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어느날, 송인준 전 헌법재판관(현 <아시아투데이> 회장)과 '노 사장'이 마주 앉았다. 고민이 많았던 노 사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대북사업을 열심히 해왔는데 이명박 정부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막막합니다."대검 강력부장을 지냈던 송 전 재판관이 그런 노 사장에게 '새로운 길'을 제안했다.
"지금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어요. 그런데 노년층을 소비자로 보는 시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노년층을 상대로 한 불법·부당 판매행위나 늘어나고 있어요. 그런 일을 감시하고 노년층의 권익을 증진하는 단체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노 사장의 멘토(mentor) 송 전 재판관의 제안은 오랫동안 대북사업을 해왔던 노 사장을 노년소비자운동으로 이끌었다. 북한을 수십 차례 드나들던 '대북사업가'가 '시민운동가'로 변신한 셈이다.
대북사업은 그의 운명... '황장엽 망명사건' 배후로 지목되기도노정호 현 한국노년소비자연합(약칭 '한노연') 사무총장은 지난 1990년 '씨피코국제교역'이라는 대북무역업체를 설립했다. 그는 독특한 대북사업수완을 발휘해 나진·선봉 경제특구에 철조망을 공급하는 계약을 따냈다. 국내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나진·선봉 경제특구에 물품을 공급하는 것이어서 <조선>과 <중앙> 등 국내 일간지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노 사무총장의 대북사업능력은 시대를 지나치게 앞선 것이었다. 그는 "당시 시대에 비해 너무 앞선 사업이었다"며 "철조망 대금과 대북사업 활동비 등을 포함 총 100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그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이후 대북사업의 미련을 떨치지 못한 노 사무총장은 '북한 주민 일손 주기 운동'을 펼쳤다. '북한 주민 일손 주기 운동'은 씨피코국제교역이 보낸 폐지로 북한 주민이 찻잔 받침대를 제작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새로운 대북지원방식으로 호평을 받았다. '고기를 그냥 주기보다는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자'는 <탈무드>의 지혜를 북한주민돕기운동에 적용한 사례였다. 그는 이 운동의 주역으로 주간지 <시사저널>의 표지를 장식했다.
그런 와중에 노 사무총장은 뜻하지 않게 '황장엽 망명사건'에 연루돼 유명세와 함께 고초를 치러야 했다. 남북으로부터 황장엽 망명사건의 배후주역으로 몰린 것이다. 그가 사건이 터지기 전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수양딸인 박명애씨와 황 비서의 망명동지 김덕홍씨 등을 통해 대북사업을 해온 탓이었다.
노 사무총장은 "박명애씨를 통해 황 비서와 김덕홍씨의 도움을 얻어 대북사업을 해왔다"며 "그런데 정부가 (망명사건과 무관한) 나를 망명사건의 주역으로 언론에 흘리는 바람에 1년여 동안 도망다녔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대북사업은 노 사장의 '운명'이었다. 그는 2000년 이후 '장생기업'이라는 건강식품회사를 설립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북한에서 약초 등을 수입해 건강기능식품을 만들어 판매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남북문화교류와 새터민(탈북자) 지원 등을 목적으로 하는 '영통포럼'을 창립했다.
영통포럼은 천태종과 함께 '개성 영통사 성지순례'를 추진했다. 겉으론 남한 주민들이 개성 영통사를 방문한다는 사업이었지만, 선죽교와 숭양서원, 고려성균관 등 북한 유적지까지 둘러볼 수 있었다. 즉 개성관광의 물꼬를 트는 남북민간교류사업이었던 셈이다. 특히 1만 명 새터민들의 자립형 정착촌인 '두리원'(제2의 하나원)의 건립을 주장해 당국과 학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노년층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개성 영통사 성지순례'도 중단되고, '두리원 건립사업'과 관련 뇌물공여 혐의로 6개월간 구속되는 등 위기를 맞았다. 뇌물공여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노 사무총장이 받은 상처는 컸다.
그런 과정에서 송인준 전 재판관을 만나 '노년소비자운동'의 아이디어를 얻어 지난 2009년 7월 '한국노년소비자연합'을 창립했다. 그리고 지난해 1월 노년소비자보호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사단법인 인가를 공정거래위로부터 받았다.
'노년소비자 권익보호운동'을 내세운 한노연은 "기존 소비자 시민단체들이 피해 노년소비자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부수적인 활동에 그치고 있어 노년소비자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단체 설립이 절실하다"고 창립 배경을 밝힌 바 있다.
노 사무총장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대북사업을 펼칠 희망이 사라졌다"며 "그러던 중에 송인준 전 재판관으로부터 '고령화시대 소비자 시각에서 노년층을 바라보라'는 제안을 받고 한노연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출범한 한노연은 지난해 상조업계 고발에 집중했다. 검찰이 '보람상조 횡령사건'을 수사하고 있을 때 최철홍 회장의 구속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56개 부실상조업체를 대검에 고발했다. 올해는 노년소비자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홍보관(일명 '떳다방')의 문제점을 여론화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홍보관을 감시하는 활동뿐만 아니라 홍보관 실태를 조사·평가하는 활동도 펼쳤다. 그리고 최근 월간 <노년소비자>를 창간하기에 이르렀다.
월간 <노년소비자> 창간호에 실린 축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노 사무총장의 인맥이 만만치 않음을 감지할 수 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변웅전 자유선진당 대표,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문수 경기도지사, 안희정 충남도지사, 박영선 민주당 정책위의장과 박선영 자유선진당 정책위원장, 나경원·남경필·원희룡 의원, 박주선 최고위원과 이낙연 의원 등 여야를 아우르고 있다. 특히 앞서 한노연 사단법인 출범 때에는 이명박 대통령 부인인 김윤옥씨가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노 사무총장은 "노년층을 공경의 대상에서 수혜의 대상, 밥을 공짜로 받어먹는 사람들로 바라보고 있다"며 "노년소비자 관련 법이 취약한 상태에서 그런 틈새를 이용해 노년층의 주머니를 빼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 노년소비자 보호단체가 필요함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노년층 문제를 끄집어 내는 것을 싫어하는 분위기다. 그러니 노인들이 스스로 입을 다물어야 하는 처지다. 어느샌가 뒷방늙은이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서글프다."노 사무총장은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노인복지 지출이 매우 낮은 수준인데다가 노년층의 권익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사회지도층들이 노인복지 향상뿐만 아니라 노년층의 권익문제에도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월간 <노년소비자>를 통해 노년소비자의 문제를 세세하게 알려 나갈 생각"이라고 말한 노 사무총장은 "한노연은 '노인의 단체'가 아니라 '노인을 위한 단체'"라고며 "노년층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연령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