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본부농성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는 1인입니다. 오늘로 점거농성은 열하루째를 맞이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많은 학우들과 함께 '서울대 법인화 설립준비위원회' 해체를 당면목표로 놀이와 투쟁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내고 있습니다.
총장실 복도에 마련된 '본부 제4열람실'은 중앙도서관 열람실보다 공부하기에 좋다고 입소문이 퍼진 모양입니다. 기말고사 준비를 하는 학우들에게 눈치가 보여서 걸어다닐 때조차 깨금발을 짚어야 할 정도입니다. 덕분에 어디 놀아볼 자리가 없나 하고 4층에 올라왔던 몇몇 이들이 슬그머니 발걸음을 돌리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본부에는 이처럼 향학열을 불태우는 학우들도 많지만, 본부 점거를 계기로 숨겨왔던 끼와 재능을 분출시키는 분들도 있습니다. 본부 곳곳에 붙어 있는 자보와 그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오마이뉴스>에도 이 사태와 관련한 학우들의 글이 속속 올라온 바 있습니다.
그리고 어젯밤(8일) 이러한 포텐셜의 결정체라고 불러도 좋을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지난 몇 달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태원 프리덤>을 뛰어넘는 <총장실 프리덤>이 '올로케'로 촬영과 후반작업 성공적으로 마치고 인터넷에 공개되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의 촬영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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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장실 프리덤 국립파 땐-쓰구락부 SNUV가 새롭게 선보이는 <총장실 프리덤(Feat. 오연★ O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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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준, 김정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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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잉여짓'이라고 비하하시거나, 혹은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싸움의 '경박함'을 지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잉여'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습니다. 맑스가 '투하된 자본가치의 초과분'을 '잉여가치'라고 부르고, 노동자로부터 착취된 잉여가치가 생산수단의 소유자에게 부를 가져다주었다고 보았던 것처럼 저는 이러한 우리들의 '잉여력'이야말로 대학이 부과하는 '학업노동'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게끔 하는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라는 양식을 통해 이러한 에너지가 발산될 때,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낼 때 그것은 분명히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법인화하면 서양사학과부터 없앨까요?오늘 아침 우리 대학 서양사학과 박지향 교수님께서 '서울대 법인화에 반대하는 세력'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셨습니다. 글의 요지는 법인화가 "자율성을 획득하여 더 효율적인 운영과 더 수월성 높은 교육을 제공하여 세계 일류대학으로 도약하고 더불어 국가 전체의 역량을 높이는 데에" 그 목적이 있으며, "대학 운영은 '저비용 고효율'로 개선될 것"이고 "학생들에게는 더욱 질 높은 교육이 제공"되는 등 여러 가지 장점이 있으므로 마땅히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법인화에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평등지상주의자들"이며, "그들은 서울대가 더 경쟁적이 되고 더 우수한 대학이 되려는 노력 자체를 못마땅해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글을 읽고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의문은 대학이라는 공간의 '자율성'에 관한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는 법인화가 우리 대학의 자율성을 확보함으로써 운영상의 이점을 기대할 수 있으며 이는 대학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법인화를 추진하려는 측에서는 '대학의 발전'을, 그것도 세계적인 수준으로의 발전이라는 거시적인 목표의 적절한 수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수준의 대학으로 발전하려는 노력은 법인화 이전에도 학교 차원에서 진행되었고 그에 필요한 국립대학이라는 틀 안에서의 자율성 강화도 계속해서 추진되어 왔습니다. 과거에 추진되어왔던 '자율성 확보'와 법인화가 되었을 경우의 '자율성 확보'를 '대학 개혁'이라는 연장선상에서 놓고 본다면 이러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대학기구의 자율성이 학내 구성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가?'제가 생각하기에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오"입니다. 물론 법인화가 되면 우리 대학이 국가에 종속되어 있었던 위치에서 '법인'이라고 하는, 법적으로 '자연인'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점에서 재정 확보도 수월해지고 운영의 효율성도 도모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국립대학이라는 틀 내에서 꾸준히 진행되어왔던 지난 10여년 간, 교수님들은 제가 잘 알지 못하니 함부로 말할 수 없겠습니다만, 학생 입장에서는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율'의 정도가 점차적으로 줄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저는 권리로서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인의 권리이자 의무인 '학문적 자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학문이라는 거대한 지적 전통 속에서, 혹은 그것과 세상을 매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위치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 자율적으로 문제의식을 키워나가고 배울 수 있었는가 생각해본다면, 이른바 '대학발전'과 '대학기구의 자율성 강화'는 학내 구성원인 학생들의 '학문적 자율'을 약화시켰을 뿐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학사관리 엄정화를 명분으로 한 상대평가 실시, 대학영어 수강 의무화, 계열별 광역화 실시를 통한 경쟁 분위기 조성, 2008학년도 입학생부터 복수전공·심화전공 의무화 따위가 개혁을 위시하여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취업난과 기업의 입김이 학내에서도 더욱 거세어지면서 학생들은 대학 공간에서 자율적으로 책 읽고 토론하고 쓰기보다는 학점 신경 쓰느라 주어진 과제와 시험에만 충실할 뿐, 자기 삶을 자치적으로 꾸려가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수동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대학을 다니는 동안만큼은 지식인이 되어 고민해야 할 나와 세상에 대한 문제 의식 같은 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걸 교육이라고, 혹은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퇴출 1순위는 누구?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고 싶습니다. 예컨대 이런 상황에 대해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양사를 전공하는 학부생들이 '서양사'라는 전공학문을 다국적기업에 취직하기 위한 방편이나 수단으로 삼는다면, 어학성적과 학점에만 신경쓰느라 학문 본연의 가치를 잊어버린다면 교수님은 행복하시겠습니까?
