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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이 덥수룩하게 길면 더워 보이나?"
"아휴 당연하지. 한여름에 수염 길면 더워 보이고 답답해 보여."

수염 얘기를 꺼냈더니 아내가 이맛살까지 찌푸려 가며 손사래를 칩니다.

"나는 한여름에 넥타이 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덥고 답답해 보이더라."
"그 사람들이 보면 인효 아빠가 얼마나 답답하겠어?"
"피장파장이지 뭐. 그래도 나는 여름에는 지금처럼 적당히 깎고 다니잖어."
"안 그럴 때도 있잖아, 인효 아빠는 지금처럼 적당히 깎고 다니는 게 좋아, 수염이 너무 길면 그렇잖아도 큰 얼굴이 더 커 보이고 머리까지 장발에다가, 어휴 정신없어…."
"그래도 곰순이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지."

우리 집에서 수염이, 아니 털이 긴 놈이 또 있습니다. 우리 집 개 곰순이 입니다. 녀석은 온몸이 긴 털로 뒤덮여 있어 흰 눈자위가 보이거나 입을 쩍 벌리고 있을 때 사진을 찍어야 겨우 얼굴 윤곽이 잡혀 나옵니다. 혓바닥까지 까맣게 보이는 녀석이기에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가늠하기 힘듭니다.

여름, 개도 나도 털갈이의 계절입니다

 30년 가까이 털보로 살아온 나. 덥수룩한 수염에 장발을 하고 다니면 털 많은 우리집 곰순이를 닮았다고 합니다. 녀석도 나처럼 쳐진 눈매가 쳐져  있거든요.
30년 가까이 털보로 살아온 나. 덥수룩한 수염에 장발을 하고 다니면 털 많은 우리집 곰순이를 닮았다고 합니다. 녀석도 나처럼 쳐진 눈매가 쳐져 있거든요. ⓒ 송성영

녀석은 더위가 시작되면 본능적으로 털갈이를 합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곰순이 녀석이 털갈이를 할 무렵이면 1년 내내 길었던 머리를 짧게 다듬거나 아예 삭발합니다. 긴 수염도 적당히 다듬곤 합니다.

아내와 수염이 어쩌니 저쩌니 주고받고 있는데 작은 아들 인상이 녀석이 빙그레 웃습니다.

"왜 웃어 인마, 너 아빠 수염 깎은 거 본 적이 있나?"
"한 번도 본 적 없어."
"아빠가 수염 없는 맨 얼굴이라면 어떨 거 같혀?"
"상상이 안 가. 아빠 수염 깎구 형아 한티 가면 아마 못 알아 볼 걸?"

우리 식구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역시 털보인 내가 수염을 밀고 다닌다는 것이 상상이 가질 않는 모양입니다. 얼마 전 우리 집에 찾아왔던 시 쓰는 최은숙 후배가 그럽니다.

"강병철 선배에게 송 선배가 수염을 깎았다고 말했더니 뭐라고 말 한 줄 알세요. 송성영이 수염 없는 것은 목 자르는 거나 같대요."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기 위해 수염을 짧게 다듬었다고 말했던 것이 와전되어 내가 수염을 아예 싹 밀어 버렸다고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까이서 나를 뻔히 지켜보고 있는 강 선배만큼은 그 말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살 떨리게 목숨까지 내놓고 수염을 고집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강 선배의 말이 맞습니다. 온몸의 털을 왕창 밀어낸 곰순이가 상상이 가질 않듯이 수염 없는 맨 얼굴, 내 자신조차 쉽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한여름에 덥거나 말거나 30년 가까이 털보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콧수염, 턱수염 구레나룻 할 것 없이 털로 뒤덮여 있는 털 복숭이 입니다. 군대를 제대하고부터 줄곧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이후로 면도를 했던 기억이 언제였던가 싶을 정도로 까마득합니다. 결혼식 전날 얼굴에 털 한 올 남기지 않고 왕창 밀었던 이후 단 한 번도 면도칼을 대본 적이 없습니다. 1년에 서너 차례 수염이 너무 길다 싶으면 가위로 짧게 다듬었던 것이 전부였습니다.

간혹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묻곤 합니다.

"수염을 기르는 이유라도 있나요?"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는데요."

