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 들어온 타자 이야기, 정확하게는 탈북자가 그 대상이었지요. 그들은 남한 사람인데도 남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는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그 상황을 살인사건과 가상현실의 리니지게임, 백석의 시를 섞어서 이야기로 만들어 볼 수 없을까 고민하다 만들어낸 작품입니다."장편소설 <유령>으로 <세계일보>가 주는 1억 원 고료 세계문학상 7번째 주인공이 돼 한국문단에 빛나는 샛별로 떠오른 작가 강희진(47). 그는 "처음에는 당선통보가 거짓말인 줄 알았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지난 10년 동안 여러 문학상에 작품을 보낼 때마다 늘 최종심에 올랐지만 마지막 문턱에서 돌부리에 걸려 자주 넘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태어난 곳 땅 이름이 오래 전에 '사천'으로 바뀌었지만 지금도 옛 이름인 '삼천포'를 고집한다. 그가 10년 만에 거머쥔 문학상도 이러한 '외고집'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는 장편소설 <유령>에 대해 "오래전부터 국외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고 4년 전에는 이주여성에 대한 자료를 축적해 이미 소설을 완성시킨 적도 있다"고 되짚는다.
이 말은 곧 그가 장편소설 <유령>을 한두 해에 걸쳐 마무리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 지구촌에서 꼭 하나 남은 분단국가, 우리나라가 화두처럼 안고 있는 남북문제, 탈북문제는 '남의 집 불구경'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곧 '우리 집 불구경'하는 이야기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유령>은 곧 가상현실과 실제현실을 떠도는 나와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백수이자 폐인... 온라인에서는 리니지 으뜸 영웅"한국은 타자에게 너무 잔인한 나라입니다. 섬나라인 일본과도 달라요. 하지만 막상 타자들은 우리가 필요해서 부른 사람입니다. 이주노동자 없이 한국은 작동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남한 사회는 밀려오는 타자들, 국외자들을 어떻게 한국인으로 녹여서 살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강희진이 쓴 장편소설 <유령>은 현실과 가상, 남과 북, 그 경계에 불안하게 서있는 탈북자 청년 '나'가 주인공이다. 나(하림)는 현실에서는 백수이자 폐인이지만 온라인에서는 리니지 으뜸 영웅으로 살아가는 탈북자다. 이 소설은 나를 가운데 두고 서로 멀리하는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탈북자들의 소외된 삶과 죽음을 다룬 작품이다.
이 책은 모두 25꼭지로 나뉘어져 있다. 'PC방, 승천' '시체, 아바타, 모닥불' '꿈, 밤거리, 진짜와 가짜' '살인자와 함께 TV를 보다' '기억은 과거가 아니다' '범인, 자살, 오디션' '풀밭 위의 점심식사' '감사합니다, 내복단 동지 여러분' '백석의 고향 사람들' '너는 어디로 가니?' '뫼비우스의 띠' 등이 그것.
작가 강희진은 "이 소설은 탈북자들이 주로 모이는 백석공원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을 디딤돌로 그 살인범을 쫓는 미스터리 소설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고 곱씹는다. 그는 "탈북자인 '나'는 탈북과정에서 겪은 극심한 트라우마로 기억과 정체성을 잃어가는 인물로, 무엇이 과거이고 현실인지, 무엇이 진짜 현실이고 가상세계인지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고 귀띔했다.
주인공 '나'(하림)는 '내' 이름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조차 헷갈린다. 탈북자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나' 또한 현실에 발을 제대로 디디지 못하고 리니지 게임세계에 빠져 산다. '나'는 현실에서는 폭력조직배에 쫒기고 삐끼질이나 하면서 겨우 목숨을 잇는 처지지만 리니지 속 '나'는 독재자 시저에 저항해 바츠 해방혁명을 일으켰던 영웅 '쿠사나기'다.
남한으로 내려와 유령처럼 살아가는 탈북자들
"바츠 해방전쟁에 참여한 피멍은 적을 죽이면 꼭 눈알을 뽑아 전리품으로 줄에 매달고 다녔다. 그뿐 아니라 그는 혁명에 가담하면서 맹세의 의미로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를 잘라내 하나는 자신의 제단에, 다른 하나는 바츠 공화국의 독재자 시저의 재단에 바치는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백석 공원의 사건이 발생하자 나는 이 사건의 범인은 피멍이라고 확신한다." - 책 속에서 이 소설은 서울 강북에 있는 백석공원 '모닥불' 시비 앞에 놓여 있는 사람 눈알 하나, 조촐한 제사상과 함께 누군가에게 바치는 것인 양 놓여 있는 눈알로 문을 연다. 경찰은 그 눈알이 '나'와 같은 집에 사는 회령 아저씨 것이라 믿고 '나'를 경찰서로 잡아들인다. '나'는 한 달 넘게 피시방에 처박혀 게임에 빠진 탓에 정신병원에서 치료까지 받고 몽롱한 상태에 있다.
