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다. 이맘때면 시원한 계곡에 앉아 발 담그고 재미있는 소설책 한 권 손에 잡고 독서삼매경에 빠지고 싶은 심정이다.
딸아이가 벌써 중학생이 되고 결혼 생활 15년째를 맞이했다. 바쁘게 사느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지나치기도 하는 결혼기념일이 새삼 다른 의미로 생각나는 건 15년이란 세월이 나를 바꿔놓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 항상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것만 같던 시절, 그 세월 동안 많은 모습과 생각들이 바뀌고 변화되어 어느덧 중년의 여성으로 탈바꿈을 했다. 어쩜 이런 표현이 지극히 정상적일 수 있다. 조금은 싫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되돌아보니 결혼기념일이라고 제대로 챙겨본 기억이 없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별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15년이란 세월이 유난히 내 마음을 씁쓸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다.
결혼은 두 사람이 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챙기지 않는 결혼기념일을 남편이 챙겨주길 바라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이번에도 별 생각 없이 지나가기로 했다. 그냥 서로가 잊지 않고 생각만으로도 하고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결혼기념일임을 서로 문자로 주고받는다. 축하해주는, 그리고 축하받는, 그런 하루를 바쁜 듯 보내고 저녁이 되었다.
딸아이와 함께 저녁 준비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남편이 퇴근을 하고 들어왔다. 그런데 한 손에는 케이크를 그리고 한 손에는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왔다. 갑자기 불쑥 내미는 장미 한 송이를 얼떨결에 받아 들고 뭐하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꽃인지 순간 머릿속이 그 숫자를 세고 있었던 것 같다.
꽃다발을 받아보는 게 소원이라고 해도 들은 척 못들은 척 했던 남편이었는데, 케이크와 한 송이의 꽃을 들고 온 남편의 마음이 읽히는 듯했다. 그냥 고마웠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나 자신이 미안해지고 부끄러웠다. 작은 거 하나라도 성의껏 준비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15년을 한결같이 함께해 줘서 고맙다는 말과 앞으로도 지금처럼 열심히 살아보자며 한마디 건네는 남편에게 그동안의 힘들었던 일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듯했다. 이것이 여자의 마음인가. 작지만 마음을 전해주고 표현해준 남편이 고마웠다. 지난 세월 힘든 시간을 오로지 믿음과 배려로 인내하고 기다려온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남편이 보여준 것 같아 그저 고맙고 미안할 뿐이었다.
결혼 15주년에 장미 한 송이의 작은 선물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해온 부부라면 아마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비록 한 송이의 장미이지만 내겐 그 어떤 선물보다 그 어떤 꽃다발보다 값진 것이다.
자꾸만 미안해하는 내게 딸아이가 옆에서 귀뜸을 해준다.
"내년엔 엄마가 꽃 한 송이 준비하세요. 그러면 되잖아요."그 말대로 내년엔 남편을 위한 장미 한 송이를 준비해야겠다. 15주년 결혼기념일, 행복이란 단어가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