조정을 둘러싼 혈투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4대강을 파겠다는 공약에 대해 온 국민이 합리적인 혈투를 벌이고, 국회에서 합리적인 혈투를 벌였다면 지금처럼 성급하고 부실한 결과가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4대강 공사비면 F15 전투기가 몇 대요 무상급식이 몇 년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지 않았던가? 정치적 논쟁이란 결국 돈 낭비와 갈등을 줄이는 가장 합리적인 방책인 셈이다. 우리는 그래서 내년 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보수와 이른바 진보가 내놓는 이념과 정책, 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창조적 세계화론>, 이른바 보수의 모호한 구상

 

<창조적 세계화론>은 보수의 브레인으로 통하는 박세일 한반도 선진화 재단 이사장이 꾸준히 내놓았던 국가개혁 비전의 최신 버전이다. 제목만 봐서는 김영삼 정부의 핵심 아젠다였던 '세계화론'의 최신판 혹은 아류작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2006년에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이라는 책을 통해 한반도 선진화라는 보다 복합적인 비전을 제시했었고 거기에 담긴 비전과 내용은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재단의 핵심 콘텐츠로 채용됐다. <창조적 세계화론>은 결국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을 다시 한 번 확장하고 세련되게 다듬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학교에서부터 청와대 정책실장까지 두루두루 경험한 저자의 다채로운 경험만큼이나 내용이 풍성하고 짜임새 있게 정리돼 있다.

 

박세일 이사장의 공동체적 자유주의는 이 책까지 포함한 모든 저작을 면면이 관통하는 철학적 토대이다. 개인의 자유와 창의와 존엄을 기본으로 하되 공동체적 가치와 연대도 중시하자는 것이다.

 

어느 쪽에서도 욕먹지 않을 스타일의 이념으로 딱히 코멘트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다만 문제는 그가 제시했던 이념과 비전과 정책 구상 모두가 3년 6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말잔치'에 그쳤다는 점이다. 어느 정부에서나 좋은 말은 넘쳤지만, 이명박 정부처럼 말의 가치와 국가적 실상의 괴리가 심각했던 적은 없었다.

 

박세일 이사장은 2006년의 저작에서 한국이 경제적으로 추락하는 이무기가 되었다고 했지만, 2011년의 한국은 정치와 외교와 사회와 경제 모든 면에서 중병을 앓고 있다. <창조적 세계화론>은 이런 상황에서 보자면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론처럼!) 나락에 떨어진 이른바 보수의 공허한 구상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불량사회와 그 적들>, 문제는 확실히 짚었다

 

<불량사회와 그 적들>은 보는 순간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패러디라는 느낌을 준다. 칼 포퍼의 제목을 차용한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이 대단히 불량스럽게 변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책은 제목에 걸맞게 문제점을 확실하게 짚어주고 있다.

 

똑같은 말이라 해도 누가 어떤 식으로 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법이다. 책의 저자는 그래서 중요하다. 장하준, 도정, 조국, 김두식, 엄기호, 강신준 등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내로라 할 만 한 쟁쟁한 '비판쟁이'들이 한국의 문제들을 면도날처럼 발라내고 있다.

 

<불량사회와 그 적들>은 2011년 현재까지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을 통해 기획되고 진행되었던 인터뷰와 좌담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책 전체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핵심 테마는 없지만, 문제를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목적에는 충실하다(문제를 알아야 답이 나오는 법이니까).

 

도정일 교수는 다분히 관념적일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매우 치명적인 '생각하는 힘의 회복'에 대해 논한다. 이름값 하는 '글로벌'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는 이 책에서도 시장 만능주의에 대하여 치열한 이념 전쟁을 벌인다. 진보 진영의 부흥 전도사를 자처하는 조국 교수는 양극화와 사회적 연대 의식의 퇴락을 비롯한 제반 문제에 대해 진보-개혁 진영이 뭘 할 수 있는지 묻는다.

 

한가하고 안이한 이명박 비판에 머물지 않고 있다는 점, 문제를 바라보는 폭이 넓으면서도 무척 날카롭다는 점에서 이 책은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물론 이 책 또한 정치 세력이라는 난제 앞에서 가로막힌다. 이른바 보수 쪽이 현장 검증을 거쳐 크게 점수를 잃어버렸다면 이른바 진보 쪽도 뭔가 미덥다는 느낌은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대안보다 문제를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이 아닐까? 그 '문제' 의식에 공감하는 이들이 모여들어 해결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개인의 고민과 목소리가 중요한 시점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2012년, 마야인의 달력으로 보면 지구가 종말을 맞는다는 해에 우리는 정치적 대 격변을 겪게 될 것이다. 이른바 보수이건 이른바 진보이건 사활을 걸고 국민적 선택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할 것이다.

 

이른바 보수이건 이른바 진보이건 아마도 '차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선택을 하건 이제 우리는 조금 더 이념적이고 보다 더 체계적으로 정치에 접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주류 마인드는 '이념'과 '정치'는 나쁜 것임을 설파했지만 오히려 우리 사회는 이념과 정치에 보다 충실할 필요가 있다.

 

<창조적 세계화론>과 <불량사회와 그 적들>은 이른바 보수와 이른바 진보의 정치 이야기이자 이념 서적이다. 두 권 모두 쉽게 읽을 수는 없겠지만, 정치적 선택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라면 보다 합리적인 사회적 선택을 위해 꼭 읽어둘 필요가 있는 '양서'들이다. 집단적 흐름은 원인을 알 수 없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개인적 선택과 고민이 쥐도 새도 모르게 모여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두 권의 책이 우리 사회의 집단적 흐름을 바꿀 개인적 고민의 기폭제가 되길 바란다.


#조국#장하준#박세일#정치 논쟁#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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