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탑이 서 있는 언덕
위령탑으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심한 편이다. 그래서 우리가 타고 간 버스는 길 초입에 우릴 내려놓는다. 위령탑까지는 길이 잘 포장되어 있다. 길옆으로는 위령탑 제막식 때 심은 영산홍 꽃이 아직도 조금 남아 있다. 한 150m 정도 올라가니 삼각뿔 형태를 이룬 세 개의 기둥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 46용사를 추모하는 오석이 세워져 있다. 오석 위에 '천안함 46용사 위령탑'이라는 글씨가 있고, 그 아래 46용사의 얼굴을 새긴 동판이 붙어 있다.
전사한 군인들의 면면을 보니 부사관들이 많다. 군함을 운영하는 데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해 부사관들이 많은 것 같다. 순직한 병사 중에는 1890년생도 있다. 함께 여행하는 아줌마들이 더욱 안타까워한다. 나도 군대 가 있는 아들이 있어선지 마음이 아프다. 위령탑 왼쪽에는 이근배 시인의 '불멸의 성좌여, 바다의 수호신이여 -천안함 46용사를 기리는 노래-'가 있다.
아, 그날 2010년 3월 26일 파도도 잠드는 시간.누구는 아버지 어머니께 문안 전화를 드리고누구는 연인을 그리는 편지를 띄우고꽃다운 젊음들이 평화의 꿈을 펼칠 때어찌 뜻하였으리.하늘이 무너지는 한 순간의 참화가우리의 고귀한 아들들을 앗아갔어라.
위령탑에 새겨진 지도를 보니, 천안함은 위령탑에서 서쪽으로 2.5㎞ 떨어진 지점에서 피격되었다. 먼저 물에 가라앉은 함미 부분은 피격지점 동남쪽 1.5㎞에서 발견되었고, 좀 더 늦게 가라앉은 함수부분은 백령도 남쪽 2.7㎞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백령도와 대청도 사이로 물살이 세기 때문에 침몰된 배가 동남쪽으로 그렇게나 멀리 떠내려간 것이다. 그리고 희생자 대부분은 함미부분에서 발견되었다.
위령탑 앞에는 서쪽을 향한 초소와 기관총 발사대만이 하나 서 있다. 낮에는 초병도 철수하고 없어 적막하기만 하다. 이곳에서 바라 본 서해바다는 아주 평온하기만하다. 또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실제로 이쪽으로 적이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섬 안쪽 높은 봉우리에 있는 공군 레이더 기지가 우리의 영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중화동 포구에서 두무진까지 유람선 타기
위령탑을 내려온 우리는 중화동 포구로 간다. 그곳에서 두무진까지 왕복 1시간 유람선을 타야하기 때문이다. 포구에 도착하니 '백령 1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승선인원이 98명으로 되어 있다. 배에 함께 탄 인원이 60명 정도다. 우리 팀이 15명 정도, 마산에서 온 팀이 45명 정도다. 배에 오르자 유람선이 바로 출발한다. 뱃머리를 서북쪽으로 돌리더니 어느새 위령탑이 있는 해안을 지난다.
배는 바다 쪽으로 멀리 나가지 않고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향한다. 그 이유는 볼만한 경치가 해안을 따라 나 있고, 바다 쪽으로는 까나리 그물이 쳐져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백령도는 해안이 대부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포구 지역을 빼고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사람의 접근이 불가능하니 새들에게는 오히려 보금자리로 안성맞춤인 셈이다. 물가의 작은 암초에서는 잠깐 쉬고 있는 가마우지와 갈매기를 볼 수 있다.
30분쯤 가니 두무진의 상징 코끼리 바위가 보인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가 몰려와 그 모습의 일부를 감싼다. 보여주기 싫다는 건지, 신비로움을 더하려는 건지, 자연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다. 바다의 날씨라는 게 워낙 변덕이 심하니 뭐라 말할 수도 없다. 우리 배는 조금 더 북쪽으로 가 형제바위와 선대암 지역을 한 바퀴 돈다. 두무진 포구에서 출항한 배도 이곳에 와 유람을 한다. 뿌연 안개가 더 심해진다.
