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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 콘텐츠 박물관인 이순신 영상관

 이순신영상관
이순신영상관 ⓒ 이상기

이순신 영상관은 고현면 차면리 옛 관음포 해변에 자리 잡고 있다. 영상관 서쪽으로는 광양만이 있고, 광양만 너머로는 1980년대 만들어진 광양제철소 굴뚝이 멀리서도 보인다. 이순신 영상관은 관음포에서 떨어진 큰 별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만든 콘텐츠박물관이다. 1층의 영상관과 2층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1층 영상관으로 가 최후의 전투라는 3D 영상물을 본다.

먼저 요즘 유행하는 검은색 3D 안경을 하나씩 쓰고 영상관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눕는다. 138개 좌석이 있는 돔형 입체영상관으로 전투장면을 좀 더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영상물의 내용은 1598년 11월19일 관음포에서 펼쳐지는 이순신 장군 최후의 노량전투 장면이다. 바다에는 우리 선단과 왜선이 진영을 갖춰 돌진하고, 서로 상대진영을 향해 화살과 화포 그리고 조총을 쏘아댄다. 우리 측의 대장은 이순신 장군이고, 적장은 샤쓰마 번주 시마즈(島津義弘)와 대마도주 소오(宗調信)였다.

 이순신 초상화
이순신 초상화 ⓒ 이상기

노량해전은 왜군이 퇴로를 개척하는 전투였기 때문에 치고 빠지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왜군은 노량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뚫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므로 전투는 관음포에서 노량 쪽으로 이어졌다. 이순신 장군은 이들 퇴각하는 왜군을 따라 선봉에서 공격을 하다 조총에 맞아 쓰러진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지휘권을 조카인 이완 장군에게 넘겨주면서 "전쟁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유언한다.

영상물은 15분 정도로 짧지만 아주 감동적이다. 또 포탄이 마치 내게로 날아오는 것처럼 입체적이다.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인 모습과 우리 수군의 애국적인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이 영상물을 보고 나면 누구든지 장군과 우리 수군을 추모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영상물을 보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2층에 있는 전시관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이순신 영상관의 전이의 장
이순신 영상관의 전이의 장 ⓒ 이상기

전시관은 전이의 장, 이해의 장, 체험의 장, 감동의 장, 추모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이의 장은 전시관으로 들어가기 위한 공간으로 관음포 바다를 내다볼 수 있다. 이곳 창문 옆으로는 '만약 저 원수들을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若殲斯讐 死亦無憾)'라는 문구와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문구가 한자로 적혀 있다.

이해의 장에는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7년간의 임진왜란 이야기가 패널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체험의 장에는 갑옷과 무기, 군선 등이 전시되어 있고, 대형 프로젝터에서는 전투장면이 재현되고 있다. 전시관의 핵심인 감동의 장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어록을 볼 수 있고, 임진왜란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며, 격전의 현장을 느낄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와 난중일기를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조총과 칼
조총과 칼 ⓒ 이상기

그리고 추모의 장에는 후대 사람들이 평가한 이순신 장군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미국의 해군대령 조지 하거만과 칠레의 함장 로드리고 푸엔잘리다의 글이 보인다. 추모의 장을 나오면 길은 자연스럽게 영상관 밖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이락사(李落祠)로 향한다. 이락사는 이순신 장군 같은 큰 별이 떨어져 죽은 것을 추모하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이락사로 가면서 영상관을 되돌아보니, 건물이 거북선을 현대적으로 단순화시킨 모습이다.

별이 떨어진 곳에 세워진 사당 이락사

이락사의 공식 명칭은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사적 제232호)다. 계단을 올라가면 잔디밭에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한자문구가 돌에 새겨져 있다. 다시 계단을 올라 좌우로 도열한 반송을 따라 앞으로 나가면 이락사 내문이 나온다. 문안으로 들어가니 팔작지붕 형태의 비각이 나온다. 이 비각 안에 '충무공 이공순신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충무공 유허비각
충무공 유허비각 ⓒ 이상기

이 비석은 충무공이 순국한 지 234년 후인 1832년(순조 32) 공의 8대손인 이항권이 왕명에 따라 세웠다고 한다. 비문은 예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洪奭周)가 찬하고, 글씨는 형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 이익회(李翊會)가 썼다. 비문의 명(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것도 충무공이고 그 후 나라가 안정된 것도 다 충무공 덕이다.

"굳세고 굳센 충무공은
진실로 우리 동포를 안정시켰도다.
큰 거북을 만들어 건장한 매를 표시하고
그 공(功)을 크게 떨쳤으니
명량(鳴梁)에서 갑옷을 씻고
옥포(玉浦)에서 봉화(烽火)를 그치게 하였도다.
[…] 
공의 공훈(功勳)은 만세(萬世)토록 빛나건만
공은 먼저 돌아가시니
큰 바다 아득히 넘실거리고
만백성이 함께 눈물 흘린다네."

