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가 들을 수 있다면… 유미야! 아빠가 해냈어! 약속을 지켰어!"황상기(56)씨가 '딸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기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유미가 살아 있을 때, 병에 걸려 힘들어할 때, '너의 병은 개인의 질병이 아니고 삼성 때문에 생긴 병이라는 걸 밝혀내겠다'고 약속했다"며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돼 기쁘다"라고 말했다.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딸의 병이 산업재해로 인한 것이라 주장하며 삼성에 맞서기 시작한 지 4년. 지난 23일 서울행정법원은 "백혈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황유미씨의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처음 백혈병이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순간이다.
당일 오후 내내 황씨는 연락이 잘되지 않았다. 저녁 느지막이 걸려온 전화에서 그는 "사람들 하고 오랜만에 술 한잔했다"며 "인터뷰는 내일 하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24일 오전 이른 시간에 다시 통화할 때도 그는 "지금 손님이 타셔서 조금 후에 전화하겠다"고 말했다. 다시 통화를 하게 됐을 때 '손님이 좀 있냐'는 질문에 그는 "없어요, 워낙 불경기라"며 여느 택시기사들과 다름없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택시를 운전했고 딸의 죽은 이유를 밝혀낸 다음 날도 어김없이 택시를 몰았다. 그 택시에서 딸 유미씨가 세상을 떠났다. 2007년 3월 6일 유미씨(당시 23세)는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강원도 속초 집으로 향하던 길에 아버지 황상기씨 차에서 숨을 거뒀다.
지난 2003년 10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유미씨는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에 입사했다. 그가 일한 3라인은 반도체 원판을 화학물질 혼합물에 담갔다 빼는 작업으로, 일을 시작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유미씨는 백혈병에 걸렸다. 2005년부터 구토와 피로, 어지럼증이 찾아왔고 그해 6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와 함께 같은 일을 하던 이숙영씨는 2006년 역시 같은 병으로 숨졌다.
"10억 주겠다는 회유, 딸과의 약속으로 버텼다"
딸이 죽고 난 후 남겨진 아빠는 그 죽음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딸과 비슷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고 실제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삼성반도체 집단백혈병 진상규명 대책위'가 구성됐다. 피해 유가족과 그들을 돕는 각계 인사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삼성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질병에 걸린 사례를 제보받게 되는데, 흑생종, 육아종 등의 희귀병부터 뇌종양과 각종 혈액암 등의 중증 질병까지 발견됐다. 지금까지 삼성반도체와 LCD 등 전자업체에서 접수된 피해제보 수는 124명으로, 그중 46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대책위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이라는 반도체 산업 전반의 산업 재해에 대처하는 단체로 확대됐다. 이들은 유미씨를 비롯해 18명의 피해자들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냈지만 번번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불승인 결정이 내려졌다. 2007년 산업안전관리 공단이 역학조사에 나섰지만 이 역시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피해자들이 산재 이유를 증명해 내야 한다는 다소 황당한 상황들이 벌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법원의 판결은 지난 4년 동안 황씨를 비롯한 유가족들과 반올림 활동가들이 만들어낸 의미 있는 성과라 할 수 있다.
황씨는 판결이 나오는 순간 "유미가 병에 걸려 아파하던 시간, 회유하고 협박하던 삼성과 싸우던 시간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산재를 인정받지 못한 나머지 세 유가족들과 관련 "2007년에 진행된 역학조사가 제대로 됐다면 이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유해물질 일부에 대해서는 조사를 안 했고, 조사해 놓고도 영업비밀이라고 결과 발표를 안 하는 부분도 있다"고 지적했다.
황씨는 "삼성 관계자가 10억을 줄 테니까 아무도 만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회유했지만, 돈보다 유미와 약속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아래에 그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했다.
"그동안 용기없어 신고 못 한 분들이 나서 주길"
- 판결이 나올 때 기분이 어땠나?"유미가 병에 걸린지 6년이 넘게 흘렀다. 그 6년 가운데 병을 치료하는데 보낸 시간이 2년이었고 나머지는 삼성하고 싸우는 시간이었다.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유미가 병에 걸려 힘들어했던 시간, 회유와 협박만 해대던 삼성과 싸웠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 삼성의 회유와 협박이라는 게 어떤 거였나? 어떻게 견뎠나?"2007년 9월 6일에 산업안전관리공단에서 역학조사에 들어갔는데 참관인으로 참석했다. 나는 전문가도 아니니 역학조사가 뭘 보는 건지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조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는데 삼성 직원 하나가 정문 앞에서 나를 회의실로 데리고 갔다. 그 사람이 커피를 타놓고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다가, 대뜸 '10억을 해 드릴 테니까 아무도 만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했다. 이 문제가 관심을 끌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 후로도 몇 번은 더 있었다.
나는 그것보다 유미하고 한 약속이 중요했다. '네 병이 개인의 병이 아니라 삼성 때문에 일어난 산업재해라는 걸 밝히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 때문에 회유와 협박도 다 이기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 재판이 있던 날도 삼성 본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승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그날도 1인 시위를 하다가 몸싸움이 일어났다. 그러다 넘어졌는데 덩치가 산만한 경비들이 다리로 내 목을 바싹 조였다. 정말 엄청 악랄한 놈들이다. 사실 재판은 어떻게 될지는 모르고 갔다. 하지만 삼성이 그러면 그럴수록 승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갔다.
- 승소하지 못하신 분들이 있다. 무엇이 문제였나?"산업안전관리공단의 공정성을 잃은 역학조사가 문제다. 그분들 대부분은 2005년 이전에 병에 걸려 사망했다. 역학조사는 2007년, 2008년에 진행됐다. 병에 걸려 죽고 난 다음 몇 년이 지나고 조사가 된 거다. 기흥공장 3라인은 없어졌고 온양공장도 작업환경을 다 바꿔놨다. 그리고 조사에는 공정성이 가장 중요한데 피해자 측에서 인정하는 산업안전보건의를 참여시켜 달라는 요구는 묵살하고, 그것도 삼성이 들어오라는 날짜에, 삼성이 준 자료만 가지고 한 조사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 그 후로는 백혈병과 삼성 공장과 관계를 우리가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에 산재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무슨 수로 그걸 밝힐 수 있나? 예전에 잘못된 역학조사는 무효로 해야 한다."
- 재판에서 승소하기까지 함께한 다른 유가족들과 반올림 활동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우선, 이번 재판을 계기로 그동안 용기가 없어서 신고를 못 하신 분들이 반올림에 신고해서 모두가 산업재해 판정을 얻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더 똘똘 뭉쳐 싸울 거다. 반올림 활동가, 유가족 모두 열심히 노력해서 오늘 같은 결과가 있었다. 아직 삼성이라는 회사는 너무 크고 반올림은 조금 약하다. 이 일에 공감하는 다른 분들이 힘을 보태서 더 큰 힘을 가지고 더 큰 싸움을 이겨 나가길 바란다."
- 딸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나?"유미가 이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유미야 아빠가 해냈다! 약속을 지켰다!'고 말해주고 싶다. 네 병은 너 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