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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획전'이 열리고 있는 학고재갤러리 본관 전시장. 가운데 유현경 작가. 왼쪽이 아니쉬 카푸어 작품, 오른쪽 끝이 샘 프란시스 작품
'한 획전'이 열리고 있는 학고재갤러리 본관 전시장. 가운데 유현경 작가. 왼쪽이 아니쉬 카푸어 작품, 오른쪽 끝이 샘 프란시스 작품 ⓒ 김형순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한 획전'이 8월 21일까지 열린다. 출품작은 38점이다. 국내외 참여 작가는 안토니 곰리, 김태호, 김호득, 류샤오동, 서용선, 리처드 세라, 유현경, 윤향란, 이우환, 정상화, 정현, 아니쉬 카푸어, 주세페 페노네, 시몬 한타이, 샘 프란시스이다.

이번 전을 기획하면서 학고재 우찬규 대표가 영감을 받은 한시는 바로 청나라 초기 화가이자 화론가인 석도(石導)의 일화론(一畵論) 중 '일획론(一劃論)'이다.

"태곳적에 법이 없었다 / 순박이 깨지지 않았다 / 순박이 깨지자 법이 생겼다 […] 무릇 한 획의 법을 세운 사람은 / 무법으로서 유법을 만들고 / 그 법으로써 모든 법을 꿰뚫는다."

우주만물의 기운생동이 듬뿍 담긴 한 획

 김호득(1950~) I '그냥 그래' 캔버스에 먹과 아크릴 162×130cm 2011
김호득(1950~) I '그냥 그래' 캔버스에 먹과 아크릴 162×130cm 2011 ⓒ 학고재

글에서 첫 문장이 중요하듯 그림은 한 획에서 시작하기에 이게 중요하다. 거기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기와 혼과 얼, 정신과 심경이 담겨 있다. 또한 예술에 대한 태도와 기질, 작가로서의 고민과 갈등, 삶에 대한 희로애락이 함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호득 작가의 작품에는 그런 삶을 관조하는 자세, 붓질의 긴장감과 공명감이랄까. 한 획에서도 그런 힘과 에너지가 느껴진다. 추상화 같으나 서예와 그림의 경계를 넘어선다. 필(筆)의 변화무쌍한 움직임 속에 농담(濃淡)으로 표현된 기운생동이 춤추는 듯하다.

 김태호(1953~) I '알맞게 움직이다 B2' 종이에 한국잉크 59.5×90cm 2011
김태호(1953~) I '알맞게 움직이다 B2' 종이에 한국잉크 59.5×90cm 2011 ⓒ 학고재

김태호 작가는 일 획 혹은 한 줄의 드로잉을 완성으로 가는 하나의 도정으로 본다. 그러기에 창작에서도 결과(be)이상으로 과정(become)을 중시한다. 화면에 텅 빈 공간이 많다. 여백이 거의 70-80%다. 최소로 개입으로 공간을 극대화시키려는 것인가. 관객입장에서는 참여와 상상할 여지를 많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절로 풍요로워진다.

김호득 작가나 김태호 작가의 한 획에는 룰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규칙이 없어 보인다. 다만 강약고저 등 리듬과 운동감이 있을 뿐이다. 법을 따르되 또한 그 법을 깨는 정신 그게 바로 석도(石導)만 아니라 추사가 추구한 미학이 아닐까싶다.

부단한 실험과 노력으로 터득한 한 획

 시몬 한타이(Simon HANTAI 1922-2008) I '타물라(Tamula)'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236×200cm 1980
시몬 한타이(Simon HANTAI 1922-2008) I '타물라(Tamula)'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236×200cm 1980 ⓒ 학고재

헝가리 태생의 프랑스 화가 '시몬 한타이'는 8살 때 디프테리아에 걸려 잠시 눈이 멀었다. 그때 착시현상인지 아주 독창적인 '폴딩(Folding)' 페인팅을 창안한다. 폴딩이란 캔버스를 접거나 꼬아 나뭇잎이나 크리스털 패턴을 만든 후 그걸 펴서 색을 입히는 방식이다.

채색된 부분과 아닌 부분의 대조가 선사시대 동굴에서 볼법한 추상문양을 연상시키는데 이게 예상 밖으로 유쾌하다. 하지만 이게 다 우연이 아닌 오랜 노력과 실험의 결과이리라.

 윤향란(1960-) I '산책' 한지에 파스텔 각 48×38cm 2009
윤향란(1960-) I '산책' 한지에 파스텔 각 48×38cm 2009 ⓒ 김형순

윤향란 작가는 파리국립미술학교(ENSBA) 출신으로 프랑스에 25년째 살고 있다. 그는 이방인으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김치를 먹고픈 향수를 달래려 배추를 그려왔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드로잉작품도 고단한 일상을 다스리며 정신적 위안을 얻고자 하는데서 시작한단다. 이런 감정의 굴곡과 애환을 용해하고 해소하기에 드로잉만한 것이 없나보다.

이런  대담한 선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의 꾸준한 노력과 함께 미술과 자신과의 싸움이 그만큼 치열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언제나 원초적 동심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천진성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이렇게 날카롭고 섬세한 선율을 낳은 것이 아닌가싶다.

조화, 균형, 중력이 낳은 중간의 한 획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1939-) I '한트케(Handke)' 종이에 오일스틱 193×193cm 1993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1939-) I '한트케(Handke)' 종이에 오일스틱 193×193cm 1993 ⓒ 학고재

이번엔 리처드 세라를 보자. 그는 버클리대 영문과와 예일대 대학원까지 나온 재원이다. 그러나 조각에 입문하여 1960년대는 고무, 네온판, 녹인 납 등으로 추상조각을 했고,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철판작업을 시작한다. 학창시절 철제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한 것이 그 계기다.