 이충무공 유허비
이충무공 유허비 ⓒ 이상기

비각 밖에는 대성운해(大星隕海)라는 현판이 있는데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다는 뜻이다. 이것 역시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이곳에서 산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첨망대가 있다. 일종의 전망대로 관음포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다음 행선지인 유배문학관으로 가야 한다. 버스를 타려고 주차장으로 가면서 보니 아주머니들이 남해 특산인 마늘을 팔고 있다. 남해군은 우리나라 마늘의 7% 정도를 생산하고 있다.  

남해 유배문학관 찾아가기

남해 유배문학관은 남해읍 남변리에 있다. 유배문학관은 유배문학실, 유배체험실, 남해 유배문학실, 향토역사실로 구성되어 있다. 남해 유배문학관은 유배와 유배문학을 종합적․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전시하는 국내 최초의 문화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유배와 관련된 학습과 체험을 할 수 있다. 또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지거나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남해 유배문학관
남해 유배문학관 ⓒ 이상기

유배문학관으로 들어가기 전 처음 만나는 것은 황소가 끄는 이동식 감옥이다. 수레 위에 기둥을 엮어 만든 것으로 함거(檻車)라고 한다. 또 유배문학관 앞에는 제1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이 패널 형태로 세워져 있다. 김만중문학상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의 삶과 문학이 남해에 유배를 온 사람 중에서는 가장 극적이고 또 문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와 소설 그리고 수필에 능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그는 1689년부터 1692년까지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했으며, 그동안 <서포만필>과 <사씨남정기>를 썼다.

패널 옆으로는 적소(謫所: 귀양살이집)와 연못을 만들어 이들 유배객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연못에는 시간을 낚는 태공의 모습이 보이고, 적소에는 먼 하늘을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이 보인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하늘 아래 이들의 모습이 처연해 보인다. 이들을 보고 나서 나는 유배문학관 안으로 들어간다.

 남해 유배문학관 사물함
남해 유배문학관 사물함 ⓒ 이상기

그런데 나의 시선을 끄는 게 있다. 유배문학관이라고 쓴 사물함이다. 빨간 구름과 학 무늬에 흰색으로 유배문학관이라고 썼다. 그 글씨를 보니 신영복 선생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시대 감옥에서 고생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신영복 선생이다. 붉은색은 일편단심을 나타내고, 흰색은 지조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이디어가 참 좋다. 거기다 실용적이기까지 하다.

유배문학관 로비에서는 목판체험을 할 수 있다.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花田別曲)', 서포 김만중의 '사친시(思親詩)', 약천 남구만의 '제영등금산(題詠登錦山)', 태소 김용의 '노인성(老人星)'이 목판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중 원하는 것을 하나 골라 먹을 묻힌 다음 한지를 얹어 찍어내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 목판공이 '제영등금산'의 가장자리를 조각칼로 정리하고 있다. '금산에 올라 노래하다'는 뜻으로 오언율시로 이루어져 있다.

 약천 남구만 시 목판체험
약천 남구만 시 목판체험 ⓒ 이상기

뺑 둘러 바다 위 산이 떠 있는                        浮海山還有
참된 경치 찾아가니 글 쓰고 싶지 않구나.        尋眞字欲無
암자는 깊어 구름과 함께 잠자고                    菴深雲共宿    
봉화불만 피어올라 달과 함께 외롭구나.          烽逈月同孤    
석굴에선 생황과 퉁소 소리 들리고                 石窟笙簫動    
바위문에는 나비와 벌이 얽혀 있구나.             岩門蝶蜾紆    
아홉 개의 우물을 뚫는데 몇 년이나 걸렸을까   何年穿九井
산정을 뚫어 구슬을 꿴 듯하구나.                   高頂貫聯珠

서포 김만중 이야기

 서포 김만중의 사친시
서포 김만중의 사친시 ⓒ 이상기

서포 김만중은 남해에서 어머니를 그리는 '사친시'를 지었다. 서포가 이 시를 쓰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문집에서 뺄 생각을 다 했겠는가? 서포는 남해 유배 첫해인 1689년 9월25일 '사친시' 3편을 썼다. 이들은 모두 칠언절구로 그 중 하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워 글을 쓰려 하나,          今朝欲寫思親語
글을 쓰기도 전에 눈물만 가득하구나.               字未成時淚已滋
몇 번이나 붓을 적셨다 다시 던졌던가,              幾度濡毫還復擲
남해에서 쓴 시는 문집에서 빼야 마땅하겠구나.  集中應缺海南詩

 매화나무 두 그루
매화나무 두 그루 ⓒ 이상기

서포는 1692년 4월 30일 이곳 남해에서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5월에야 아들 김진화에 의해 남해땅을 떠나게 되었다. 시신이 떠난 후 서포의 사위인 이이명이 남해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장인이 거처하던 곳에 들르게 되었다. 사람이 없는 집은 황폐해졌고, 매화나무 두 그루만이 자라고 있었다. 이에 이이명은 매화나무를 자신의 거처로 옮겨 심었다.

그 후 매화나무는 밝고 곧은 자태로 자라났고, 이에 이이명은 매화를 노래한 '매부(梅賦)'를 지었다고 한다.

"장인의 기운을 닮아 상통하니, 매화나무가 나를 보고 장인을 본듯 살아났다."

매화나무를 통해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애틋한 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영상관#이락사#유배문학관#약천 남구만#서포 김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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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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