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언론매체인 <미디어스>(7월 6일)에 실린 당신의 글
'도청을 파헤친 기자, 도청을 한 기자'를 잘 읽었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가져왔던 워터게이트 도청사건과 그 사건을 파헤치는 <워싱턴 포스트> 두 기자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영화를 보고 기자의 꿈을 키웠던 당신이 이제는 "도청을 했다고 지목받는 기자 집단의 일원이 되고만",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치욕적인 상황"에 빠져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습니다.
당신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선은, 이런 글을 발표할 때 이름을 밝히지 못하고 '익명'으로 한 것을 보면서, KBS의 지금 상황이 참 험악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익명'으로 글을 쓰는 아픔, 이해합니다. KBS의 김용진 기자가 겪었던 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탐사보도 팀장이었던 김용진 기자는 정권이 바뀌자마자 평팀원으로 강등된 후 부산으로, 다시 울산으로 유배를 간, 인사상 형벌을 받았고, 2010년 G20 서울대회와 관련하여 KBS의 과도한 홍보 프로그램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가 중징계를 당했지요. 언론사에서, 언론행위인 글쓰기를 했다고 중징계를 했으니, KBS는 스스로 언론임을 포기한 집단이라는 비판이 있기도 했습니다. 김용진 기자뿐 아니지요. 미운 털 박힌 기자, 피디들이 지방으로 많이 유배를 갔습니다.
KBS 분위기가 많이 험악하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한 기사가 또 있었습니다.
'KBS 분위기 살벌... 충성파들이 득세'라는 제목의 <오마이뉴스> 기사(7월 14일)였습니다. 'KBS의 한 중견기자'를 만나 현재 도청사건과 관련하여 KBS 내 분위기가 어떠한지를 전했습니다. '익명'의 이 KBS 기자는 지금의 KBS 분위기를 "살벌하다"고 전하면서 "근태와 근무기강 등을 체크하고 있고, 심지어 외부 기자와 통화하는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름 밝히기를 두려워 한 '공포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그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다방에서 이야기할 때도 혹시 누가 들을까봐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살피면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우리사회에 공포가 연탄가스처럼 사방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재수 없이 걸리면 영락없이 잡혀가서 치도곤을 당했지요.
사람의 생각을 재단하는 '공포의 시대'
그 시대에는 양희은의 '아침이슬'도, 송창식의 '고래사냥'도 금지곡이었습니다. 귀밑을 덮는 장발도, 무릎 위 몇 cm의 미니스커트도 단속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21세기 대명천지에 그 비슷한 일들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40여 년 전, 장발이 귀밑까지 내려왔는지, 미니스커트가 무릎 위 몇 cm까지 올라갔는지, 유신권력이 자를 들이대며 재어 보았듯이, 지금은 민주사회에서 '양심의 자유'라 부르는 '사람의 생각'에다 잣대로 들이대고 있습니다.
국민의 대표가 모여있다는 국회에서는 '천안함 잣대'로 '확신'의 깊이를 검증했지요.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인준 청문회 때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국회의원들, 그리고 수구언론이 보였던 사상검증은 중세 마녀사냥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겨우 이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무리들이 우리사회의 주류입니다.
당신이 근무하는 옆집 동네 MBC에서도 참으로 한심한 꼬락서니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방송 긴급조치'를 발동했지요.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에 대하여 특정인이나 특정단체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지지 또는 반대하거나 유리 또는 불리하게 하거나 사실을 오인하게 하는 발언이나 행위로 인하여 회사의 공정성이나 명예와 위신이 손상되는 경우" 시사 프로그램의 고정 출연자로 나올 수 없다는, 긴급조치 말입니다.
이 조건을 채울 수 있는 시사 프로그램 고정 출연자는 '자기 생각'이 없는 '무뇌아'들 뿐이겠지요. 더구나 이런 방송 긴급조치가 요즘 사회적 발언을 활발하게 하는 김여진씨의 출연을 막기 위해 취해진 '김여진 법'이라니, MBC가 참으로 왜소하고, 졸렬하게 보입니다.
천안함 마녀사냥도 그렇고, '김여진 법'도 그렇고, 이 두 가지 모두 '사람의 생각'에 어떤 잣대를 들이대는, 전제국가에서나 있음직한 일이지요.
진실이 생명인 언론이 '진실 가리기'에 안간힘이름 밝히기가 두려웠던 '공포의 시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 일본의 진보 월간지인 <세까이>에는 'TK생'이라는 '익명'의 필자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일어나는 민주화 운동과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 사례들을 전했습니다. 이름이 밝혀지면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대였으니, 이름을 감추고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했습니다. 암흑시대에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TK생'은 더 이상 '익명'이 아니어도 괜찮은 민주 시대에 자신의 존재를 밝혔습니다. 전 KBS 이사장을 지낸 지명관 교수였습니다).
<미디어스>에 실린 '익명'의 당신 글을 보면서, 그리고 <오마이뉴스>에 난 'KBS 분위기 살벌...' 기사에 등장하는 '익명'의 KBS 중견기자의 말을 보면서 1970년대 그 살벌했던 시대의 'TK생'이 떠올랐습니다. 참으로 불행하고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어쩌다 KBS가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는가.
