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기념일을 맞아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해남 대흥사로 야유회를 갔다. 신록이 우거진 산책길을 따라 걸어 부처님이 누워계신 와불 형상의 두륜산 산 능선 아래 자리 잡은 대흥사 경내에 들어섰다. 서산대사가 입적을 앞두고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재난이 미치지 않고 오래도록 더렵혀지지 않을' 해남 대흥사에 보존하라고 했다는데, 그래서인지 왠지 신성한 땅에 들어서는 느낌이 든다.
일본으로 떠내려갔다가 돌아온 옥불이 있는 천불전(千佛展), 1000년 사랑나무 연리근(連理根)도 모두 나름 의미 있고 멋졌지만 추사 김정희의 편액 이야기가 가장 큰 깨달음을 주었다.
헌종5년(1839년) 9월, 전라도 강진을 출발하여 제주도 유배길에 오른 추사 김정희는 초의(草衣) 선사를 만나기 위해 잠시 해남 대흥사에 들렀다. 그리고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의 글씨를 보고 누구 썼냐고 묻는다.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라고 하자 촌스럽다며 당장 떼어 내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현판을 써 주며 대신 걸게 한다.
헌종14년(1848년) 12월 6일, 추사는 제주도 유배에서 해배된다. 8년 3개월 만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끝마치고 교분을 나누던 초의선사를 뵙기 위해 다시 대흥사에 들러 자신이 쓴 현판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그 편액 속에 담긴 자신의 교만과 독선을 깨닫는다. 그리고 추사는 스스로 명필 이광사의 글씨를 못 알아보았으니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걸고 자신이 쓴 편액을 내리라고 말한다. 추사 김정희는 8년여 간의 힘든 유배 기간 깊은 자아성찰을 통해 타인의 부족함도 포용하고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지혜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추사는 대웅전 우측의 백설당에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 글씨를 써 준다. 지금도 남아있는 추사의 편액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도 모두를 포용할 것 같은 자태로 대흥사 대웅전 곁을 지키고 있다.
최고의 명필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의 사찰 편액이 적지 않은데 죽기 3일 전에 썼다는 봉은사의 경판전(經板殿)에 걸린 '판전(版殿)'과 영천 은해사(銀海寺)에 걸린 '대웅전(大雄殿)' 편액만이 직접 쓴 것이고, 다른 사찰에 걸린 추사의 대웅전 편액은 모두 모각한 것이라고 한다.
어수룩하게 보이기 어렵다는 의미로 중국어에 '난더후투(難得糊塗)'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꼭 빼어난 재능을 휘두르며 뽐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나아감과 물러남을 알고 때와 장소에 맞게 자신의 처신을 올리고 내리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세상이니 말이다.
'물이 깊으면 파도는 고요하고 배움이 넓으면 언성은 나직하다(水深波浪靜, 學廣語聲低)'는 이치를 추사는 어쩌면 고단한 유배기간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나와는 다른 타인을 인정하고 품어 안는 그 깊은 성찰의 깨달음을 말이다.
대흥사를 내려오며 생각해 본다. 온 산을 물들이는 것은 화려한 꽃이 아니라 그 꽃을 받들며 피어나는 수많은 나뭇잎들의 푸르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