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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푸군관학교 개교식 흰색 모자를 쓴 쑨원과 군복을 입은 초대교장 장제스의 모습이 보인다.
황푸군관학교 개교식흰색 모자를 쓴 쑨원과 군복을 입은 초대교장 장제스의 모습이 보인다. ⓒ 광동인민출판사

최근 중국은 <2010 국방백서>에서 대만과의 군사 교류와 상호 신뢰구축을 위한 논의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양안(兩岸)관계의 평화적 화해 무드를 우회적으로 제안했다. 이에 대해 마잉주(馬英九)총통과 대만정부는 아직 이 문제를 논의할 때가 성숙되지 않았다고 사실상 거절의 뜻을 표명했으며 민진당 등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중국이 대만을 겨냥해 배치한 1000기의 미사일부터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양안 간에 표면적으로 아직 긴장감이 감돌고는 있지만 인적교류와 경제적 파트너십을 가만할 때 군사교류도 멀지 않은 장래에 실현될 수 있을 거라고 전망된다. 더구나 국민당과 공산당이 군벌타도를 위해 1차 국공합작을 맺던 시절에는 함께 제국주의의 군사적 침탈에 맞서 무장역량을 건설하기 위해 양당이 힘을 합쳐 군사학교를 세웠던 역사적 배경도 있었으니 말이다.

 

1924년 6월 16일, 장제스(蔣介石)을 초대 교장으로, 쑨원(孫文)을 총리로,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정치부 주임으로 한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가 개교했다. 러시아의 군사고문 갈렌의 지도하에 중국 최초의 현대적 군사교육기관이 국공합작 체제하에서 설립된 것이다.

 

중국의 육사, 황푸군관학교 개교식에 부인과 함께 참석한 쑨원은 연설에서 국민당 산하에 당을 뒷받침해 줄 당의 군대가 없어 혁명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진단하고 혁명 무력과 민중의 결합을 통해 진정한 혁명 무장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24년 3월에 실시된 입학시험에서 선발된 350명의 학생과 120명의 예비학생들은 10개월의 군사훈련과정을 수료하고 항일 무장투쟁의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 때 입학생 중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후임자로 중국을 호령했던 중국 10대 원수 중 한 명인 린뱌오(林彪)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를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다지는 근거지로 활용했으며 1926년 학교의 이름을 중앙군사정치학교로 개명하고 1927년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공산당 세력을 학교에서 완전히 배제하였다.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 외곽에 있던 황푸군관학교는 항일투쟁과 공산당 토벌작전 과정에서 국민당을 따라 난징(南京), 청두(成都), 펑산(鳳山) 등을 거쳐 1949년 대만으로 옮겨갔다. 대만에서는 군사, 정치적 간부를 육성해낸 황포군관학교에 대한 평가가 당연히 긍정적이겠지만 중국에서도 군벌타도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공산당의 무장 투쟁력도 제고해준 것에 대해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이 일본과의 댜오위다오(釣魚島) 영토분쟁에서 한 목소리를 내며 공조하는 모습을 보면 항일투쟁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대만이 군사적으로 여전히 약간 애매한 관계에 놓여 있긴 하지만 최근 대만의 퇴역장성들이 중국을 방문하며 군사적 교류의 물꼬를 트고 있는 상황이라 미국, 중국, 대만의 불안한 삼각구도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중국과 대만의 군사적 균형을 통해 양안간의 전쟁위협을 감소시킨다는 명목으로 대만에 무기를 판매하는 미국으로서는 황푸군관학교의 추억을 떠올리며 양안간의 군사적 교류와 평화무드가 무르익어 가는 것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황푸군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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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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