교수님께서 글에 쓰신 대로 '세계인들과 경쟁해서도 성공할 수 있는 인재들'만 많이 배출된다면 그만입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교수님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서양사학과를 없애고 그 정원을 경영학과에 배정하는 것이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인 것 같네요. 왜냐하면 역사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미 '한물 간'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고, 학문의 속성상 경쟁이 아닌 치열하고 엄격한 자기 연마와 자기 평가에 의해 그 깊이가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적으로 더 많은 논문을 쓰고 연구자가 학술대회에 많이 참석해야 하는, 그래서 대학 순위를 올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해서는 일가를 이룰 수 없는 것이 사학 아니었습니까. 한마디로 서양사학이란 열심히 하면 할수록 경쟁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구도의 길과도 같은 것인데 대학 발전을 위해 그걸 어찌 둘 수 있겠습니까. 아, 법인화가 그 구도의 길에 약간은 보탬이 될 수도 있긴 하겠네요. 교수님 연봉이 적잖이 오를 테니까요.
또 교수님은 기고하신 글에 본부 점거농성을 진행중인 학생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한 적은 있지만 행정관 전체를 점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학생들은 법인화가 되면 등록금이 오를 것을 우려하고 추진 과정에서 자신들이 소외되었다고 생각한다. 명분이 무엇이든 학생들의 행정관 점거는 올바른 행동이 아니다. 민주화 시대의 학생들이 반(反)독재 투쟁 시절의 유산을 답습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저는 교수님께서 쓰신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학문의 발전이 아닌 대학 발전을 위해서 법인화 추진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신 것에 이어 다시 한번 제 무덤을 파고 계신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릴 것이 아니라, 교수님도 익히 들어 알고 계실,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의 한 '스랍퍼'의 목소리를 빌려 대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민주화 시대의 대학 총장이 독재정권의 유산을 답습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스누라이프 '노을비'님)세계화라는 대세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는 시대에 뒤처지는 태도, 상식에 어긋나는 발상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가 된 상황에서, 학내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대학 재정의 엄청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학생들의 의견이 철저하게 무시되는 이 상황을 옹호하는 것은 철저한 구시대적 발상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퇴출 대상입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교수님께서는 "사실 법인화가 되면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을 사람은 누구보다 교수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법인화가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건 교수님 같은 분들을 교수로 모셔야 하는 저희 학생들입니다. 저희도 좀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기말 시험 때문에 머리도 복잡한데 자꾸 더 복잡하게 하시면 저 좀 힘드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교수님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교수님께서 아침논단에 기고하신 글은 읽기에 매우 심란한 글이었지만, 오히려 제 생각은 교수님의 글을 통해 더욱 명확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수조차 법인화가 상정하고 있는 대학의 미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며, 그런 점에서 지금 추진되고 있는 법인화 설립 과정에 대해 진지하게 재검토하고 학생들의 의견에 귀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교수님을 비롯해 법인화에 대해 오해하고 계신 분들의 생각도 다시 한 번 공론의 장을 거쳐 점검되어야 하겠지요.
돌이켜보면 점거 농성을 시작한 열흘 동안, 대학에서 2년 넘게 다니며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내 행동의 윤리 기준을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지, 여러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민주주의라는 가치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억압적 권위라는 것이 허망하고 우습기까지 한 것임을 말입니다.
우리는 경륜을 언급한 총장님을 경륜왕으로 만들어드리는 재치를 발휘하고, 적어도 학내 자치와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교수의 권위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목소리를 효과적인 수단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통렬하게, 또 명확하게 우리의 논리를 다듬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찾아올 수 있을지 저는 회의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다시 한 번 총장님을 비롯, 법인화 추진에 열을 올리고 계신 대학 측 관계자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 덕분에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소개 : 서울대 사범대학 3학년생입니다. 현재 기말고사와 본부 점거 투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3일에 "서울대 본부 점거... 느긋하게 즐기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쓴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