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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동조합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솔직히 이제는 새삼스런 진단도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노동조합운동 안팎에서 그 같은 지적과 분석과 비판이 줄을 이어 왔습니다. 노동조합도 이를 극복하고 치유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쳐온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말 지금 노동조합은 음식을 삼키지도 못하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말기암 환자처럼 죽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2010년 7월부터 시행된 타임오프제와 함께 수많은 노동조합들이 전임자 임금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산별노조나 산별연맹의 경우가 더 심해서 재정악화와 함께 노동조합 활동의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든 자유인들의 결사체입니다. 때문에 당연히 노동조합 전임자는 회사가 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의 조합비로 조합 활동비를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국 노동조합은 아직도 여전히 기업별 노동조합입니다. 기업별 노동조합은 사실상 어용노조로 분류됩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의 최대 무기는 조합원수, 속된 말로 쪽수의 힘인데, 몇몇 대기업을 빼고는 기업별로 자본의 막강한 힘에 대항하는 이 쪽수의 힘을 발휘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기업별 노조는 결국 조합원들의 정체성을 회사 소속의 종업원이라는 정체성에 가두어 놓습니다. 때문에 기업별 노조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결사체로서의 노동조합이 아니라 회사에 예속된 종업원 노조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산별노조운동이 오랫동안 지속돼 왔지만 산별 노조라 할지라도 무늬만 산별일 뿐 같은 산업 노동자로서의 정체성보다는 한 회사의 종업원이라는 정체성이 훨씬 더 강한 게 현실입니다.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대폭발 시기에는 기업별 노조의 이런 성격이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단결의 힘에 눈을 뜬 노동자들이 민주노동조합을 통해 작업장 안에서 똘똘 뭉쳐 기업주에 대항하면 기업주는 대항할 뚜렷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987년 이후 매년 노동자들의 임금은 두자릿 수로 올랐고, 기업별 노조도 민주노동운동의 중심축으로서 세계 노동운동이 놀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자랑했습니다.

국가와 자본의 지배 종속 아래 방치한 한국 노동조합운동

그러나 1997년 국제통화기금의 지배를 계기로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에 전혀 대응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후퇴만을 거듭하다 급기야 지금과 같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노동유연성의 도입은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노동자층을 만들어 내면서 노동자들의 단결을 밑에서부터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국가와 자본의 전방위 노조 무력화 정책에 대항하는 노동조합운동의 전략이란 것이 1년 열두 달 늘 구태의연한 총파업 구호뿐이었습니다. 이는 중소 영세 자영업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과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들까지도 노동조합운동의 반대 세력으로 돌려놓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란 국가까지도 무장해제시키면서 일상생활에서부터 공공의 전 분야까지도 자본의 지배종속 아래 상품화하고 자본주의 시장에 개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특히 미국의 소수 거대 금융독점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겠다는 정책입니다.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결과적으로는 사실상 철저히 이같은 신자유주의를 도와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일부이지만 자본주의에 기생하는 기생충운동으로 변질되고 만 측면까지 있습니다. 세상에 삼성재벌과 북한에만 세습이 있는 줄 알았더니 조합원 자식에게 노동자 자리를 물려주기 위한 세습 단체협약이라니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들의 일상생활 영역을 아예 자본의 독무대로 방치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 자신이 재벌 브랜드 상품을 앞장서서 구입하는, 재벌기업 배불려주는 만만한 후원자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노동자 집에 들어가 보아도 가전제품에서부터 그 많고 많은 일상생활의 상품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노동자 1인 가족이 재벌 기업의 순이익에 기여한 액수는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일상생활을 자본의 지배 종속에서 탈환하는 운동: 협동조합운동

자본이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철저히 지배 종속시키려 하면 당연히 노동자들은 이를 탈환해 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탈환 운동이 다름아닌 협동조합 운동입니다. 협동조합운동은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노동자 일상생활의 협동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협동조합운동의 효시인 1844년의 로치데일 공평개척자조합도 영국의 해고자노동자들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국가권력과 자본이 공공의 영역을 자본의 지배종속 아래 팔아먹으려 한다면 당연히 노동운동은 이를 탈환해 와야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를 통해 행정권력의 일부를,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입법권력의 일부를 노동자 친화의 권력으로 탈환해 온다고 해서 국가권력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민주정부 10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노동정치는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밑에서부터 바꾸어나가는, 지역으로부터의 풀뿌리 정치운동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협동조합운동을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내부의 개량주의 운동, 또는 한가한 중산층의 운동 정도로 폄하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고도 무식하기 짝이 없는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산별 노조에는 재정사업단이 있어 이 난관을 헤쳐나가려 합니다. 재정사업단이 맨 먼저 생각하는 사업은 조합원들의 공동구매입니다. 보험에서부터 등산복이나 명절 선물 등등 조합원들이 공동구매를 할 수 있는 물품은 생각해보면 정말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공동구매는 반드시 탈이 난다는 것은 그간의 수많은 공동구매 역사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런 공동구매는 결국 조합이 중간 수수료를 챙기는 것이기 때문에 수수료율과 기타 관리상 반드시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의식주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의 직거래 공동구매를 1년 열두달 단결과 연대의 힘으로 관철시키는 것이 다름아닌 소비자 협동조합입니다. 그것도 단순한 직거래 쇼핑몰이 아니라 조합원들 간의 인간관계를 밑에서부터 바꾸어 나가는 민주주의 학교로서의 협동조합입니다.

