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는 심장이 쿵쿵거려 정신을 못 차리겠어. 일도 손에 안 잡히고 그 좋던 책도 눈에 안 들어와. 이유 없이 방 안을 서성이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해. 수학여행 앞둔 학창시절과는 비교가 안 돼. 짝사랑하는 소녀를 만나러 가는 소년의 심정이라고 할까. 여하튼 가슴설레 죽겠어. 떠나기 전에는 매번 이래. 헤헤."더러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있음 직한 이를 만날 때가 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작은 역사가 되고 호탕한 웃음이 어떤 신앙보다 거룩한 사람, 동시대를 사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지는 그런 사람 말이다. 우리 국토 10바퀴를 두 발로 걸은 남상범 선생이 꼭 그런 사람이다.
선생은 2005년부터 지난해 2010년까지 동해~남해~서해~전방의 철책선 등 국토 맨 외곽 2만5000km를 바느질하듯 걸은 분이다. 잠시 숨죽였던 방랑끼가 도진 걸까, 그가 다시 묵직한 배낭을 꾸렸다. 지난해 국토 10바퀴 대장정을 마친 지 꼭 8개월 만이다. 이번에는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길이 아닌 고봉준령을 넘나드는 동쪽 내륙으로 길을 잡았다. 이번 여정은 이달 12일부터 다음 달 초까지 한 달 일정이다.
걷기의 전설 대한민국 10바퀴를 걷다남상범 선생의 올해 나이는 79세다. 하지만 당최 세월이 비껴갔는지 팔순을 내다보는 그의 체력은 30대 청년보다 강건하고 다부지다. 웬만한 장정의 허벅지만큼 굵고 단단한 다리통, 반점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 그리고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쩌렁쩌렁한 목소리. 불가사의한 체력과 불도저 같은 정신력 그리고 우리 땅, 우리 민족과 가식 없이 얼굴을 맞대고 싶은 소박한 바람을 밑천으로 그는 누구도 엄두 내지 못한 국토 10바퀴 순례에 과감히 도전했고 만 5년 만에 무사히 마쳤다.
2005년 11월 5일부터 2010년 10월 9일까지 짧으면 3개월, 길면 10개월씩 홀로 국토 10바퀴를 마름질 따듯 밟았다. 실제 두 발로 땅을 디딘 시간은 1015일. 거리로 환산하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2만5000km가 넘는다. 매일 30~40km 꼴로 걸었다. 잠도 잊은 채 80km를 꼬박 하루 동안 걸은 적도 있다. "지구 한 바퀴에 달하는 4만km는 족히 걸었을 것"으로 선생은 짐작한다.
발길은 육지뿐 아니라 외진 섬도 파고들었다. 흑산도, 비금도, 압해도 등 서해와 남해에 점점이 흩어진 섬으로 기름내 짙게 밴 철선을 타고 들어가 실타래 같은 해안선을 훑었다. 거미줄 같은 그의 족적은 길을 나설 때마다 준비한 대형지도에 붉은 사인펜으로 촘촘히 그어져 있다.
기실 그의 걷기는 융통성이라곤 없다. 차량이나 기타의 교통수단을 절대 이용하지 않는다. 20kg에 달하는 배낭에 한 손에는 스틱을 쥔 채 두툼한 등산화에만 의지한다. 잘 닦인 국도나 반듯한 산책로도 사절한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 땅. 서해-남해-동해안 코스는 반드시 갯마을과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선을 밟고 또 밟았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그의 걷기 원칙. 그 덕에 가슴 철렁했던 순간도 수없이 맞닥뜨렸다. 2006년 3바퀴째에는 전남 영광의 갯벌을 건너다 뻘밭에 빠져 가슴까지 빨려든 적도 있다. 마을 주민들은 "그곳에서 빠져나온 게 기적"이라고 했다. 지난해 10바퀴째에는 바닷가 기암괴석을 넋 놓고 구경하다 밀물에 갇혀 순식간에 길이 지워졌다.
황급히 눈앞에 놓인 수 십 미터 해벽을 맨손으로 기어올랐다. 선연한 그때의 기억을 되뇌면 지금도 모골이 쭈뼛 선다. 그런가 하면 손발이 얼어붙는 혹한의 강원도 오지에서 음식과 잠자리를 못 구해 밤새 발을 동동거린 적도 부지기수다. 온갖 벌레에 쏘이고 독초에 찔려 두 다리는 고질적인 피부병을 앓고 있다. 걷기가 낭만이 아니라 구도를 좇는 고행승의 수행길을 연상시킨다.
