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대학생과 교수들의 반대 시위, 그리고 '사회복지국가로 남느냐, 신자유주의 국가로 전환하느냐'는 논쟁을 낳았던 말 많고 탈 많던 대학 등록금제가 폐지된다.
원래 독일 대학에선 전통적으로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공평한 교육의 기회를 준다는 사회복지국가 이념에 따라 무상교육이 실시됐다. 그러나 "대학의 국제 경쟁력 강화", "교육의 질 향상"을 내걸고 독일 대학 교육개혁이 시작됐고 그 결과 2007년부터 학기당 500유로를 내야 하는 대학 등록금제가 신설됐다.
이렇게 신설된 대학 등록금제가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함부르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에서 다시 폐지되어, 이제 이 지역에서는 부자건 가난한 대학생이건 등록금 걱정 없이 학업에 열중할 수 있게 된다.
신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독일 대학 등록금제가 다시 폐지된 계기는 독일 지방정권의 교체다. 독일 지역에서 최근 실시된 지방정부 선거 결과 진보적 성향의 정당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대학 등록금제 폐지를 결정한 것이다.
적녹 연정(사민당과 녹색당의 연합정부)가 집권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사민당이 집권한 함부르크 그리고 50년 집권당이던 보수 기민당을 무너뜨리고 유럽 최초로 녹색당이 제1당이 되어 구성한 녹적 연정(녹색당과 사민당의 연합정부)의 바덴뷔르템베르크 등, 보수 정당에서 진보 성향 정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지방정부들은 대학 등록금제를 폐지하기로 했다.
구 동독 지역은 아예 대학 등록금제를 실행하지도 않았고, 대학 등록금제가 실행됐던 구 서독 지역 중에서 헤센과 자를란트는 일찌감치 대학 등록금제를 철회했다. 이제 전 독일에서 대학 등록금 제도가 남은 주는 바이에른과 니더작센뿐이다.
엄마와 아들이 나란히 대학 등록금 반대 시위... "교육은 국가가 책임져야"이렇게 지방정부들이 대학 등록금제를 폐지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대학 등록금제를 강력히 반대한 학부모와 학생들의 의견이 자리 잡고 있다. 독일 대학의 등록금은 한 학기당 약 80만 원 정도. 한국의 대학 등록금에 비하면 시쳇말로 껌값이다. 그럼에도 대학 등록금제는 독일 사람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지난해 아비투어(독일의 대학 입학시험)를 끝낸 딸과 올해 아비투어를 보고 있는 아들을 두었다는 우테 프라이(45세, 여)씨는 "당장 올가을부터 2명이 대학생이 된다. 남편이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고 나 역시 아르바이트를 해서 평균 이상의 고정 수입이 있지만, 집 장만할 때 받은 대출금 상환과 생활비, 거기에 2명의 대학 등록금을 내기에는 무리"라고 말했다. 중산층으로 살지만 대학 등록금을 반대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또한 "교육과 같은 영역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세대 간의 계약이다. 수입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세금을 내고 그 세금으로 다음 세대를 책임져야 할 젊은 층이 맘껏 공부할 수 있어야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라고 교육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다.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 전문 기술 대학에 진학할 예정인 우테 프라이씨의 아들 파비앙 프라이씨는 "내 주변에 대학 등록금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한 친구들이 있다. 이들을 보면 등록금제가 사회적 불평등을 더 강화시키는 것 같다. 사실 가난한 가정의 친구들이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갖는 것 아닌가. 그 기회마저 등록금제로 박탈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이번 대학 등록금제 폐지가 주변 친구들이 다시 대학 진학을 고려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엄마와 아들이 나란히 대학 등록금 반대 시위에 참여했었다는 프라이씨는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녹색당을 찍은 이유 중 하나가 대학 등록금제 폐지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또 이런 자신들의 의견이 주 정부 선거에 반영되어 너무나 기쁘다며 "공짜로 대학을 다니겠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교육을 책임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따끔하게 반영시킨 것이 이번 선거라고 강조했다.