그는 미국작가답게 작업스케일이 어마어마하다. 그의 독창성은 철판을 초등학생이 종이로 오려붙이기 하듯 그렇게 봤다는 점에 있다. 백남준도 모니터를 붓이나 물감으로 봤는데 그와 비슷한 원리다. 그런데 그는 크기만 아니라 물성이 주는 중력과 균형감을 중시한다.

이 유명작가의 작품을 직접 보니 역시 미니멀리즘의 대가답다. 매우 단순하나 황홀하다. 가운데 선이 들어가는 평범한 구조인데 화면전체를 확실하게 압도한다.

 류 사오동(LIU Xiaodong 1963-) I '인왕산' 캔버스에 유채 180×180cm 2008
류 사오동(LIU Xiaodong 1963-) I '인왕산' 캔버스에 유채 180×180cm 2008 ⓒ 학고재

중국 랴오닝 성에 태어난 류 사오동 작가의 '인왕산'도 세라 작품처럼 가운데 선으로 그림을 가른다. 청춘남녀의 미묘한 마음상태를 재미있게 묘사한다. 평범해 보이는 남녀가 갑자기 미인과 영웅으로 보이는 이유는 뭘까. 드로잉을 매우 치밀하게 설계한 결과인가. 그보단 이 작가가 사람과 자연에 대한 교감이 뛰어나 관객의 마음을 잘 읽어내기 때문이리라.

시간의 흔적과 삶의 궤적이 남긴 한 획

 정현(1956-) I '무제' 철판에 녹 116×116cm 2006-2008
정현(1956-) I '무제' 철판에 녹 116×116cm 2006-2008 ⓒ 학고재

이번엔 공간에 시간을 도입한 정현 작가를 보자.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초대를 받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이번 전엔 차가운 철판에 뜨거운 불꽃이 피어나는 작품을 선보인다.

그가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는 세월에 따라 변하는 녹과 그 녹이 내는 색감 때문이다. 작가는 그런 색에 흥분한다. 게다가 그 색은 작가만 아니라 세월이 합작한 것이라 더욱 흥미롭다. 그의 작업이 관객을 어필하는 건 역시 작가가 온몸을 던지는 예술혼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삭막한 철판이 관객에게 쉼과 위로의 매체로 보이겠는가.

여기서 철판에 어떻게 칼집을 내고 작업이 어떤 과정으로 완성되는지 육성으로 들어보자.

"제 작품은 문래동 철공장에서 흔히 보는 철판으로 하는 작업이에요. 철판의 속성이 긁히면 녹이 나고 비가 오면 녹물이 흐르죠. 그런데 그게 나에겐 너무 멋져 보여요. 철판에 녹을 내기 위해 철을 내 차에 매달고 자갈길을 다니기도 하고 아니면 직접 채찍으로 후려치기도 하죠. 그렇게 해서 6개월 두면 녹과 녹물이 나는데 그게 제 드로잉이자 작품이죠."

 정상화(1932-) I '무제 83-12-B' 캔버스에 연필 아크릴물감 79×68.5cm 1983
정상화(1932-) I '무제 83-12-B' 캔버스에 연필 아크릴물감 79×68.5cm 1983 ⓒ 학고재

그리고 삶의 궤적을 형상화한 한국추상1세대인 정상화의 작품을 보자. 얼핏 보면 단순해 보여도 그 작업과정이 진한하다. '뜯어내기-채우기-긁어내기-메우기' 등 수없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런 반복 속에서 삶 그 너머에서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찾는 건지 모른다. 이런 미적 아우라엔 작가의 철저한 계산과 고도의 수도자적 행적이 숨겨져 있다.

"용감한 창조를 향한 긴장된 도발"로의 한 획

 유현경(1985-) I '일반적 남성모델 K_서울 마포구 합정동' 캔버스에 유채 오일바 194×194cm 2010
유현경(1985-) I '일반적 남성모델 K_서울 마포구 합정동' 캔버스에 유채 오일바 194×194cm 2010 ⓒ 학고재

끝으로 서울미대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유현경 작가의 작품을 보자. 그는 한 획에 대해 "긴장 되고 용기가 필요한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한다. 위 작품을 보면 그런 생각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50개의 작은 남자누드가 합쳐진 이 작품은 기존의 남자화가와 여자모델이 아닌 여자화가와 남자모델이라는 관계의 역전을 꾀한다.

이렇게 통념을 깨며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시도는 과감한 도전이다. 아니 도발이다. 한 획의 정신이라 바로 이런 모험정신에서 오는 것 아닌가. 이런 시도가 없다면 작가는 그의 무의식적 속에 잠재하고 있는 창조적 상상력은 결코 발동되지 않을 것이다.

이밖에도 설명이 빠진 작가로는 영국의 거물 조각가 A. 곰리(1950-)와 추상표현주의에 동양의 정신을 가미한 미국의 S. 프란시스(1923-1994), 세필로 강력한 필력을 보여준 이탈리아의 J. 페노네(1947-), 터너상 수상자인 A. 카푸어(1954-), 문명 비평적 작가인 서용선(1951-) 그리고 드로잉을 설치작품보다 더 실물 같이 그린 이우환(1936-)이 있다.

덧붙이는 글 | 학고재갤러리 종로구 소격동 70번지 www.hakgojae.com 02) 720-1524-6 입장무료



#한 획전#석도(石導)#일필휘지#드로잉#학고재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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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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