국내를 넘어 인류 역사상 선생만큼 멀고 험한 도보여행을 감행한 이가 또 있었을까. 선생은 지난해 10바퀴 순례를 마친 뒤 한국기록원을 통해 기네스북 등재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그의 걷기가 역사가 되는 대목이다.
이번에는 내륙 도보에 도전지난해 국토 10바퀴 대장정을 마친 선생은 한탄강이 내려다 보이는 경기도 연천군의 작은 시골 아파트에서 지친 심신을 달랬다. 8개월의 휴식 기간, 틈틈이 기록한 여행기를 정리하며 여행서적을 집필하던 중, 돌연 등산화끈을 다시 바짝 죄었다. 이번에는 우리 땅 내륙 도보에 도전한다.
12일부터 시작된 여정은 연천군의 한탄강을 출발해 경기도 포천-청평-여주를 지나 강원도 횡성-평창-영월과 경북의 봉화-안동-의성-영천을 거친 뒤 동해와 남해가 맞물리는 부산까지 내려올 예정이다. 부산에서 숨을 고른 뒤 다시 동해를 거슬러 한탄강까지 되돌아가는 국토 종단 루트다.
바닷길보다는 짧지만 그래도 만만찮은 여정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고저가 심한 준령을 쉼 없이 넘어야 한다. 게다가 초행길. 길이 얼마나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솔직히 알 길이 없다. 잠자리 문제부터 곧 닥칠 장마도 내심 고민이다. 하지만 앞날을 예측할 수 없기에 여정은 각본 없는 드라마가 되고 모험이 되며 자유를 호흡하는 나그네가 된다.
"내륙은 처음이야. 하지만 세상사를 풍류하고 민족 내면을 속속히 꿰뚫으며 걷기에 괜찮은 코스로 보여. 내년에 총선, 대선 같은 국가적 이벤트도 있잖아. 경상도 사람들의 속내도 들여다볼 겸 길을 정했어."고달픈 여행임에도 끊임없이 그를 길바닥으로 내모는 원동력은 바로 불멸의 자연. 그간 눈 시린 쪽빛 바다와 하얀 갈매기를 길동무 삼아 걸었다면 이번에는 연초록으로 뒤덮인 산과 들 그리고 새벽녘 지절대는 산새가 벗이 되어줄 것이다. 그는 절실한 가톨릭 신자이지만, 대자연 속을 걷는 것 자체가 사색이자 철학이자 묵상이자 거룩한 신앙이라고 노래한다. 스스로가 작은 풍경이 되는 것, 그게 깨달음이자 피안인 셈이다.
우리 땅, 우리 바다의 산증인도보여행가로 언론에 곧잘 소개되었지만 선생은 사실 우리 땅, 우리 바다의 알려지지 않은 기록자이다. 길을 나설 때면 꼭 챙기는 게 목에 걸린 작은 디지털카메라다. 이 카메라 렌즈에 5년간 우리 땅, 우리 바다의 사계절 풍광이 씨줄날줄로 담겼다. 국토의 해안선을 그물처럼 훑었기에, 그가 남긴 사진물이 10만 장이 훨씬 넘는다. 사진 대부분은 그가 관리하는 인터넷 카페에 저장돼 있다. 구글의 위성사진보다 더 촘촘하게 반도의 풍광을 담았다.
그는 또 여정 중에 모텔방에 쪼그려 앉아 매일의 행적을 일기로 남겼다. 그렇게 기록된 비망록은 무릎보다 높게 쌓였다. 사진과 펜으로 옮겨진 우리 땅, 우리바다의 체취는 우리가 딛고 선 국토가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한가를 가감없이 증언하고 있다.
그의 기록물에는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난도질당하는 우리 국토의 비참함도 오롯이 담겨 있다. 속절 없이 짓이겨지는 대자연에 비통해했고 때론 무력감에 한탄했다.
