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제목에 '무대에 서니'라는 표현을 하고 보니 좀 거창한 느낌이 듭니다. 내가 연예인 흉내라도 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소박하고 평범한 일로 무대에 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난 4일(토) 오후의 일입니다.
'제3회 천주교 대전교구 서산지구 다 함께 성가 부르기' 행사에 태안성당 성가대의 일원으로 참가한 거지요. 서산지구 8개 본당 중 6개 본당과 1개 중학교가 참가한 일종의 '경연대회'였습니다. '서산지구 평신도협의회'에서 주최한 행사인데, 참가자들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기 위해 '경연대회'라 하지 않고 '다 함께 부르기'로 이름 지은 그 세심한 배려에 고마운 마음도 컸습니다.
서산 대산성당, 동문동성당, 대철중학교, 석림동성당, 예천동성당, 운산성당, 태안성당이 참가했는데, 제비를 뽑아 순번을 정하지 않고 '가나다순'으로 무대에 오르도록 한 것도 적절한 일로 생각됩니다. 서산 동문동성당의 중창단 '에파타'가 첫 무대를 장식했고, 중간에는 석림동성당의 '만돌린앙상블'이 첫 선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40대 시절인 1995년 태안성당 성가대에 참여했습니다. 처음 참여할 때부터 70살까지 성가대 봉사활동을 하기로 작심을 했고 그것을 공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로부터 어느 새 16년이 흘렀고, 나는 60대 초중반의 세월로 접어들었습니다.
매주 금요일(저녁)은 연습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해마다 '주님부활대축일'과 '주님성탄대축일'을 앞두고는 한 달 여 전부터 한 주에 삼사일씩 집중적으로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한해 두해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16년이 흐른 거지요.
태안성당 성가대에 참여한 덕에 무대에 서는 경험도 두어 번 갖게 되었습니다. 1999년 가을 대전교구 성가경연대회가 대전 엑스포공원의 엑스포 홀에서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태안성당 성가대는 서산지구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서산지구 대표로 교구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태안성당 성가대의 베이스 조장인 나는 그때 난생 처음 노래하는 무대에 서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5년 후인 2004년 가을에는 태안문예회관 대 공연장 무대에도 서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보다 다소 늦게 성가대에 참여한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04년은 태안성당이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후 4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본당 설정 40주년을 맞아 그해 11월 14일 저녁 태안문예회관 대강당에서 '경축의 밤' 행사를 가졌습니다. 주교님을 모신 가운데 태안지역 으뜸 개신교회인 태안장로교회 찬양대와 으뜸 사찰인 공덕사의 찬불대를 초청하여 아름다운 종교화합의 무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후 포털에서 내 글을 검색하다가 <종교화합의 멋진 자리>라는 글이 들어가 있는 한 블로그를 발견했는데, 개신교 신자인 그 블로그의 주인은 개신교 찬양대가 천주교 성가대, 불교 찬불대와 함께 무대에 오른 것을 '있을 수 없는 작태'라고 맹비난하며 개탄을 하더군요. 그것을 보면서 세상에는 참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로부터 또 7년 세월이 흐른 오늘 나는 세 번째로 노래하는 무대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시낭송을 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적은 여러 번입니다. 지역의 문화제 행사는 물론이고, 서울과 대전, 공주, 대천 등지의 규모 있고 격조 있는 행사장에서 무대에 올라 시낭송을 한 경험을 모두 합하면 열 번이 넘을 겁니다. 최근에는 여의도 '거리미사' 장소와 문정현 신부님의 서각작품 전시회장에서 시낭송을 하기도 했고….
'천주교 대전교구 서산지구 다 함께 성가 부르기'가 올해로 3회를 맞았는데, 재작년과 작년의 1회와 2회 때는 우리 부부 모두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재작년 6월 모친이 서울 성모병원에서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이후 우리 부부는 노친의 병구완 쪽으로 전력투구를 하느라 성가대 활동을 접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이 쉬워 식이요법이고 대체의학이지, 그것은 가족들의 노고와 정성의 집합이었습니다. 아무튼 우리 부부의 노고와 정성으로 노친은 폐암을 극복했고, 또 암세포가 골반으로 전이되고 확장되면서 암세포 부위가 골절되어 도저히 가망 없는 상태로 8개월 동안 병상생활을 한 끝에 기적적으로 완치되어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친이 지난해 7월 퇴원하여 집에서 생활하시게 되고 또 나날이 상태가 좋아지셔서 우리 부부는 올해부터 다시 성가대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덕에 올해 제3회 서산지구 성가경연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우리 부부의 성가대 복귀와 제3회 서산지구 성가경연대회 참가를 축복하기라도 하듯 대학생 딸아이도 한몫을 했습니다. 올해 2학기(마지막 학기) 복학을 앞두고 현재 대학 4학년 휴학 중인 딸아이가 집에 와 있는 동안 성당의 주일미사와 평일미사에 오르간 반주 봉사를 하더니 이번 성가경연대회에 태안성당 성가대의 피아노 반주를 맡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행사에 우리 가족이 셋이나 참가를 한 거지요.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일은 아무래도 어렵습니다. 나야 독창경험은 없고 합창경험 뿐이지만, 합창은 화음이 생명이기 때문에 더욱 긴장이 되고, 중압감도 더 클 것 같습니다. 또 환갑이 훌렁 넘은 나이에 합창단에 끼어 노래를 부른다는 건 어색한 일이 아닐지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그런 불안감 속에서도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십 수 년 동안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보니 어느 정도 다른 파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베이스음을 낼 수 있게 되었는데, 지휘자도 열심히 보면서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며 일순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환갑이 훌렁 넘은 나이에도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시는 하느님께 내 애초의 작심 대로 70살까지 무난히 성가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빌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처음 성가대에 참여했던 40대 시절을 추억하며 청장년층이 좀 더 많이 성가대에 참여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성가는 보통 기도보다 몇 배로 간절함을 지닌다'고 했으니, 노래로 간절함을 표현하는 젊은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뜨겁게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결국은 노년 세월에도 간절함을 안고 간절하게 기도하며 살고 싶은 마음을 뜨겁게 되새기는 복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