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오마이뉴스> 지역투어 '시민기자 1박2일'이 6월부터 새롭게 시작합니다. 이번 투어에서는 기존 '찾아가는 편집국' '기사 합평회' 등에 더해 '시민-상근 공동 지역뉴스 파노라마' 기획도 펼쳐집니다. 맛집, 관광지 등은 물론이고 '핫 이슈'까지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지역의 희로애락을 낱낱이 보여드립니다. 6월 지역투어 첫 행선지는 제주도입니다. 바람 부는 제주는 돌도 많고 여자도 많다는데, 진짜일까요? 여러분이 몰랐던 진짜 제주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편집자말] |
"'선생님, 우리 마을을 아세요? 유네스코 보전지역입니다. 저는 우리 마을이 자랑스럽습니다. 함께 지켜 주세요'라고 한 학생이 내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마을을 함께 지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양윤모 영화평론가의 목소리가 이 대목에서 살짝 떨렸다. 법정은 조용해졌다. 그는 52일 단식으로 수척해진 얼굴을 한 채 부축받고 나와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내어 발언했다. 지난 5월 27일 있었던 이 법정 공판에 검사는 그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착한 사람이 부당하게 핍박받는다든가, 그래도 결국에는 악당과 싸워 정의가 이긴다든가 하는 일은 그동안 영화 시나리오를 공부하는 동안 봤던 가장 흔한 이야기였다. 시나리오에서는 늘 선과 악을 만들고 극적인 갈등을 설정한다. 법정 스토리도 많이 다루어지는 소재 중 하나다.
하지만 목숨을 담보로 감옥에서 52일 단식하고 법정에 나와, 왜 강정 주민과 함께 해군기지를 반대하게 되었는지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리고 거기에 무표정한 얼굴로 징역을 구형하는 검사의 목소리를 '현실에서' 듣는 순간, 나는 미안했다. 한없이 미안했다.
나는 강정마을에 한 없이 미안하다
5월 19일 강정마을에서 올린 한 트윗에는, 쇠사슬을 담은 사진이 하나 있었다. 200여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바리케이드를 해체하고 주민 8명을 연행해 간 날이다. 강정에 내려갔을 때 "그 쇠사슬 사진은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현장에 계신 분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경찰이 강정마을 투쟁의 주요 활동가인 송강호 박사를 연행해가려고 하자 그는 바리케이드에 연결된 쇠사슬을 자신의 목에 감은 뒤, 자물쇠를 채워 열쇠를 자갈밭 속에 던져 버렸단다.
경찰은 당황해 하며 연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경찰은 다른 활동가인 최성희씨만 연행했고 주민은 자갈밭 속에서 열쇠를 찾아 쇠사슬을 겨우 풀었다.
며칠 뒤, 급하게 해군을 저지하러 가는 길에 한 주민 아저씨의 오토바이에 올라 탄 적이 있다. 뒷자리에 앉아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는데, 붉고 낡은 옷 밑으로 오랜 싸움으로 지친 왜소한 어깨가 느껴졌다. 현장을 지키는 오랜 기간 동안 모든 지킴이들의 밥을 계속 해주시는 분이다. 혼자서 그 일을 꾸준히 했으니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굴착기 밑에도 누웠었고 경찰에도 연행되어 다녀오셨던 분.
그분의 어깨에 손을 얹지 않았다면 이토록 미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평화에 대한 거창한 이념 때문도 아니고 환경보호에 대한 신념 때문도 아니다. 강정마을의 싸움을 외면하지 못한 이유는 단지 '쇠사슬'과 지친 어깨의 그분이 해주시던 '밥' 그리고 영화평론가의 목멘 목소리가, 아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강정마을의 싸움은 애초에 그런 모습이었다. 투박하고 절박했다. 그런데 여기에 트위터와 스마트폰이 가세하여 마법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4월 초 한 영화감독 부부가 그곳에 정착하면서 부터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점점 사람들이 지쳐서 하나 둘 떠나가고 있었어.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거야. '개척자' 사람들과, 김세리씨와 조성봉 감독이 온거야."한 주민 아저씨는 그렇게 소회하신다. 이곳의 트위터 통신원이 된 김세리씨(@kimseriiii) 의 트윗 몇 개는 강정의 싸움을 바꾸었다. 굴착기가 구럼비 바위를 뚫던 날, 강정마을이 위급하다는 그의 트윗을 보고 스물여섯 살 한 청년은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며칠 후면 대학 중간고사 시험이었다고 하던 청년. 그때 그 짧은 시각, 고작 한 명 달려간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그 청년의 행동은 그날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을 강정마을로 달려가게 했다.
제주도로 혼자 달려가는 법을 배웠습니다나는 그 청년에게 '그냥 혼자 달려가는 법'을 배웠다. 단체에 속해있지도 않고, 기자도 아니고, 또 실질적으로 무엇에 도움이 될지도 몰랐지만,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나도 망설이지 않고 제주행 비행기표를 끊었던 것이다.
그때 그 청년이 혼자 켰던 촛불은, 사람들이 하나 둘 켜기 시작하여, 백 개의 촛불이 되어 돌아왔다. 그 촛불 하나 함께 켜면 어떠한가. 아픔에 공감해서, 그리고 미안해서, 그 공감의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은 멋진 일이 아닌가. 그래서 운동가도 활동가도 아니었던 나는, 트위터에서 만들어진 '강정당' 당원이 되었다.
해군이 올레 7코스를 펜스로 막으려 했을 때, 그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쓰러진 푯말을 일으켜 세우며 세리씨와 나는 결심했다. 강정을 멋진 관광지로 널리 알려야겠다고.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오게 해야겠다고. 때마침 '브랜드 마케팅'을 위한 재능기부를 해주시겠다는 분이 나타났다. 강정마을 로고와 배지, 그리고 자동차에 붙일 수 있는 스티커가 나왔다. 한 사람이던 트위터 통신원이 둘이 되었다.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게스트하우스와 업소가 제주도에 하나 둘 생겼다. 강정당이 생기고 얻은 작지만 멋진 성과였다.
지난 5월 23일 강정당 주최로 서울 대한문 앞에서 열린 '절대보전지역 해제 직권취소 서명' 번개 행사 역시 희망을 불어넣었다. 반나절 동안 1000명의 서울시민이 서명을 했다. '날라리 외부세력'과 함께 길가에서 현수막을 펼쳐놓고 직접 글을 쓴 것이 효과적이었다. 돌담 밑에서 직접 페인트를 섞어 쓰고 있으니, 지나가던 어린이들도 서로 자기가 쓰겠다고 붓을 들었고, 사람들은 펜을 들었다.
짧은 기간 동안의 놀라운 변화였다. 4월 말에 처음 방문했던 강정마을과 5월에 방문한 강정마을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사람의 인적이 드물던 구럼비 바닷가가, 전국에서 날아온 현수막으로 덮였고, 해군이 본격적인 강제 철수를 예고하던 날엔 백 명이 넘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감했고, 지지했고, 또 그것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세상이 변하는 게 느껴진다. 분명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