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7일자 <중앙일보>에 동정란에 한 재미교포 언론인의 부음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름은 안재훈, 직함은 RFA(자유아시아방송) 전 한국담당 국장. <중앙일보>는 그가 6월 1일 미국 버지니아 비치의 한 병원에서 향년 70세로 별세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일반인은 물론 국내 언론계에서도 그리 낯익지 않은 그는 1941년 평양 출신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1969년 <워싱턴포스트>에 입사해 26년간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입사 후 그는 국제부·조사부·연구부·메트로부 기자를 거쳐 온라인뉴스 편집인을 끝으로 1996년 초 퇴임했습니다.
퇴임 후 1997년부터는 대북전문 방송인 RFA(Radio Free Asia)로 자리를 옮겨 11년간 한국담당 국장으로 근무하면서 북한 동포들에게 북한 안팎의 소식을 전하는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는 2007년말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해 노후를 보내다가 최근에 별세했는데,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워싱턴포스트> 기자를 지낸 인물입니다.
그의 존재가 한국 언론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한국언론재단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방송>이라는 월간지에 '워싱턴으로부터의 편지'라는 칼럼을 연재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는 1989년부터 1995년까지 7년간 83회에 걸친 연재에서 한미 언론을 비교분석하는 내용을 주로 다뤘는데, 경험을 토대로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어서 국내 언론계에서는 애독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지면은 물론 방송에도 출연하였습니다. 1991년부터 그는 MBC 라디오 <세계는 지금>에서 '안재훈의 코멘터리'라는 코너를 맡아 4년여 동안 시사비평을 하였고, 이를 모아 1995년에 '안재훈의 코멘터리'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깔끔한 신사풍의 이미지를 풍겼던 그는 외모만큼이나 깔끔하고도 이지적인 논평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언론자유가 보장된 반면 경쟁이 치열했던 미국 신문의 기자 출신답게 그는 언론(인)의 기본가치와 경쟁을 중시했던 인물로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한국 언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1996년 초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 언론은 사실 확인보다 속도를 중시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고 이런 속보경쟁으로 오보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신문을 불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또 한국 기자들의 샐러리맨화 경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는 지적에 대해 "한번 뽑히면 무능력한 사람들도 전혀 도태되지 않는 한국 언론의 분위기 때문"이라며 "미국 언론은 언론사 입사부터 퇴사까지 기자정신을 갖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곳"이라고 밝혔습니다.
1969년에 입사한 그 역시 처음부터 정식기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입사 이듬해 그는 영친왕 부음기사를 써 화제가 됐고, 이를 계기로 정식기자가 됐습니다(참고로 그는 장준하, 이병철, 유진산, 김재규 등 한국 유명인사들의 부음기사를 썼으며,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때 처음으로 1면에 기사를 썼습니다).
"한국 언론의 문제, 다 알면서 말 안 하는 게 문제"한국의 유력지들이 앞다퉈 경쟁을 벌여온 '1등 신문' 즉, '고급지'에 대해서도 그는 소견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는 "한국신문은 대중지와 고급지를 동시에 추구한다. 그래서인지 아이템이나 취재영역이 너무 광범위하다. 다른 신문을 의식하기보단 철저하게 독자를 중시하고 백화점식 지면제작을 벗어나 자신 없는 취재영역은 과감하게 포기하면서 전문성을 추구해야만 말 그대로 고급지 전략도 그 힘을 얻게 될 것"이라며 고급지의 지름길은 전문화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한편 그는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였고, 북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출신(평양 태생)과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현역 시절 미국에서 남북한 관련 소식을 주로 취재·보도해왔던 그는 RFA을 떠나기 직전인 2007년 9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RFA 한국어 방송을 맡은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습니다.