지금 KBS '도청 사건'을 둘러싸고 되어가는 일들이 희한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KBS가 영영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망가지고 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실'을 생명처럼 여겨야 하는 언론이 '진실'을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도청 사건'이 처음 터졌을 때, KBS 쪽의 첫 반응은 이른바 '귀대기' '벽치기' '전통적인 취재 방식' 등의 주장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취재활동'이었을 뿐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민주당 쪽 사람들을 겁박했습니다. 민주당 국회의원에게 "내년 총선 때 봅시다"라고 협박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지금까지 수신료 인상 때문에 참았는데, 이제 민주당을 봐주지 않겠다"는 식의 말들이 공식적인 회의 시간에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고 당신은 전했습니다.
그 다음 나온 주장이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이른바 도청행위를 한 적은 없다'는 해괴한 주장이었습니다. 이 말은 누가 봐도 '어떤 종류'의 도청행위를 하기는 했는데, '민주당이 주장하는 그런 형태'의 도청은 하지 않았다는 강변으로 들렸습니다.
그 뒤 경찰에서 정치부 장아무개 기자의 집을 압수수색하자, KBS 보도본부는 '언론탄압'이라 비난했고, 얼마 뒤 KBS 정치부 이름으로 나온 성명서에서는 민주당 비공개 회의 내용을 회의와 관련된 '제3자의 도움'으로 파악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정치부 특정 기자를 도청 당사자로 지목하는 정치권과 일부 언론의 추측성 의혹 제기가 전혀 근거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법적 대응을 통해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는 으름장도 잊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경찰이 압수수색한 KBS 정치부 막내기자라는 장아무개 기자의 노트북과 핸드폰이 사건 발생 직후 모두 분실되어 새 기기로 교체가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이한 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KBS 사건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실제 발언 내용과 토씨까지 같다는 '녹취록'이 어떤 경로로 입수되었는가, 둘째, 그 '녹취록'이 어떤 경로를 통해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에게 넘겨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매우 엄중한 사안입니다. 첫 번째 사안은 범죄행위인 '도청'과 관련된 것이고, 두 번째 사안은 KBS가 도청을 했건, 제3자의 도움을 얻어서 취득했건 간에 그 '녹취록'을 한나라당 의원에게 넘겨주었다는, 언론기관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치명적인 '정치 공작'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KBS는 그동안 첫 번째 사안인 '도청'과 관련해서는 여러 차례 말을 바꾸어 가면서도 대응을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안인, 한나라당에 비공개 회의 '녹취록'이 어떤 경로를 통해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습니다.
KBS 친위세력들이 살아온 길, 당신이 더 잘 알 것
KBS의 지도부와 친위세력들은 이 사건을 깔아뭉개고 지나면 그냥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겪어본 인물들, 특히 지금 김인규 사장 체제에서 이른바 '잘 나간다'는 친위세력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에게서 '진실'을 스스로 밝히는 양심과 용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더 오랜 세월동안 KBS를 경험해 해왔기에 그들이 어떤 인물인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 기자 생활은 어떻게 해왔는지, 후배들에게는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어떤 삶의 궤적을 가지고 있는지, 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언론은 '권력'이며, 기자 노릇은 출세를 위한 '방편'일 뿐, 언론 본래의 기능과 책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지금의 KBS 언론 권력에 도취하여 "다음 총선 때 보자"며 겁박하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이번 '도청'과 '공작 정치'의 실체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KBS에서 '민주당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도청이 없었다'고 주장을 하건, '제3자의 도움'을 얻었건, 그 실체는 백일 하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에게 '기자의 꿈'을 키우게 했던 영화 '대통령의 음모'에도 나오지요. 음산한 지하 주차장에서 얼굴을 가린 채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던 '딥 스로트' (Deep Throat) 말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사임케 만든 그 어마어마한 사건의 진실을 은밀하게 폭로한 이 결정적인 제보자의 신분은 오랫동안 비밀에 묻혀 있었습니다. 딥 스로트는 다름 아닌 사건 당시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인 마크 펠트였음이 밝혀졌지요. 진실은 때로 이처럼 극적인 방법으로 세상에 그 속살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KBS와 관련하여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게 있습니다. KBS 상층부와 친위세력에 의해 KBS가 엉망으로 망가지면, 그 피해는 매일 취재하고 보도하고 프로그램 만들어야 하는 당신같은 일선 기자(와 피디)에게 고스란히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취재 현장에서 KBS 기자들이 시민들로부터 "국회에서 도청이나 하지 왜 여기 왔느냐"는 조롱과 멸시를 당했다고 합니다.
바깥세상 사람들은 그런 조롱과 멸시를 가져오게 한 원인과 책임을 가진 집단만 구분하여 질책하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냥 KBS라는 집단 전체에 대해 '도청와 공작 정치'의 의혹을 던지고 있고, 주요 이슈는 외면하고, 백선엽과 이승만 다큐멘터리나 만들고, 방송이 정권홍보 도구화하는 것 등에 분노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결국은 KBS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KBS 집단에 가해지는 조롱과 멸시를 받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일을 극복하여 참 공영방송으로 다시 서기 위해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 인간다운 권리,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건, 그런 것들은 스스로 싸워서 얻어야지, 누가 그냥 가져다주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터득한 진리입니다.
나보다는 한창 후배가 될 당신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당신도 어쩌면 그 글을 쓰고 난 뒤 여러 생각이 교차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KBS 안에 있는 당신과 같은 많은 후배들에게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힘들지만, KBS를 다시 국민의 품으로 가져오는 일을 이뤄내리라 믿고 있습니다. 긴 장마가 걷히듯 새로운 날은 밝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