'나'는 경찰서에서 회령 아저씨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답장을 받아 경찰이 잘못 짚었다는 것을 밝히고 풀려난다. 이틀 뒤, 백석공원에서 같은 사람 두 손목이 발견되고, 사체 가운데 또 다른 신체 일부가 강남에 있는 한 공원에서 발견된다. 이 사건이 생기기 몇 달 전, 한 남자가 백석공원에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 남자는 탈북과정에서 딸과 아내를 잃고 남한으로 흘러 들어온 탈북자다. 그 남자 손에는 새끼손가락과 무명지가 잘려나가고 없다. 죽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탈북자가 백석공원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백석공원에 유령이 나타난다고 수군거린다. 이 모든 죽음을 지켜보던 '나'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리니지 폐인인 '나'는 탈북자로 구성된 '뫼비우스의 띠'라는 혈맹을 이끄는 군주다. 리니지에서 독재자에 저항하는 바츠 해방전쟁이 벌어질 때 혈맹 주변을 외톨이로 맴돌던 '피멍'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전사. 그는 적을 죽이면 반드시 눈알을 뽑고,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를 잘라 제단에 바쳤다. '나'는 이 사건 범인은 바로 그 피멍이라고 믿지만 찾을 수 없다.
'나'는 주변 사람들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누가 피멍인가? '나'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은 '대딸방 딸녀'와 삐끼, 불법 포르노 제작자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남한으로 내려와 뿌리내리지 못하고 유령처럼 살아가는 탈북자들이다. 그 틈에서 나는 대학 시절 사랑했던 마리를 찾아 유령처럼 헤매고 다니지만 배우가 된 마리는 광고 속의 이미지로만 존재할 뿐…
탈북자가 지닌 상처와 아픔은 곧 남북이 지닌 피멍"저희들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05년 10월 마지막 주, 찬바람에 마지막 잎새가 떨어져 내리는 어느 깊은 가을날. 독립군들이 얼어 죽고, 맞아 죽고, 굶어 죽었다는 만주 벌판을 떠돌다가 살아서 한국으로 들어온 꽃제비 출신의 내복단 셋이 디케이 동맹의 장군 둘과 한판 승부를 벌인 그 일을 말입니다……."- 책 속에서 제7회 세계문학상 심사를 맡았던 김화영, 김미현, 김형경, 박범신, 우찬제, 은희경, 이창동, 임철우, 하응백은 '심사평'에서 "젊은 탈북자 세대의 고민을 리얼하게 드러낸 '진화'된 분단 문학"이라며 "<유령>은 탈북자들의 소외를 리니지 게임과 연결시켜 서술한 점이 신선하고 흥미롭다. 기존 탈북자 소설들처럼 남/북, 탈북자/비탈북자를 대립시키지 않고, 현실과 가상현실, 자살과 타살, 탈북자와 다른 탈북자들 사이의 모호함과 구분 불가능성을 오히려 리얼하게 문제 삼은 점이 주목할 만하다"고 평했다.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신예작가 강희진이 창안한 하림은 그 누구인가. 탈북자인 그는 남한과 북한 사이, 남한 내에서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 사이, 그리고 현실과 사이버 공간 사이의 경계에서 존재론적 위기를 극적으로 경험하는 인물"이라며 "경계선의 생태 위기를 그만큼 웅숭깊게 환기하는 인물을 한국문학은 아직까지 배태한 적이 없었다"고 되뇌었다.
강희진 장편소설 <유령>은 지구촌에서 꼭 하나 남은 분단국가인 남한과 북한이 지닌 날선 모서리를 파헤친다. 이 소설은 '젊은' 탈북자 세대들이 지닌 고민과 탈북을 한 뒤 남한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보다 진화된 분단문학'으로 이끈다. 이들 탈북자들이 지닌 상처와 아픔은 곧 남북이 지닌 속앓이이자 천민자본주의가 지닌 피멍이다.
작가 강희진은 경남 삼천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부터 글쓰기를 몹시 좋아해 대학 때까지 여러 문학상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문학보다 영상에 끌려 영화판을 기웃거리다 영화 시나리오로 썼던 작품이 KBS 드라마 극본 공모에 당선돼 몇 년 동안 다큐드라마를 썼다.
그는 "그때 취재를 하기 위해 만났던 여러 사건 주인공들인 연쇄살인범, 사형수, 사기꾼, 성전환자들로부터 충격과 영감을 받았고, 그 경험은 소설 창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대한민국 최다 본선 진출 작가로 끝날 줄 알았다"라며 "마지막 응모라고 생각하고 탈고한 <유령>이 <세계일보>에서 주최하는 제7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