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만들어낸 수많은 유·무형의 것들 가운데, 인간의 목숨을 가장 많이 앗아간 두 가지를 꼽자면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비록 이 두 가지가 인류역사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이바지한 측면이 많다 하더라도 그 부작용에 대한 반론의 여지는 없을 것 같은데요. 작가 황석영이 2001년 발표한 역사소설 <손님>은 인류의 '보편적 행복'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와 '종교'가 어떻게 폭력성을 가지게 되는지 그 과정을 잘 묘사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손님>은 1950년 10월, 한국전쟁 중 일어난 '신천군 사건'을 소재로 남과 북이 서로에게 저질렀던 동족상잔의 비극을 고발함과 동시에, 이 땅에 들어온 손님(기독교, 사회주의)을 온전히 우리 것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에 끌려 달리는 우리들에게 내면적 성찰을 요구합니다.
소재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심지어 글의 구성마저도 평범하지 않은 <손님>은 사실 쉽게 읽어 내려가기에는 부담이 많이 따르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멈추기 힘든 알 수 없는 마력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아마도 무당굿의 12마당을 빌려와 12장으로 구성한 전개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고 각각의 인물들이 1인칭 시점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구성은 흡사 꼬인 실타래처럼 보이지만, 종국에는 날줄과 씨줄이 엮여서 한 폭의 베를 짜듯, 자연스럽게 결말을 향해 나아갑니다.
영화 <노트북>과 <If only>를 보신 분은 그 구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텐데요. '나'의 시점으로 사건을 바라볼 경우, 주관적인 감정 묘사가 세밀해지지만 상대방의 감정과 상대방의 이야기를 모른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대신 그 한계는 독자(청자)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요소가 됩니다. 때문에 다양한 인물들의 1인칭 시점이 계속 이어지면서 이야기는 조금 더 풍성해지고, 어느덧 결말에 이르러서는 시점 전환과 함께 비밀이 밝혀집니다. 그 과정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는 경험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셈이죠.
본격적인 책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손님>의 소재가 된 '신천군 사건'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지금까지도 남과 북에서는 '신천군 사건'을 다르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북에서는 미군측의 양민 학살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남에서는 반공투쟁 사건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황석영 작가의 경우에는 '기독교 우파와 사회주의 좌파 간의 대립과 대결이 폭력으로 악화된 사상대립에 따른 사건'이라고 해석하는 듯 보입니다.
참고로, 2002년 4월에 방영된 MBC<이제는 말할 수 있다-망각의 전쟁편>에 따르면, 이 사건은 '좌우 대립의 결과'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데요. 작품을 만든 조준묵 피디는 "당시 미군은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어 신천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며 "'미군 주도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 민족끼리 서로를 죽이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체가 된 것은 기독교인과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독교인과 사회주의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책 전체를 아우르는 키워드, '손님'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어집니다.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신을 믿지 않는 사탄이요, 악마일 뿐이었고, 인민이기를 거부하며 외래 신을 떠받드는 '예수쟁이'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나와 함께 구원받아야 할 대상임에도, 함께 평등을 누려야 할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총이 주어진 순간 살육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힘이 주어지면 그 힘은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그 힘을 조금 더 의미있고 생산적인 일에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같은 의미에서 권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힘의 존속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의 힘에 도전하는 혹은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를 제거하는 일입이다. 복수를 잉태시키는 원인이지요. '우리'가 '적'이 되는 순간은 찰나였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작가는 '화해'와 '용서'의 길로 나서는 법을 제시합니다. 책 속의 주인공 요섭 목사는 죽음을 앞두고 고향에 찾아가 당시의 진실을 추적해 나가는데요. 이제는 혼령이 되어버린 당시 마을사람들과 마주하며(소설적 장치) 과거를 회상합니다. 또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 당시에는 듣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귀신(당시 죽었던 마을사람)을 한데 모아 푸닥거리하는 것은 곧 서로에게 총칼을 들었던 마을 사람 간의 화해이자, 종교와 이념의 화합으로까지 해석 가능합니다.
특히, 요한의 형수가 말하는 대목이야 말로 두 손님(기독교, 사회주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생각해보게끔 합니다.
내 평생을 생각해봤디. 모던 것이 다 사람덜 좋게 할라구 나왔넌데 어째 기렇게 서로 미워했을꼬 말이오. <손님> 中종교든, 이념이든, 혹은 학문이든 예술이든 문화든…. 결국은 사람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나타난 것들 아니겠습니까. 사람에 대한 가치를 소홀히 한다면, '손님'에 의한 비극은 언제든지 되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