한국 노동운동의 오래된 고향, 원산노련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929년 원산총파업은 식민지 시대 최대의 파업으로서 오늘날까지도 한국 노동조합운동에 무엇인가를 강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오래된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산노동연합회에는 원산에 있는 거의 모든 직종의 노동자 2천 2백명의 조합원이 있었습니다.

이 원산노련의 조직력이 막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고 그렇게 장기간 파업을 지속했는데도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다름아닌 원산노련에는 오늘날 한국 노동조합에는 거의 없는 소비조합과 구제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구한 설명을 하기보다 당시 기사를 잠깐 소개해보겠습니다.

소비조합과 병원 등 경영

그러나 이것(전위군 양성을 위한 청년부 설치, 강습회 순회강연 신문잡지 편찬 강독 등 계급적 훈련: 글쓴이 주)보다도 가장 괄목할 사업은 소비조합의 경영과 로동병원, 리발소, 구제부의 직영이다. 소비조합은 재작년에 처음 창설한 것으로 조합원들이 가입 당초에 매 한 명이 이십원식을(10회 분불分拂) 출자한 것인데, 처음에 이 모든 출자금과 모 은행에서 원산 유력자 실팔명의 련대로 빌어내 온 돈 팔천원을 긔본 삼아서 사업을 시작한 것인 바 그 속에는 곡물부와 잡화부의 두 부가 잇어서 조합원들의 생활에 필요한 잡화와 미곡만 시보다 약 이할 내지 사할의 헐한 갑으로 공급하고 잇다는데, 한 달에 그 취인액이 아모리 적어도 일만이천여 원의 거액에 달한다 한다. 물품을 사는 데는 조합에서 미리 그 조합원의 수입과 가족상태를 잘 됴사하여 뎡도를 뎡하여 노흔 표준에 의하야 그 생활에 알맛게 미곡권과 잡화권을 주어 사도록 한다는데, 아무럿튼 원산리에 잇는 됴합창고와 사무소 문전에는 항상 물품 사러 오는 조합원과 그 가족들로 문전성시하고 잇스며 더욱 현재 소비조합의 운뎐자금은 약 삼사만 원의 거액에 달한다 한다.

환자 연인원 1년에 2만

로동병원에는 수년 전 지함북 사회운동의 열렬한 투사로 잇든 경성의뎐 출신 차철순 씨가 원장으로 잇는 이외에 의사 한 명과 산파 한 명과 약제사 두 명과 간호부 네 명과 입원병실 십여 개를 가진 당당한 긔관으로 련합회원에게는 약가를 전부 사할 인하여 준다 하며, 환자도 매일 륙칠십 명식 모여든다 하니 실로 일년의 연인원 총수가 이만 일천여 명에 달하는 터이며, 입원병실도 사시부절으로 만원이 되어 잇다한즉 그 성황을 알 것이며, 그밧게 잇는 리발소는 회원에게 한 번에 십오전식 밧고 머리를 거주는 것으로 이천여 명 회원과 그 가족들 지 전부 거주는 관계로 항상 '바리겡' 소리가 칠 사이 업다고 한다. - 김동환, 원산노동연합회진용종횡기(2), 조선일보, 1929. 2. 13.

규율정연한 구제부 사업

구제부라 함은 련합회의 세포단톄인 각 로동조합마다 그 안에 잇는 것이니, 조합원으로 화촉동방의 가약을 매즐 에는 그 결혼비용의 전부를 지출하여 주는 이외에 국수도 조합원이 가서 눌러주고 '우이'(신랑을 데리고 가는 사람: 글쓴이 주)나 '권마성'(가마 멘 사람들이 발을 맞추기 위해 부르는 노래소리: 글쓴이 주)도 조합원이 가서 해 줄더러 심지어 신랑신부가 덥고 자는 이부자리지 미어 준다 하며, 장례할 에도 모든 조합원들이 상도이 되어 상여를 메어다 주고 북망산천에 뭇친 뒤에도 년년세세 단오나 가위가튼 큰 명절이 올 마다 애나게 눈물을 흘려가며 분초도 하여 주고 제사도 지내어 준다 하며, 병이 나면 약갑을 대어 주고 누구에게 어더마지면 함 몰려가 설치하여 주어 가튼 로동자란 의식이 실로 한배를 갈르고 나온 친형뎨보다도 더하게 서로서로 도아주고 위로하여 주며 지낸다 한다. - 김동환, 원산노동연합회진용종횡기(3), 조선일보, 1929. 2. 14 

한마디로 오늘날 한국 노동조합운동이 살 길은 지역공동체운동과 협동조합운동입니다.

오는 6월 3일(금) 2시부터 한살림 교육장에서 녹색평론사, 모심과살림연구소,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새사연, 한국협동조합연구소,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준), 부산노동자생협, 혁신네트워크,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의 주최로 <노동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이란 주제의 토론회 겸 간담회가 열립니다. 미흡하나마 여기서 노동조합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이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첫걸음이 떼어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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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민주주의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민주적 대안언론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역사와 노동과 생태 문제에 관심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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