무책임한 답변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수염을 왜 기르는지 내 자신도 잘 모릅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수염을 기르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얼굴에 털이 자꾸만 솟아나기 때문에 털보가 된 것 뿐이니까요.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그냥 깎기 귀찮아서요."

맨 얼굴의 수염은 하루 이틀 만에 꺼칠꺼칠 해집니다. 수염을 손대기 시작하면 거의 매일 같이 면도칼을 대야 합니다. 그렇잖아도 느려터진 놈이 그렇게 바지런할 자신도 없고, 얼굴에 날카로운 칼을 대기도 싫고 하여 그냥 내 버려두는 것입니다.

인상이 말대로 우리 집 아이들은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수염 없는 맨 얼굴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녀석들이 부모 결혼식장에 찾아올 리 만무하니까요. 아, 결혼식 비디오나 사진을 통해서는 당연히 봤겠지요. 어쨌든 지 애비의 맨 얼굴을 사진을 통해서만 보아왔던 녀석들이 어렸을 때 종종 묻곤 했습니다.

"아빠, 다른 아저씨들은 이상 혀, 왜 수염을 기르지 않는 겨?"

보통 아이들이 나처럼 털보 아저씨를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보고 있듯이 우리 집 아이들은 수염 없는 아저씨들을 낯설게 보곤 했던 것입니다. 

'파르라니' 깎은 수염에 여자들이 반한대서...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어 코밑이 제법 거뭇거뭇해졌지만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코밑 솜털을 자랑삼아 내보이던  큰 아들 송인효 녀석. 그 무렵부터 코밑에 면도칼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어 코밑이 제법 거뭇거뭇해졌지만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코밑 솜털을 자랑삼아 내보이던 큰 아들 송인효 녀석. 그 무렵부터 코밑에 면도칼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 송성영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어 코밑이 거뭇거뭇해 진 큰 아이 인효 녀석. 녀석이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코밑 솜털이 제법 무성해 지기 시작하자 한동안 거울 앞에 살다시피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빠처럼 수염이 많이 날 수 있는 겨?" 
"수염을 계속해서 깎다보니까 저절로 그렇게 된 겨."

아무 생각 없이 말했는데 녀석이 어느 날인가 삼촌이 놓고 간 면도칼을 꺼내 코밑 솜털을 슬금슬금 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전자전이었습니다. 녀석은 나보다 한두 살 빠른 시기에 '면도'를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내가 큰 형님의 면도기를 몰래 훔쳐 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였으니까요.

중학교 국어 시간이었습니다. 조지훈의 시 '승무'에 보면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파르라니'가 문제였습니다. 국어 선생님께서 '승무'를 가르치면서 아마 이런 식으로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남자가 수염을 깎고 나면 그 자리가 파르라니 하여 그 모습을 여자들이 아주 좋아 하지, 멋진 남자로 말야. 너희들도 다음에 성인이 되면 수염이 나게 될 것이고 그 모습에 여자들이 반하게 될 거다."   

수염에 남자의 향기가 묻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창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나는 그 말에 홀딱 넘어가 거뭇거뭇해져가는 코밑을 어루만져가며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나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국어 선생님께서는 친절하게도 그 간절한 소원을 하루 빨리 앞당길 수 있는 해답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면도를 자주 하다 보면 수염이 더 빨리 자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그날 이후 큰 형님이 애지중지 아끼는  면도기를 몰래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성자들이 흔히 쓰는 말씀이 있잖습니까? '마음먹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리라'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그 '파르라니'라는 단어 하나에 온 마음을 모아 중학교 때부터 부지런히 면도한 덕분에 평생 털보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내 수염에 반한 여자들이 있기나 했던 것일까 싶지만요.

수염 좀 길렀을 뿐인데, 치한 취급은 좀 너무하잖아

 머리는 1년에 한번 깎고 수염은 몇 개월에 한번씩 가위로 다듬고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덥수룩한 수염과 장발로 인해 '남자의 향기'는 고사하고 검문검색의 단골 손님이 된 것 물론이고 예기치 못한 온갖 편견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머리는 1년에 한번 깎고 수염은 몇 개월에 한번씩 가위로 다듬고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덥수룩한 수염과 장발로 인해 '남자의 향기'는 고사하고 검문검색의 단골 손님이 된 것 물론이고 예기치 못한 온갖 편견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 송성영

뒤돌아보면 수염을 통해 만났던 여자들보다는 수염에 대한 세상 편견 때문에 곤혹을 치러야 했던 일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수염을 본격적으로 기르기 시작한 것은 군대 제대하고 늦깎이 대학생이 되고 부터였습니다.

