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천만 원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등록금에 분노하며 광장으로 몰려나오는 대학생들이 하나둘 늘어가더니, 이제 그들의 부모인 '386세대'도 그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386세대는 왜 거리로 나온 것일까. 그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명동 거리를 행진하던 그들 머리 위로 쏟아지던 하이얀 점점을 기억해낸 것은 아닐까?
반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386세대의 전 세대는, 건물 창가에서 처음엔 박수로 다음엔 두루마리 휴지로 응원을 보내다, 결국엔 거리로 나와 그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그들과 함께 최루탄을 마시고 그들과 함께 행진을 했다. 그리고 (분명 한계는 존재했지만) 그들은 함께 6·29선언을 얻어냈다.
그 짜릿한 승리의 경험 때문에 386세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대학생들만의 투쟁이 시민들의 투쟁으로 번질 때 민주적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은 자녀들과 함께하고자 지금 광장에 모이고 있다고 감히 나는 생각해본다.
이런 생각을 해보는 나는 'X세대'다. 1990년대에 대학에 입학해, 전대협이란 이름은 선배들과의 술자리에만 들어본 '한총련 끝자락' 세대. 외환위기와 함께 비정규직이란 용어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던 취업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를 써야 했던, 바로 그 세대다.
1990년대는 어쨌든 문민정부의 시대였고 취업난이 심각했기 때문에 우리 세대는 선배들만큼 정치에 민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반값등록금'을 위한 싸움은 우리 세대에게도 하이얀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바로 '노수석'이라는 학생의 얼굴이다.
거리에서 친구를 잃어야 했던 'X세대'의 봄
1996년, 소위 운동권이든 비운동권이든 대다수 대학생들에게 가장 큰 이슈는 '등록금 인상'이었다. 재단 적립금이 충분한데도 매년 급격하게 인상되는 등록금에 참을 수 없었던 학생들은 대학 측에 등록금 인상 내역을 공개하라고 요구했지만 대학은 묵묵부답이었고, 결국 서울지역 대학들은 동맹휴업을 결정했다. 그리고 3월 29일, 종로에 모인 수많은 대학생들은 등록금 인상에 대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등록금 인상에 대한 반대 시위는 김영삼 대통령이 후보 시절 약속한 '교육재정 확보'를 촉구하는 시위로 나아갔다. 기성세대에게, '민주화'라는 커다란 이슈가 아닌 '등록금'이라는 학생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거리로 나온 학생들이 못마땅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학생들 자신의 문제였기 때문에 정치적 무관심이 날로 증가하는 당시의 대학사회에서 소위 '등록금 투쟁'만은 많은 이들을 불러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 수많은 대학생들이 모여 있던 종로 어느 골목에서 외롭게 죽어간 한 학생이 있었다. 연세대학교 법학과 2학년인 노수석.
경찰 수칙에 따르면 집회에 대한 경찰의 대응은 대부분 해산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교육재정과 대선자금의 연결고리에 주목하며 "교육재정 확보하라"는 구호를 "대선자금 공개하라"는 구호로 연장시키는 대학생들의 목소리에 경찰은 민감하게 반응했고, 급기야 당시 거리에 나온 모든 학생들을 일제히 연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대 X세대가 최루탄과 과잉진압에 익숙하지 않은 탓일까, 아니면 경찰의 과민반응이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일 탓일까. 공포에 떨며 도망치다 전도유망한, 겨우 스물몇 살 밖에 되지 않는 한 학생은 그만 심장마비로 죽어간 것이다.
노수석 학생이 죽은 뒤, 그의 모교인 연세대 백양로에는 오래도록 시신이 놓여졌다. 그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경찰에 맞서 학생들은 과잉진압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오래전에 심장이 너무 약해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며, 심장이 유독 약했을 거란 경찰의 설명만이 노수석 학생의 죽음을 덮었다.
설상가상으로 X세대의 의미 있는 첫 움직임이 그렇게 좌절되던 그해에 이른바 '연대사태'가 터졌다. 그 전 해까지만 해도 평화롭게 진행된 범민족대회를 하기 위해 전국의 대학생들이 연세대에 모였을 때, 경찰은 학교를 포위한 채 그들을 '친북세력', '이적세력'이라고 몰아붙였다.
여성용품이라도 전달해달라는 시민단체의 요청마저 무시당했고 학생들은 공포에 떨며 초코파이 하나를 열 명이 나눠먹으며 오랜 기간을 견뎌야 했다. 결국 한총련 간부들의 구속으로 연대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공감대가 형성된 등록금 투쟁 과정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겪어야 했고, 통일을 위한 문화 행사라고 생각하고 참석한 모임에서 굶주림과 이적세력의 오명을 겪어야 했던 1990년대의 X세대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함께 모여 올바른 무언가를 위해 소리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을 뿐. 그들은 이제 외환위기로 취업문을 닫아버린 기업들에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386세대'처럼, 우리도 '88만원세대'의 곁으로
그런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대한민국의 살인적인 '등록금'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대학생들과 그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386세대들이 광장에 모이고 있다. X세대가 대학을 떠난 뒤 등록금은 두세 배 뛰어올랐고 X세대가 각자의 직장에서 안정을 찾은 뒤 '88만원세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X세대의 20대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현 20대의 현실은 문제적인 것이다. 하지만 386세대와 달리 X세대에게는 동참의 의지가 엿보이지 않는다. 광장의 촛불들이 뉴스 화면에 비춰져도 X세대는 둔감하다(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X세대의 모습 이면엔 수석이의 죽음에서 시작해 연대항쟁으로 이어진 집단행동에 대한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놓여 있다고 한다면, 또 외환위기를 겪으며 신자유주의적 사회구조 전환 속에서 살아남고자 기를 쓰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무정치적 태도를 갖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단순한 해석이 될까?
X세대에 대한, 또는 X세대를 위한 이런 변명의 끝에서 같은 X세대이자 노수석의 동기인 나는, 문득 한 편의 글을 떠올려본다. '수석이를 살려내라'고 외치던 대학생들에게 지지를 보내며 한 사회학과 대학원생(현 성공회대 김정훈 교수)이 연세대 교지에 기고한 글을.
그 대학원생은 1996년 3월 대학생들의 분노와 동요를 프랑스 68혁명 당시 대학생들의 그것에 비유했다. 대학 등록금 자체를 폐지하고 대학 서열화를 없애 중고등학교 교육이 입시 위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자는 프랑스 학생들의 목소리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교육 혁명을 가져왔고 나아가 사회 곳곳이 진보적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며, 그는 1996년의 대한민국에서도 68혁명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비록 그의 예상과 소망은 어긋났지만, 나는 그의 꿈이 실현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에서 68혁명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전 최초의 68혁명 불씨를 지폈던, 하지만 곧 꺼져버린 불씨에 언젠가부터 더 이상은 광장에 나오지 않으려 하는 X세대들이 부디 다시금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명동 거리를 행진하던 대학생들에게 두루마리 휴지로 한여름의 함박눈을 내려주며 동참한 넥타이부대처럼, 등록금 천만 원 시대를 살아가는 88만원세대의 곁으로가 함께 촛불을 밝힐 수 있는 X세대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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