이광국 선생은 나중에 두무진을 걸어서 다시 보게 될 텐데 그때 날씨가 좋아질 거라고 우리를 위로한다. 그러면서 두무진은 바다에서 보는 경치보다 바위에 올라가 보는 경치가 훨씬 좋다고 덧붙인다. 이곳 두무진 지역은 조류가 빨라 안개가 걷히길 기다릴 수도 없다. 이제 다시 중화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갈 때는 올 때 본 것들을 다시 보게 되는 셈이니 복습하는 격이다. 여행에서는 간 길로 돌아오는 일은 정말 재미없다. 그렇지만 유람선 선착장이나 차나 다 중화동에 있으니 그리로 돌아가야 한다. 또 중화동에는 중요한 볼거리가 있어 그리로 가지 않을 수도 없다. 우리 역사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개신교 교회가 그곳에 있다.
남한 땅에서는 가장 오래된 중화동교회
포구에서 마을로 들어가니 언덕 위에 중화동 교회가 있다. 교회에 가려면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계단을 오르다 보니 끝쯤에 천연기념물(제521호)로 지정된 무궁화나무가 있다. 수령이 90-100년에, 수고가 6.3m, 나무의 굵기가 70㎝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무궁화일 뿐 아니라, 순수한 재래종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고 한다.
이 나무를 지나자 앞에 중화동 교회가 나타난다. 1930년대에 지은 건물로 백령도 14개 교회의 모교회(母敎會)다. 중화동 교회는 이곳 출신으로 당상관에 올랐던 허득(許得: 1828-1902)에 의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던 허득은 1896년 8월25일(陰曆) 은밀하게 예배를 보았다. 그리고 교회와 전도에 대한 제한이 풀린 1898년 6월부터는 공식적으로 예배 활동을 시작했고, 9월에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소래(松川)교회 장로와 교인들의 도움으로 교회설립 예배를 보게 되었다.
사실 백령도에 개신교 복음이 전달된 것은 토마스(Robert J Thomas) 선교사에 의해서다. 그는 1865년 9월 8일 두무진 포구에 상륙했고, 그 후 두 달 동안 황해도와 평안도를 다니며 선교를 했다. 그러나 그는 평양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다고 한다. 1900년 11월 8일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중화동 교회를 방문하여 허득 등 7명에게 정식으로 세례를 주었다.
현재 중화동 교회에는 이를 기념해 '세례식 집전 기념비'와 '허득공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중화동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들 기념비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마당에 한켠에 있는 녹슨 종이다. 손잡이가 훼손되어 현재 사용하지는 않지만, 중화동 교회와 함께 역사를 같이해 온 소중한 유산이다. 이들을 보고 나서 나는 교회 옆에 있는 백령 기독교 역사관으로 간다.
이곳에는 중화동 교회의 역사가 글과 지도, 조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그 중 인상적인 것이 기와집으로 된 소래교회 사진과,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목사들의 모습이다. 또 1937년에 찍은 백령면 일요학교 사진도 인상적이다. 당시만 해도 남녀가 유별해서인지,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따로따로 사진을 찍었다. 기념관을 나와 중화동 교회를 떠나다 보니 굵은 향나무가 하나 보인다. 이것도 역시 중화동 교회와 고락을 같이한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두무진으로 가는 길
중화동 교회를 다 보고 나오니 5시 30분이다. 이제 두무진으로 가 해안절벽과 기암괴석을 보는 일만 남았다. 중화동에서 두무진까지는 15분이면 간다. 사실 두무진은 기암괴석도 아름답지만 낙조도 일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해지는 시간이 늦어 낙조를 제대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화동에서 두무진 가는 길은 섬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가야 한다. 해안 쪽은 절벽이어서 길이 없다. 먼저 소갈동으로 간 다음 대갈동에 이르러 좌회전을 한다. 그 길은 사항포구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다시 좌회전을 해 산길을 넘어가야 두무진에 이를 수 있다. 산을 넘다 보니 오른쪽으로 기상대가 보인다. 바람과 비, 황사 등 날씨를 좌우하는 모든 요소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을 하기 때문에 이곳에 기상대를 세운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기상대 직원이 백령도에 발령을 받으면 유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아니 거꾸로 요즘은 교통이 좋으니 오히려 선호하는 근무지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삼십년 전까지만 해도 백령도는 오지 중 오지였다. 개인적으로 가까이 지내는 서예가이자 한학자가 있는데, 1980년대 초 백령도의 고등학교에 한문교사로 발령을 받아 부임을 포기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백령도는 유배지 중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