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국회 환경노동위(위원장 김성순 의원) 회의실. 이곳에서는 오전 10시부터 '한진중 청문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공격수'인 국회의원들이 절반 이상 자리를 비웠다. 한나라당 의원 전원과 야당 의원 일부가 불참한 것이다. 결국 민주당·민주노동당 의원들만 청문회장을 지켰다.
그런데 한나라당 의원들만 불참한 게 아니었다. 핵심 증인인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도 '해외출장'을 이유로 청문회에 나오지 않았다. 증인석에는 조 회장의 명패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날 청문회에는 이재용 한진중 사장과 박유기 민주노총 금속노조 위원장, 최우영 한진중 노조 사무장만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한진중 청문회는 시작한 지 1시간도 안 돼 끝이 났다. 청문회를 '개회'하긴 했지만 사실상 '무산'된 셈이다. 이렇게 청문회가 무산된 것과 관련, 6개월간 지속된 한진중 사태를 직접 해명해야 할 조 회장의 책임이 제일 크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조 회장은 줄곧 '도피성 해외출장'이라는 의심을 받아왔는데, 그것을 뒷받침해줄 만한 '정황'이 포착됐다.
19일 "참석하겠다" 했다가 20일 "해외출장 때문에 어렵다" 통보국회 환경노동위는 지난 4월 ▲ 한진중 정리해고 ▲ 현대차 사내하청 ▲ 쌍용차 정리해고자 자살 ▲ 전주 버스파업 등을 '4대 노동현안'으로 규정하고 국회청문회를 열기 위해 표결에 부쳤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반대로 '4대 노동현안 국회 청문회'는 무산됐다. 삼성 반도체 백혈병 발병문제와 관련한 '산재제도개선 소위'도 구성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여야는 '한진중 청문회 카드'로 타협했다. 6월 22일에 열리는 국회 환경노동위 전체회의에 조남호 회장 등 한진중 노사를 참고인으로 부르고, 이것이 무산됐을 때 27일 국회 청문회를 연다는 데 여야가 합의한 것이다. 6월 17일에 이루어진 타협이다.
한나라당이 이러한 타협안에 합의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남호 회장은 청문회 증인보다는 참고인 출석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한나라당도 조 회장으로부터 '참고인 출석' 가능성을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조 회장이 참고인으로 출석하면 자동으로 국회 청문회는 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국회 환경노동위 한나라당 간사인 이범관 의원은 6월 19일 "조 회장은 오는 22일 열리는 국회 환경노동위 전체회의에 참고인으로 출석할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이에 최우영 한진중 노조 사무장은 "조남호 회장과 노조가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현재의 극심한 노사갈등이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범관 의원이 조 회장의 참고인 출석 의사를 전한 다음날인 20일, 상황은 급반전됐다. 조 회장은 이날 국회 환경노동위에 보낸 공문을 통해 "6월 17일부터 7월 2일까지 일본·홍콩·유럽 등을 출장하게 돼 국회 환경노동위 참석이 어렵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22일 전체회의는 물론이고 27일 국회 청문회에서 참석할 수 없다는 '통보'인 셈이다. 이를 두고 부산 영도구가 지역구인 김형오 한나라당 의원조차도 "매우 고의적인 도피성 출국"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최초 예정됐던 6월 27일 청문회는 무산됐고, 이틀 뒤인 29일로 연기됐다. 그 사이에 정리해고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불충분한 노사합의'가 이루어졌다. 조 회장은 6월 29일 청문회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한나라당도 '불충분한 노사합의'를 이유로 전원 불참했다. 앞으로 한진중 청문회는 기약할 수 없게 됐다.