"내 고향이 평양이다. 북한은 언론 자유가 없는 곳이므로 북한 관련 뉴스와 정보를 대리 방송하는 곳이 RFA다. 이 방송은 남에게 맡기면 안 되겠다 싶어 내가 창설 국장을 자청했다. 이건 내게 직업이 아니라 미션(mission, 사명)이라고 생각했다."북한인권 문제나 이와 관련한 한국 언론의 보도태도에 대해 그는 아쉬움을 갖고 잇었습니다. 그는 "(북한)인권 문제를 정치적 이슈로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인권이라는 것은 보편타당한 것이지 국가나 이념 문제가 아니다"고 전제하고는 "한국 언론들은 여성 인신매매, 기아 등 북한 인권의 참혹상을 잘 다루지 않는다. 우리가 보도하면 외국 언론은 금방 보도하는데 한국 언론은 조용하다. '다 아는 것 아니냐'는 식이어서 참 안타깝다"며 한국 언론의 소극적인 보도태도에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한편 그의 부음기사는 국내 언론 가운데 유독 <중앙일보>에만 실렸는데 거기엔 나름의 사연이 하나 있습니다. 1995년말 퇴임을 앞두고 2년간 안식년을 얻은 그는 당시 미국 언론계 소식 등을 연재해 오던 <신문과 방송> 지면을 통해 "한국 언론사 가운데 1년간 나를 옴브즈맨으로 고용할 언론사가 없느냐"고 공개 제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중앙일보>가 이에 화답하면서 이 인연으로 그는 1996년 2월부터 1년가량 <중앙일보>에서 '전문위원'이라는 직함으로 근무했습니다. 이번 부음기사에서 <중앙일보>가 그를 '전 중앙일보 전문위원'이라고 소개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그가 <중앙일보>와 인연을 맺게 된 데는 <중앙일보>가 <워싱턴포스트>와 평소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던 데다, 안씨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경기고 선후배 사이였기 때문이라는 후문도 있습니다).
<중앙일보> 전문위원으로 부임한 직후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했던 그는 1년 임기를 마치고 1997년 초 미국으로 되돌아가기 직전 이 매체와 또 다시 인터뷰를 했습니다. 1년간 한국에서 보낸 그의 소감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우선 그는 "한국 언론의 문제에 대해 본인들이 다 알면서 굳이 손님인 내 입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경우를 많이 겪었다. 몰라서 얘기 안 하는 게 아니라 다 알면서도 얘기하지 않는다"며 한국 언론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발언하고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언론자유를 위해 언론노조만 나설 뿐 사주들은 수수방관해온 한국의 언론 현실에 대해 의아해 하면서 사주가 언론사의 주인인 만큼 언론자유를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밖에도 그는 공보처의 존재에 대해 "상당히 수치스러운 사실"이라며 "빠른 시일 내 공보처를 없애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언론에 대한 그의 애정, 오래오래 기억될 것글을 맺으면서 그와 필자와의 작은 인연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현역기자 시절 국내외 신문의 호외(號外)를 수집해온 필자는 1995년 10월 3일 <워싱턴포스트>가 소위 'OJ 심슨사건'(1994년 6월 발생)의 평결 결과를 호외로 발행했다는 외신 보도를 접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미국 신문의 호외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고민하던 필자는 급기야 미국으로 전보를 보냈는데 그 수신자가 바로 안재훈씨였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필자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당 호외 두 점을 구해 우편으로 보내주었습니다.
그 당시 <중앙일보>에 재직하고 있던 필자는 그와의 그런 인연으로 그가 <중앙일보>에 전문위원으로 잠시 근무할 당시 가깝게 지내며 더러 대화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무렵 <중앙일보>는 홍석현 회장이 막 부임해 지면쇄신 등 체제개편을 단행하던 시기였습니다. 그의 경험은 <중앙일보>의 변혁에 나름의 기여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언젠가 토요일 오후 그는 필자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나에게 석 달 정도만 <중앙일보>를 맡겨주면 '1등 신문'으로 만들 자신이 있다" '대체 그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그는 필자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국에 와보니 기자들이 취재한 것만 제대로 다 보도하면 저절로 1등 신문이 되겠다."그의 이 말에 대해서는 부연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기자들은 기사 취재, 보도 말고도 수시로 부서장이나 회사에 '정보보고'라는 걸 합니다. 그 대부분은 기사 취재와 관련한 외곽정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사 사주나 자사 경영과 관련한 내용, 또는 정치인이나 재벌 회장, 톱스타 등 이른바 유명인사들의 신상에 관한 내용도 더러 있습니다(어떤 언론사에서는 기사보다도 정보보고를 잘해야 출세한다는 우스갯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보보고 가운데 상당수는 민감한 것들이 적지 않은데 대부분은 기자들이나 신문사 내부에서만 공유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이런 정보를 쌓아뒀다가 필요할 때 폭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사장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신문사 차원에서 특정인을 봐주거나 혹은 공격할 때 사용하는 셈이지요.
그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공적 매체가 기자들이 수집한 정보를 사적으로 사용하면서 본연의 기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인 셈입니다. 미국 언론에서는 그런 경우가 좀체 있을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일생을 미국 언론계에서 활동하였지만 한국과 한국 언론에 대해서도 애정이 컸던 그였습니다. 그가 보여준 따뜻하고도 반듯한 언행은 한국 언론계에도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