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로 떠나는 열차에 탄 부모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아파트 담에 늘어진 줄장미가 눈에 들어왔다. 불과 몇 주 전이었던 6월 초에 새빨갛고 깊은 빛으로 요염하게 피어나던 장미는 어느새 빛 바랜 색 꽃송이를 무거운 듯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지난 주말에 친정 부모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칠순도 반 고개를 넘긴 두 노인네에겐 꽤 먼 길이다. 뜨거웠던 토요일 정오 무렵, 집에 도착한 부모님은 웃는 얼굴이었지만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그날 오후 친지 결혼식에 참석할 참이어서 양복 정장에 넥타이까지 맨 아빠와 구두를 신고 얼굴엔 화장까지 곱게 한 엄마의 얼굴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돌산이었던 남산이 이렇게 변했어!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된 아빠는 이곳 저곳 들러볼 곳이 많다고 하셨다. 토요일 오후 결혼식을 마치고 부모님을 모시고 남편과 나는 남산으로 향했다. 40여 년 전 용산 육군본부에서 근무할 때, 아빠는 남산에 종종 들렀다고 했다. 그 즈음의 남산은 나무가 무성하지 않아 척박한 돌산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남산 케이블카 입구에서 차를 세우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주말 오후라서 그런지 케이블카 매표건물은 입구 계단부터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난감했다. 고령의 부모님도 여지없이 계단에 서서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황. 남편은 주차할 곳을 찾아 아직 차에 있었다.
다행히 기다리는 줄이 금세 움직였다. 이삼십 분쯤 기다려 대기 줄 맨 앞까지 왔다. 주말이라 한 번에 정원 48명을 채워 태우는 복잡한 케이블카에 올라탔다. 다행히 가장자리에서 유리창 너머 바깥을 내다볼 수 있었다. 아빠는 무엇보다 40년 전 밋밋했던 돌산이 무성한 녹색 숲으로 변한 것에 놀라셨다. 엄마도 케이블카 아래로 뻗어있는 키 높은 나무들을 보며 '저 나무 봐라, 몇 십 년 지나니까 저렇게 컸네'하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다.
감탄의 시간은 잠시, 케이블카는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지에서 팔각정과 서울타워가 있는 정상까지는 나무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했다. 엄마가 걱정스러웠다.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해서 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해서 오후에 결혼식에 참석하고 지금 또 남산에 왔으니 말이다. 젊은 나라도 힘들 텐데, 다리도 아픈 엄마가 구두를 신고 계단을 오르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아빠가 부축하고, 내가 부축하며 겨우겨우 정상으로 올랐다. 팔각정과 봉화대를 구경하고 연인들의 자물쇠가 두 겹 세 겹 매달린 전망대 데크도 둘러본 뒤 서울타워에 올라 시내 전체를 내려다 보며 이 곳 저 곳을 설명해 드렸다.
아침 늦게까지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않는 엄마다음 날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아빠는 여느때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아파트 앞 공원으로 운동하러 가셨다. 엄마는 아직도 방에 누워 있었다. 무척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시간이 일곱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살짝 열려진 방문 사이로 잠자는 엄마를 보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와 찌개를 준비하는데 갑작스레 이런 생각이 스쳤다.
'저렇게 누워 있다가 갑자기 돌아가셔도 아무도 모르겠다.'바깥은 여름 햇살로 벌써부터 눈이 부셨다. 너무 눈부신 아름다움과 이제 늙어 쇠락하는 엄마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아침을 준비하는 부엌에서 갑자기 마음 한 쪽이 무거워졌다. 엄마는 다음 날도 아침 늦게까지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명절이나 생신처럼 일이 있어 친정에 들렀을 때, 엄마는 늘 그랬던 것처럼 제일 먼저 일어나서 밥을 안치고 아침 준비를 했다.
지난 달 아빠 생신이 있어 들렀을 때만 해도 그랬다. 좀 쉬라고 말씀 드려도 자식들 먹이는 게 재미있다고 일축하곤 하셨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아직 근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려니 하며 내심 안도의 마음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건 내 오산이었다. 누군가 대신 해 줄 사람이 있으면 엄마도 이른 아침 일어나 밥을 하고 식구들 먹이는 일에서 이제는 해방되고 싶은 한 사람의 자연인이라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아빠도 건강한 몸과는 달리 마음이 많이 약해지셨다. 일요일 아침 KBS 인간극장에서 나이든 삼형제 셋이 시골에서 사는 모습이 방영될 때였다. 50∼60 대로 보이는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던 아빠가 갑자기 '에이, 남자끼리만 사는 거 못 보겠다' 하면서 채널을 돌리셨다. 올해 초, 엄마와 단짝처럼 지내던 막내 이모가 돌아가시면서 혼자 남게 된 이모부의 생활이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평생 이모가 해 주는 밥, 빨래, 청소에 의지했던 이모부가 처한 일상이 부모님이 보기엔 말할 수 없이 안스러운 모양이었다.