"콘크리트를 들이부어 해안에 방파제를 두르고 삼발이(테트라포드)로 아예 거대한 성을 쌓아 놨어. 그 안에는 주인 없는 고깃배 몇 척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야. 돈에 눈먼 건설업자 놈들과 지자체장들이 결탁해 국토를 법적으로 난도질하는 게 아니면 뭐냔 말이야." 갈기갈기 찢긴 처연한 자연을 눈과 가슴으로 목격했기에 그는 뼛속까지 자연주의자로 변모했다. 그는 학자나 정부기관, 위정자들이 외면한 우리 땅의 기록자인 동시에 시대의 목격자이다.
자신을 내려놓고 세상과 소통하다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선생이 나눠주는 명함이 있다. 그는 이를 '백수명함'이라고 부른다. 백수명함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홍보대사'라고 적혀 있다. 나홀로 국토 맨 가장자리를 걸으며 틈틈이 서울대 의대 발전기금을 모았다.
길에서 만난 '정체 모를 노인'에게 누가 기금을 선뜻 내놓을까 싶지만, 매달 월급에서 몇만 원씩을 떼 송금하는 아가씨부터 수억 원을 조건 없이 쾌척한 익명의 기부자도 만났다. 길에서 한 땀 한 땀 길어올린 성금은 서울의대 발전후원회에서 직접 관리한다.
홍보대사에 걸맞게 선생은 서울대병원의 권위는 높이되 문턱은 낮췄다. 길에서 만난 병마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서울대병원의 분야별 최고 선임의사를 일일이 주선했다. 선생의 도움으로 서울대병원 문턱을 넘은 환자가 전국에서 1000여 명을 헤아린다.
그럼 선생은 도보여행을 감행하기 전,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살았을까. 이 물음에는 김삿갓에 빗댄 선문답 같은 대답만 되뇐다.
"모름지기 거지의 과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게 이 바닥의 불문율이야."그저 자신은 산하를 주유하는 나그네이며 다섯 아들을 둔 이 땅의 평범한 아버지이자 할아버지로만 기억되고 싶다고도 했다. 자신의 과거를 밝히지 않는 이유는 뭘까. 과거의 이력이 자칫 권력이나 교만으로 비칠까를 경계해서다.
"내가 서울 토박이지만, 서울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사람들 눈빛이 달라지는 게 보여. 때론 과거가 그 사람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기도 해. 편견 그거 정말 무서운 거야."과거를 잊고 스스로를 내려놓았기에, 심심산골의 노인부터 도심의 초등학생까지, 연령성별의 경계를 허물고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과거를 버리니 세상을 얻더라"는 선생의 전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또 자신의 걷기는 '민족 내면을 꿰뚫는 작업'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저 풍광을 탐닉하며 소일 삼아 걷는 여행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의 내면을 파고들어 그 사이에 가로놓인 불신의 벽을 허무는 소명의식이 그의 발걸음에 깔려 있다.
"5년간 스쳐 간 사람까지 합하면 길에서 족히 1000만 명은 만났을 거야." 사람 사이에 길이 있다... 그 길을 걷고 싶다거침없고 넉살 좋은 화술에 특유의 친화력으로 길에서 사귄 남녀노소 '친구'만 수천 명에 이른다. 그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이들이 모여 인터넷에 팬클럽카페(
http://cafe.daum.net/mi5267)도 만들었다. 한결같이 길에서 조우해 그의 진솔함을 느낀 눈 맑은 사람들이다.
5년간 2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여행경비도 이런 '길바닥 친구들'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가능했다. 이번 내륙 여정에 소요되는 경비도 임병선씨라는 일면의 팬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서울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임씨 역시 두어 차례 국토순례에 도전했던 아마추어 도보여행가다. 우연히 선생이 묵었던 전남의 어느 숙소에 들렀다가 주인장으로부터 선생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전화통화를 한 뒤 조건 없이 후원금을 대고 있다.
솔직히 선생 자신도 길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교감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술회한다. "무지렁이 노인네가 불쌍해 그런 거 아니겠어"라며 계면쩍게 웃지만, 실상은 선생의 신념과 순수함에 감화됐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이번 내륙 도보를 마치면 5년간의 도보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을 계획이다. 기회가 닿으면 선영이 잠든 경기도 선산에 개인박물관을 지어 자신의 기록물들을 전시해 국민과 소통하고자 하는 포부도 품고 있다.
시인 정현종은 '사람 사이에 섬이 있고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했다. 남 선생은 '사람 사이에 길이 있고 그 길을 걷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는 실제 그 길을 걸었고 지금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