또 자신들은 그런 국가에 "필요한 만큼의 세금"을 충분히 낼 의사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주민들의 의견은 선거에 반영되어 진보 성향 정당의 집권과 지방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대졸자 중 고소득층 많다? 그러면 세금 더 내게 해 대학 지원해야""개혁이 시작되다"라는 이름으로 녹색당과 사민당이 체결한 바덴뷔르템베르크 연합정부 정책 계약서에는 "실행 가능한 빠른 시일인 2012년 여름학기부터" 지역 내 모든 대학의 등록금제를 폐기하도록 명시돼 있다.
녹색당이 선거혁명이라 불린 정권 교체를 이루자마자 대학 등록금제 폐지를 제일 먼저 실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등록금제 폐지와 관련해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 교육부 장관인 테레시아 바우어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 주정부 교육부 장관으로서 정권 교체 후 제일 먼저 추진한 것이 대학 등록금제 폐지다. 왜 대학 등록금제 폐기를 추진했나? 전 국민이 무상으로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가."등록금 부담 없이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정부의 중요한 정책이다. 학생 개인이 가난하건 부자건 혹은 부모가 부자건 가난하건 공부하고 싶어 하는 모든 학생은 재정적 부담 없이 자유의사로 학업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막는 모든 장애물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치인이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는 국가의 장래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빈부와 상관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주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해야 국가가 번성한다."
- 대학을 나오면 더 나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직업을 구할 수 있는 길이 독일에서도 어느 정도는 보장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대학 등록금도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라고 보고 개인이 분담해야 한다는 비판이 있는데?"물론 대학을 가려는 학생들 중에는 학문 자체에 대한 연구보다는 졸업 후 더 나은 보수와 안정된 직장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교육에 관한 국가의 의무를 방기할 수는 없다. 많은 대학 졸업자가 고소득층에 속한다면, 고소득자에 대한 높은 세금으로 사회적 불공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즉, 대학을 졸업한 고소득자에게 높은 세금을 내게 하고 그 세금으로 대학을 지원해서 후배들이 등록금 없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국가의 역할과 의무이다."
- 등록금제 폐지 반대론자들은 '무상으로 공부하면 학업기간이 늘어날 것이고, 평균적 학업기간의 연장은 곧 독일 대학의 국제 경쟁력 약화로 연결된다'고 비판한다."유럽연합 볼로냐 회의 결과로 진행 중인 유럽 대학 개혁(학사/석사제도 도입)으로 학업기간의 무기한 연장은 제도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 학업기간이 짧은 것이 전부가 아니다. 학생들에게 학업에 열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는 것, 이것이 훨씬 더 가치 있다.
또한 기민당의 교육부에서 용역을 주어 진행된 '대학시스템에 대한 연구(HIS)' 결과에 나타난 것처럼, 대학 등록금제는 학생들이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나서게 했고 오히려 학업기간이 연장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또한 대학 등록금제가 독일 사회 양극화를 부추기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도 연구 결과가 나왔다. 즉 2008년 아비투어를 본 학생 중 부모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고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는 경우 많은 수가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고 응답했다. 대학 등록금제 아래서는 가정환경과 재정 상태에 따라 학생들이 대학 진학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
- 전 집권당이던 기민당이 '독일 대학의 경쟁력 강화, 교육환경 개선'을 내걸고 추진했던 것이 대학 등록금제 신설이다. 대학 등록금제 폐지로 재정 적자가 예상된다. '독일 대학의 경쟁력 강화,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녹적 연합 정부의 재정 대책은 무엇인가? 당장 예상되는 대학 재정적자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녹적 연합정부는 등록금제 폐지로 인한 대학 재정적자를 주정부의 다른 재정에서 대체할 계획이다. 또한 대학 총학생회가 학생들의 의견을 모아, 대학 재정이 어떤 부분에 얼마만큼 편성되고 지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함께 결정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런 방식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대학 총장이나 위원회가 학생들에게 대학 재정 계획과 지출에 대해 의견을 묻거나 교환한 적이 없다. 이런 민주주의적 방식은 등록금 폐지 혹은 대학 재정과 관련된 갈등과 논쟁을 합법적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