"내 자식인데도 왜 이리 미안한지 모르겠다"일요일 오후엔 인천공항, 인천대교, 김포공항을 둘러보았다. 대구 공항에서만 국제선을 이용했던 아빠는 말로만 들던 인천공항이 어떤 곳인지 무척 궁금하셨던 것 같다. 그 곳까지 간 김에 작년 말에 개통한 새로운 명물 인천대교를 지나, 김포공항까지 눈도장 찍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2박 3일의 짧은 나들이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부모님을 서울역까지 배웅해드렸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고 했던 광화문 광장을 엄마는 내 운동화를 신고 둘러보았다.
전날 공항으로 출발하는 길에서부터 엄마는 편한 신발을 찾았다. 광장을 둘러보는 내내 엄마 손가방은 내가 들고 있었다. 가방이 무거워 이것저것 못 넣어 왔다는 엄마 말이 기억나서였다. 서울역 KTX 열차 안에서 내 운동화를 벗기고 가방 안에 넣어 온 엄마 구두를 신겨 드리면서 다음에는 꼭 편한 신발 신고 다니시라 당부 했다. 잘 내려가시라는 내게 엄마가 말했다.
"나이 든 엄마가 오니 니가 고생이다. 내 자식인데도 왜 이리 미안한지 모르겠다"배웅하고 돌아서는 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어린 아이를 돌보는 것처럼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엄마를 바라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모의 죽음 때문인지, 엄마는 눈에 띄게 노쇠해지고 있었다. 아빠도 매년 달라지고 점점 복잡해지는 서울이 이제 부담스러우신 눈치셨다.
그런 마음으로 집으로 들어서는 길이어서 그랬을까? 빛 바랜 채 고개를 푹 숙인 줄장미와 떨어진 꽃잎이 노년의 부모님 같아 보였다. 올 봄, 내 눈과 코를 즐겁게 해주던 봄 꽃들도 어느새 모두 사라졌다. 자연은 모두 올 때와 갈 때를 안다. 부모님의 쇠락을 그저 외면하고 싶은 것으로 치부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 모습은 불과 몇 십 년 후의 내 모습이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늙음과 죽음을 애써 감추고 있다. 부부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핵가족의 부부는 어리고 젊은 자녀들을 보며 자기가 그 자녀 같은 양 착각 속에 빠져 산다. 불과 20∼30년 전에 부모님이 자기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며 키웠고, 이제 늘그막의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명절이나 집안일로 친정이나 시댁에 들렀을 때 이런저런 번민이 찾아 들다가도 돌아오는 길에서 잊어 버린다.
일상으로 돌아와 부대끼는 사회에서 그 망각은 자연스럽다. TV 에서는 아름답고 밝고 건강한 사람들의 쇼가 진행되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위트 있는 사람들이 흘러 넘친다. 출근하여 만나는 회사 직원들이나 거래처 사람들 중에도 나이 들고 쇠락한 사람은 없다.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것인데, 병들고 쇠락하고 죽는 다는 것이 어느새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낯선 일,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 한편, 병원 중환자실에서는 너무나 일상화된 환자의 죽음에 무덤덤해하는 간호사와 의사들이 있다. 노인 요양원에는 노인들과 의무적으로 그들을 돌봐주는 직업인들로 북적거린다. 이것과 저것이 고르게 분포되어야 할 삶이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 한쪽에는 밝은 기운이 넘치고, 한쪽에는 쇠락과 고통과 한숨이 넘친다. 그 어느 쪽도 자연스럽지 않다.
오랜만에 다녀가신 부모님이 내 삶과 세상까지 돌아보게 하셨다. 두 분이 내려가신 뒤 텅 빈 집에 오후 느즈막히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밝게 웃는다. 내 앞에서 깔깔거리는 저 어린 기운에 취해 내가 가끔씩 내 자신을 망각하고 사는 건 아닌가 생각 해 본다. 어느 새 두 분이 도착할 시간이다. 잘 도착하셨는지 친정에 전화부터 드려야겠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blog.daum.net/rheemi)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