김성순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은 "야당에서 조 회장을 고발하겠다고 하는데 지금 상태에서는 고발하기 어렵다"며 "7월 2일까지 해외출장을 간다고 미리 통보했는데 국회가 6월 29일 청문회를 강행해버렸기 때문에 고발사유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김 위원장은 "한진중 노사가 합의했다고 하지만 정리해고문제라는 핵심사안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며 "9월 정기국회에서 한진중 사태를 따지고, 조 회장을 국정감사의 증인으로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20일 면담 일정, 참고인으로 출석해야 하는 22일로 '갑자기' 변경
그런데 한진중 청문회가 무산되는 과정과 조 회장의 해외출장 일정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수상한 정황이 발견됐다. 먼저 출국시기부터 '도피성 해외출장 의혹'을 살 만하다.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조 회장의 '일자별 출장계획'에 따르면, 조 회장은 6월 17일 오후 4시 25분 일본으로 출국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오전 여야가 '22일 국회 환경노동위 전체회의에 조 회장을 출석시키고, 이를 거부했을 때 27일 청문회를 실시한다'는 데 합의한 직후였다.
또한 조 회장이 6월 17일 해외출장을 위해 출국해놓고 6월 20일에서야 '참고인 불출석'을 국회 환경노동위에 통보한 점도 석연치 않다. 해외출장 때문에 참고인 출석이 어려웠다면 여야 합의가 이루어진 17일 직후에 '해외출장' 사실을 국회에 적극적으로 알렸어야 했다. 그래야 참고인 출석이나 청문회 개최 시기를 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여야가 합의한 지 3일 뒤에야 '해외출장' 사실을 처음 공개했고, 전체회의 불참도 국회에 통보했다.
앞서 언급한 '일자별 출장계획'에 의하면, 처음부터 조 회장은 국회 환경노동위 전체회의나 한진중 청문회에 참석하기는 어려웠다. 전체회의와 한진중 청문회가 열릴 예정이었던 6월 22일과 27일, 29일에는 각각 JFE와의 면담(일본), 홍콩에서 런던으로 이동, NSC와의 면담(영국)이 계획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6월 19일 이범관 한나라당 의원은 "조 회장은 오는 6월 22일 열리는 국회 환경노동위 전체회의에 참고인으로 출석할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조 회장과 교감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 의원은 이 발언 자체를 부인했다.
이 의원은 지난 1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조 회장과 연락한 적이 없다"며 "(조 회장이 참고인으로 출석하겠다고 밝혔다는) 언론보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 회장은 6월 20일 국회 환경노동위 행정실로 공문을 보내 불출석을 알려왔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김성순 위원장은 "조 회장이 이범관 간사를 통해 전체회의에 출석하겠다고 했다"며 "전체회의에 안나오면 청문회를 열겠다고 하니까 청문회에 안 나오려고 전체회의에 나오겠다고 한 것인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 같다"고 설명했다.
조 회장이 하루 만에 출석의사를 뒤집은 것은 물론이고, 그의 출석의사를 처음 전달했던 이 의원이 여러 언론에 보도된 자신의 발언 자체를 부인하는 것도 석연치 않다. 게다가 조 회장이 해외출장 일정을 변경한 대목에서도 의심스러운 정황이 발견됐다. 그는 원래 6월 20일 일본의 철강기업인 JFE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JFE 방문이 6월 22일로 미뤄졌다. 공교롭게도 6월 22일은 그가 참고인 자격으로 국회 환경노동위에 출석해야 하는 날이었다.
한진중 "예정된 해외출장... 도피성 출국은 사실 아니다"국회 환경노동위의 한 관계자는 "지난 6월 17일 조 회장의 '6월 22일 참고인 출석'을 의결한 것은 조 회장이 출석한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그것을 의결한 날 바로 출국하고, 갑자기 불출석을 통보한 것은 '도피성'이라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한진중공업의 한 간부는 "예정된 해외출장이기 때문에 '도피성'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다"며 "일본·홍콩·영국 등에서 외국 선사들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 간부는 "조 회장은 (국회 환경노동위 전체회의에 참고인으로) 참석하겠다는 얘기를 한 적 이 없다"며 "(처음 참석의사를 전했던) 이범관 의원 쪽에서도 '우리도 그런 의사를 전달받은 적이 없는데 그런 보도가 나와서 곤혹스럽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 간부는 조 회장의 해외출장 국회통보가 늦은 것과 관련 "국회 환노위에서 6월 17일 조 회장의 '참고인 출석'을 결정했더라도 출석요구서가 우리 쪽에 전달되는 것은 그 이후 아니겠느냐"라며 "다만 출석요구서가 언제 전달됐는지는 모르겠다"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