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진과 구애정이 사는 세계는 보통사람들이 사는 그것과는 다르다. 보통사람들이 사는 보통 세상에선 입사초기 동료와 다툰 일로, 사내연애 한 번 한 것 정도로 직장에서 10년 가까이 미운털이 박히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구애정은 그룹 멤버의 뺨을 한 번 때린 일로, 약혼녀 있는 연예인과 사랑에 빠진 일로 한순간에 톱스타에서 국민 비호감 연예인으로 전락해 10년을 허덕인다.
MBC 수목드라마 <최고의 사랑>(오후 10시 방송)의 배경은 바로 이 이상한 세계, 즉 연예계다. 로맨틱 코미디물에는 일가견이 있는 홍정은, 홍미란 작가가 쓰는 이 세계는 사실 그리 신선하거나 새롭지 않다. 이미 <온에어>나 <스타의 연인> 등을 통해 우리는 연예계의 화려함과 그 뒤에 감춰진 어두운 이면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것들이 극에 어떤 장치로 활용되는지도 빠삭하다.
그러나 홍자매는 시청자들이 "연예계? 그 얘기는 좀 식상하잖아"라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 그 입을 틀어막는다. 마치 "글쎄 일단 한 번 보고 그런 말을 하시라니까요?"라고 말하는 듯,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물과 다른 궤를 그려나가고 있다. 그래서 <최고의 사랑>은 빤하면서도 빤하지 않은 드라마가 됐다.
스폰서로 오해한 남자 앞에서 자신을 100억을 줘도 살 수 없는 국보급 연예인이라고 말하는 구애정(공효진 분)은 사실 국민 비호감 연예인이다. 먹고 살기 위해 예능프로에 나가 롤러코스터에서 자장면을 먹어야 하고, 데뷔 10년째 되는 날 지방 나이트클럽 행사도 마다않는다. 인터넷엔 그녀를 향한 온갖 비난의 악플이 즐비하고, 가족들도 주변에 그녀가 자신의 가족임을 알리길 주저한다.
'사방이 적 투성이'인 <최고의 사랑> 여주인공
로맨틱 코미디물의 여주인공은 기본적으로 싱그러운 미모와 밝은 성격으로 주변인들에게 사랑받는 존재다. 그래서 어떤 역경과 고난이 몰아쳐도 주변에는 항상 그녀를 돕고자 하는 구원의 손길이 존재하고, 악녀는 "왜 모두들 내가 아닌 그 애를 좋아하는 거야?"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대사를 독기 어린 표정으로 내뱉으며 좌절하다가, 또 금세 기운을 차려 그녀를 더 큰 곤경에 빠트릴 준비를 한다.
그러나 <최고의 사랑>의 구애정은 그녀의 가족과 몇몇 주연인물을 제외하면 사방이 적이다. 윤필주(윤계상 분)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그녀와 방송에서 커플로 맺어지는 것에 질색하고, 부하직원의 결혼식 축가를 그녀에게 부탁하려 했다는 이유로 필주는 부하직원의 뒷담화 대상이 된다. 방송국 PD와 작가는 첫 회에 탈락할 일회성 화제몰이 진상 캐릭터로 그녀를 섭외한다.
그래서 구애정을 곤경에 빠트리고 그녀의 사랑을 시험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이뤄진다. 강세리(유인나 분)가 기자에게 툭 던진 한마디로 그녀는 순식간에 전 국민 앞에서 해명하지 못하면 매장당할 수도 있을 만큼의 위기에 처하고, 소속사 사장은 돈 봉투 대신 음반계약서를 그녀 앞에 내민다.
이런 상황이 가능한 건 애정이 사는 세상이 연예계이기 때문이다. 운동화 한 켤레에 한 사람이 바닥을 칠 수 있는 세계, 필주의 말마따나 연예계는 보통 세상에 사는 보통사람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앞뒤가 안 맞는 세상"이다. 그래서 그 속에서 살려고 버둥대는 애정과 톱스타의 위치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독고진(차승원 분)의 러브스토리는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물의 판타지를 여지없이 부숴버린다.
자신이 애정을 사랑한다는 것을 자각한 뒤 독고진은 그녀에게 "수치스럽다"고 말한다. 한예슬, 신민아처럼 톱스타도 아닌 구질구질한 구애정이 37년 만에 찾아온 첫사랑이라는 사실에 그는 괴롭고, 수치스럽다.
사랑 앞에 비겁했던 '나'를 떠올리게 하는 독고진-구애정
애정은 애정대로 독고진의 사랑이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연예계에서 10년 동안 수차례 데이면서 배운 쓰라린 경험들은 그녀에게 독고진과의 사랑이 위험하다고 경고를 보내고 있다. 든든한 소속사와 계약하고, 인기 예능프로의 고정 게스트 자리도 꿰찼다. 다신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재기의 순간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녀에게 그 모든 걸 다시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는 독고진과의 스캔들은 끔찍한 일이다.
로맨틱 코미디물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사랑에 솔직하지 못하다. 초반에는 사랑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자존심 때문에, 후반에 들어서는 자신보다 상대방을 생각하는 지극히 자기희생적인 마인드 때문에 그들은 거짓말하고 서로에게 상처 준다.
그러나 독고진과 구애정의 사랑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독고진은 톱스타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구애정은 지금보다 더 밑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사랑을 애써 부정하고,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파리의 연인>의 박신양은 "저 남자가 내 남자라고 왜 말을 못 해?"라며 김정은을 몰아붙였지만, 독고진은 "그 사람들 앞에서, 너 좋아서 운동화 샀다고 할 줄 알았어?"라고 말한다.
음반계약서를 눈앞에 둔 애정 역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계약서에 사인한다. 독고진의 마음과 현실적인 욕망 앞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나는 이런 기회를 놓칠 처지가 못 된다"며 결국 후자를 택했고, 소속사 사장으로부터 "현실감 있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옥탑방에서 가난하게 살아도 자존심만은 하늘을 뚫을 것 같았던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물의 여주인공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판타지로 가득한 연예계에서 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깨진 순간, <최고의 사랑>은 그 어떤 드라마도 갖지 못한 현실성을 갖게 됐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것이 브라운관 너머의, 그것도 연예인의 사랑이란 것을 알면서도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끼고 공감하게 된다.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사랑에 비겁하고 좌절해야 했던 아픈 경험들이 애정과 독고진에게 감정이입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어쩌면 <최고의 사랑> 속의 연예계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앞뒤가 맞지 않는 세상"일지 모른다. 독고진과 구애정이 인기에 따라 '급'이 나뉘고 급 때문에 사랑에 어려움을 겪듯, 우리는 돈에 따라 급이 나뉘고 돈 때문에 사랑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뜻의 '삼포세대'란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세상을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 우리들에게 <최고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독고진이 사랑에 눈뜨고, 구애정이 사랑을 인정하는 모습을 심박측정기와 뽀로로 거짓말탐지기 등의 장치를 통해 코믹하게 그리면서도 그들의 세밀한 감정선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담아내면서 드라마는 아프고 상처 입은 그들을 위로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건 결국 사랑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즐겁고, 아프며, 설렌다. 독고진이 구애정을 사랑하게 됐을 때 즐거웠고, 구애정이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그의 사랑을 뿌리쳤을 때 아팠으며, 두 사람이 서로의 감정에 솔직해지기 시작했을 때 설렜다. 캐릭터에 공감하며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만드는 건 보통내공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홍자매의 로맨틱 코미디물은 어느새 이 정도 경지에 올라섰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