하지만 수염 덕분에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싸가지 없다는 눈총을 받아왔고 그 흔한 미팅 한번 못해봤습니다. 맘에 드는 독문과 여학생이 있었는데 수업을 마치고 뒤 따라가 수줍게 얼굴 붉히며 "커피라도 한 잔 하자"니까, 수염이 덥수룩한 나를 보고 기겁을 하며 치한 취급을 하더군요.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사실 그 여학생이 나보다 더 조숙했습니다. 어느 날 극장 앞에서 나보다 더 나이 많은 남자와 다정하게 영화 <뽕>을 보고 나오는 그 여학생과 딱 마주쳤던 것입니다. 나는 여학생 손 한번 잡아 보지 못한 맹추였는데 말입니다.

낯뜨거운 일이 어디 그 뿐이었겠습니까? 후배들과 어울려 야유회라도 가면 난데없이 '교수님' 취급을 당하곤 했습니다. 나하고 두세 살 많은, 군대를 면제 받았다는 젊은 교수가 나보다 더 젊어 보였으니까요. 그럼에도 나는 수염을 깎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구요? 적어도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려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거듭 밝히지만 수염 때문에 미팅조차 못했으니까요. 지금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아마 중학생 때부터 죽어라 면도질을 해놔서 면도에 팍 질려 버렸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염 때문에 난감 했던 일도 많았습니다. 언젠가 전철 안에서 자리를 양보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두터운 안경을 낀 여학생이 수염이 텁수룩한 나를 올려다보더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설 생각을 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앉으세요."

당시 40대 초반이었던 나는 너무나 난감해 못 들은 척 공연히 창밖을 끼웃거리며 딴청을 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염 때문에 그렇지, 아직 어려유"

나이 오십이 되면서 흰 수염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전남 고흥으로 이사와 동네 아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미술을 가르치는 아내의 아이들도 찾아왔습니다. 녀석들 중에는 턱수염이 허연 나를 할아버지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기야 20대 중후반에 대학생이 되어 교수님 소리를 들었고 40대 초반에 자리를 양보 받았으니 50대에 들어서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 놈의 수염 때문에.

몇 년 전 충남 공주에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실시했던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조사 작업에 참여한 일이 있습니다. 계룡산 자락의 한 마을, 증언을 채록하기 위해 둥구나무 그늘 아래에서 90세 넘은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동행했던 사람이 장난삼아 말했습니다.

"이 사람 수염 좀 보세요. 나이가 얼마나 된 것 같으세요?"
"글쎄, 육십은 넘었을 것이고…."
"맞아요 할아버지! 이 사람 육십이 훨씬 넘었어요."
"그래도 아직 한 참 어리구먼."
"아이구!"

내 입에서는 아이구, 소리가 비명처럼 흘러 나왔습니다. 그 놈의 수염이 뭔 죄가 있다고 참말로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여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나이를 따져야 하는 술자리에 앉게 되면 미리 이실직고 합니다.

"아이구, 수염 때문에 그렇지, 아직 어려유. 인저 오십 갓 넘었슈."

그렇게 말하면 다들 술이 확 깨는 표정들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털보인 나를 쉽게 기억해 냅니다. 어디 가서 나쁜 마음을 품기 어렵습니다. 그 놈이 누구라는 것이 금방 표가 나기 마련이니까요. 그렇게 때로는 수염을 통해 내 스스로를 지켜 나가기도 합니다. 또한 늘 허방다리 집는 저들에게 검문검색을 당할망정 넥타이 정장차림으로 화장품 찍어 발라가며 자본가들에게 목을 매지 않아도 되는 수염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아, 털에 대해 한 가지 덧붙일 게 있습니다. 덥수룩한 수염이 여름에는 더워 보이고 답답해 보일지 모르지만 아무리 추운 겨울 날씨라 할지라도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적어도 턱밑 부분만큼은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거든요.


#털보#편견#검문검색#도사#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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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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