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시민들을 위한 변혁활동의 훌륭한 지침서가 될 수 있는 책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고색창연한 구호는 많이 들어보았을 것입니다만, "만국의 수사가여 단결하라"는 말이나 구호는 무척이나 생소하실 것입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동녘출판사, 제이슨 델 간디오 교수 저)(원제 :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수사학)라는 책이 바로 '만국의 수사가여 단결하라'고 외치고 있는 책으로, 저자는 심금을 울리는 '수사'를 바탕으로 한 변혁노선을 '신급진주의'라고 명명하고 이를 설명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급진주의는 무엇일까요? 급진주의와 급진주의자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는 좌경용공과 항상 함께 다니는 단어였습니다. 급진과격, 급진좌경, 급진용공 이런 식으로 쓰이는 단어였죠. 하지만 정확히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모순과 부조리가 많기에 빠르게, 신속하게 고치자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명력과 설득력이 있기에 '급진주의'는 역대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운동의 한 노선으로 오롯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만, 자기 마음이 급하다고, 또 급진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세상이 생각처럼 변화하는 것이 아니고 국민들이 다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보통의 국민대중과 함께 하는 '대중적 급진주의', 세상의 변화에 대한 전략을 설득력 있게 짜는 '호소력 있는 급진주의'라야 제대로 된 급진주의가 가능하겠죠.
또는 급진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하나씩 하나씩 세상을 바꿔나가는 '순차적 변혁주의'라는 말도 가능하겠습니다. 시민사회는 그런 고민 속에 급진과 온건이 공존하고 있고, 그 공존이 시민사회의 또 다른 매력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한 변혁운동의 과정에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저자 간디오 교수(미 템플대학 공공커뮤니케이션)는 신급진주의를 "'수사(修辭)'를 핵심으로 하는 행동주의"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급진주의가 세계 변혁을 위한 '행동'과 '행동주의'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면, 신급진주의는 세계 변혁을 위한 수사(Rhetoric), 즉 말과 글, 표현과 선전 등을 핵심적 수단으로 하는 행동주의라는 것입니다.
즉, 신급진주의는 '사회변혁'을 지향하면서 사회변혁과 '수사·언어'와의 관계를 착목하는 새로운 급진주의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사파티스타 마르코스 부사령관) "가능한 한 혁명적 자세를 유지한 채로 다양한 청중의 심금을 울려야 한다. 이 양날의 칼은 급진주의의 생명줄이다." "가장 사랑받는 급진주의자가 가장 훌륭한 소통자"라는 간디오 교수의 말에서 신급진주의의 핵심적 문제의식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레토릭(수사)이라고 하면, '으레 그렇게 하는 화법' 또는 '진부한 설명' 등의 부정적인 느낌을 떠올리겠지만, 원래 수사는 설득하고, 추론하고, 분석하고, 나아가 현실을 창조하는 것으로 진실하고 설득력 있는 '수사'가 사람들을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의 강력한 지지자로 만든다는 점에서 한국의 시민사회는 수사학과 신급진주의를 제대로 착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시민사회운동의 과정에서 그 좋은 뜻에 비추어 그것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수사가 매우 취약한 한국 사회에서 간디오 교수의 메세지는 특히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수사는 단순히 더 나은 표현을 위한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운동과 급진주의자들에게는 운동의 내용에 못지않은 무게가 있고, 나아가 운동의 성패를 가르는 중대한 변수이기도 한다는 간디오 교수의 문제의식을 한국의 시민사회는 진지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요즘의 시민사회운동관련 집회를 보면, 주최 측의 주장에만 충실한 집회를 만들 뿐이지 집회를 통한 국민대중과의 소통이나 호소력 등에는 무신경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집회에서는 기존의 '시민사회운동계'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시민들과 네티즌들의 설득력 있는 말과 글, 수사와 언어가 많은 이들의 공감대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간디오 교수가 말한 제대로 된 '신급진주의자'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최근 사회운동의 현장에 등장하고 있는 '날라리 선배부대' '유쾌한 외부세력' 등도 그러한 맥락일 것입니다.
이처럼 신급진주의라는 것이 말만 들어보면 급진적 활동가들을 위한 개념인 것 같지만, 실제는 보통의 뜻있는 이들을 위한 '새로운 노선'일 수 있습니다. '중심없는 네트워크'의 시대, '다중'의 시대에 누구라도 활동가가 될 수 있고 또 이미 그것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이제 평범한 시민들도 때로는 활동가이므로, 때로는 활동가보다 더한 활동가가 될 수 있으므로(지난 2008년 촛불시위처럼) 시민 누구에게라도 '신급진주의'는 유용한 테마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유명한 속담이 있듯이 표현과 소통의 문제는 굉장히 오래된 주제여서 일단 이 책의 주제인 '변혁활동을 위한 수사학과, 수사법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신급진주의'라는 문제의식과 제안이 결코 낯설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미국 사회변혁의 다양한 사례와 인물들이 수시로 등장하여 전혀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활동가들이 또는 사회변혁에 조그만 관심이라도 있는 누구라도 꼭 읽어볼만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하나 재밌는 것은 미국의 시민들이 경찰을 비판하며 부르는 은어에서 'pig'를 '짭새'로 lobocop를 '견찰(犬察)로 번역한 부분입니다.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 죄 없는 시민들을 잡으러 다니는 것은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은어들이 있는 것이겠죠.
또 한국 사람들도 혼동하고 있거나 편견을 가지고 있는 부분에 대한 언급도 아주 많이 나와서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급진과 과격은 동격이 아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아니라 말이 곧 행동이다' '폭력적 혁명이 아닌 수사적 혁명' 등의 서술이 특히 그러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급진주의자에게는 혁명으로 가는 다른 길이 필요하다. 나는 수사적 노동이 이 요구를 충족한다고 생각한다. 수사가 사회적 변혁에 가장 중요한 요소도 아니고, 이 책이 혁명의 청사진도 아니다. 그러나 수사는 필요한 요소기이게 이 책은 변혁과 혁명으로 나아갈 때 도움을 줄 수 있다. 그 점을 마음에 새기고 모든 이에게 말한다. 만국의 수사가여 단결하라!"고 호소합니다.
"객관적 사실에 호소한다고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 견고한 사실을 제시한 다음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심란해하는" 모든 이들도 이 책을 반드시 읽어 보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답답한 이들을 위해서 이 책은, 수사가·수사노동·신급진주의 등의 흥미로운 표현들과 함께 변혁과 수사에서 다시 생각해야할 10가지 신화, 현대 행동주의 수사학이 지향해야할 10가지 테제 등을 끊임없이 제시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나면 "만국의 수사가여 단결하라"는 저자의 호소에 충분히 공명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스스로부터가 '좋은 수사가'가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해보게 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필자가 쓴 <주간경향>에 실린 간단한 책 소개 글을 바탕으로 서평을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