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아침, 늘 그렇듯이 정신없이 시작한 하루. 갑작스러운 문자 메시지가 한 통 왔다.
"이소선 관련 글 올렸는데, 어머니 중환자실에 있어."아찔하다. 이게 무슨 소린가. 황망히 기사 창을 열었다. 18일 밤, 어머니의 심장이 잠시 멎어서 119를 불러서 중환자실로 옮겼단다. 심장은 다시 뛰고 있지만 아직 의식을 찾지는 못했다는 기사. 어머니의 팔순에 맞춰서 어머니의 회고록을 썼던 오도엽 작가의 기사였다.
사실 제목만 먼저 보고는, 이 건달 같은 형님이 왜 이리 심한 장난을 치나 생각했다. 하지만 기사 내용을 보니 설혹 만우절이라 해도 이런 거짓말은 아무도 못할 것 같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딱 한 군데 매체에서 같은 내용을 짤막하게 보도했다.
하. 짧은 탄식이 나왔다. 기사를 편집하는 것이 편집부 기자의 일이니, 얼른 눈으로 기사를 따라 읽었다. 활자가 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귀 옆으로 휙휙 날아 허공에서 부서지는 것 같았다.
데이터베이스에서 어머니 자료사진을 찾아 기사에 집어넣고 데스크로 올렸다. 지난해 11월 전태일 열사 40주기 기념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단상에 올라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두 손을 치켜들어 인사하는 모습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데스크에 "속보니 빠르게 처리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나자, 그제야 이 상황의 의미가 머릿속으로 잔인하게 밀려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집회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호통치시던 '원로 여사님'
어머니는 나를 모른다. 나는 그저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수많은 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나는 우리 엄마도 아닌 전태일의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어머님'도 아닌 '어머니'다. 왜냐하면 '어머님'은 '남의 엄마'를 부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호적 따지고 탯줄 따지면 당연히 남의 엄마지만, 나처럼 이소선을 어머니라 부르는 이들은 수도 없다. 그것이 스물두 살 생때같은 아들을 한 줌 재로 먼저 보내고 이 나라 모든 노동자의 엄마를 자처하며 반평생을 살아온 이소선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어머니라 부르는 것을 어머니가 직접 들은 것은 딱 두 번이다. 2006년 겨울, 어쭙잖게 전태일문학상 수상작품집에 내 시가 실리게 돼서 그 책을 구경하러 서울 창신동 전태일기념사업회(지금의 전태일재단)로 갔다. 어머니의 집은 전태일기념사업회 건물의 지하였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기사로 써준 오도엽 작가가 그때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상근간사로 일하고 있었다. 책을 받고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도엽 형님이 어머니가 아래에 사시니 뵙고 가라고 했다. 무서웠다. 까닭도 없이, 호통을 들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이나 손사래를 치다가 결국 도엽 형님의 손에 이끌려 어머니의 방에 들어갔다.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방에는 먼저 온 대학생들이 둘 있었다. 다행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누군지, 여길 왜 왔는지, 도엽 형님한테 짤막한 소개를 듣고 나서, 어머니 지난 삶의 한 장면을 말씀해주셨다. 1980년대 대학교를 돌아다니며 대학생들과 같이 민주화 투쟁을 만들 때 얘기였다. 줄기차게 따라붙고 괴롭히는 형사들에게 호통친 이야기, 구속돼 감방에서 싸운 이야기, 대학생들과 같이 토론하고 공부하던 이야기….
왜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이제야 듣는 건가, 내가 배운 역사, 내가 배운 투쟁이란 다 뭔가 싶었다. 솔직히 어머니라기보다 할머니에 가까운 이의 입에서 직접 전해지는 그때의 뜨거움에 내 손은 오히려 덜덜 떨렸다.
그 얘기에 한참을 빠져 있다가 먼저 온 학생들이 일어나야 할 시간이 돼서 나도 같이 따라나왔다. 어머니는 젊은이들이 보고 싶으면 전화를 하실 거라고 그 학생들과 내게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가라고 하셨다. 그렇게 받아든 어머니의 공책은 각양각색의 필체로 쓰인 이름과 전화번호로 빼곡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표현은 어떤 때 쓰는 건지, 그때 느낄 수 있었다. 그저 전태일 열사의 모친, 가끔씩 큰 집회에 나와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호통치시는 원로 여사님이었던 이소선은, 그날로 내 어머니가 됐다. 어머니의 수첩 속에 이름을 적고 떠난 그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새로운 어머니를 마음에 품고 돌아갔겠지.
그 뒤로 어머니를 집회 현장에서 멀찌감치 뵐 때면, 그렇게 마음이 든든할 수 없었다. 경찰에게 두들겨 맞더라도 어머니가 '우리 아들들 와 때리노!' 하면서 대신 혼내주실 것 같았고, 싸움에 지쳐 고개를 떨구게 될 때도 어머니는 '괜찮다. 마 괜찮다' 하고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실 것 같았다. 어머니가 꼿꼿하게 현장에 서 계신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싸움은 다 이긴 것만 같았다.
전태일과 이소선, 죽음과 삶으로 역사를 떠짊어진 '모자'
어머니를 다시 만난 것은 3년 뒤, <작은책>이라는 노동자 잡지에서 일할 때였다. 매달 명사들을 초청해서 강좌를 열었는데, 2009년 말에 어머니를 모시고 특강을 연 것이다. 원래는 매달 강연을 열고 그 내용을 글로 풀어서 잡지에 실어왔지만, 어머니 특강은 그럴 목적이 아니었다. 정해진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쩌렁쩌렁한 그 목소리를 여러 사람들과 같이 듣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해 초부터 어머니를 강연에 모시려고 몇 번이나 청했지만 어머니 건강 때문에 계속 어긋나다가 겨우겨우 얻어낸 기회였다.
강연 주제도 정해지지 않은 어설픈 강연회에 사람들이 많이도 왔다. 60명 남짓 들어가면 적당한 강당에 120명이 넘는 사람들이 왔다. 절반은 강당 뒤에 서고, 더러는 책상 사이사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았다.
"전태일을 열사라 카지(하지) 마라. 그냥 동지라 캐라(해라). 열사는 저어(저기) 죽은 사람인기라. 전태일은 열사라 모시지 말고 그냥 동지라 캐라(해라). 요(여기) 있는 동지." 그 순간 나는 마음속에서, 다시 한번 이소선을 내 어머니로 모셨다. 내 동지의 어머니, 바로 내 어머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기사가 <오마이뉴스> 지면에 걸린 것을 보고, 얼른 트위터로 기사를 퍼트렸다. 일단 내가 급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니, 맥이 탁 풀렸다. 하. 하. 억지로 평정심을 찾기 위해 애쓰는 동안 짧은 한숨이 계속 터져 나왔다. 괜히 택배를 찾으러 간다고 사무실을 나와 오랜만에 보는 파란 하늘을 보고 걸어봐도, 무거운 마음이 다리를 짓눌러 몇 걸음 걷지 못했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들어간 지 스물네 시간이 더 지났지만, 아직 어머니는 눈을 뜨지 못했다. 면회하고 나온 이가 '다행히 숨은 잘 쉬고 계신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줬지만, 마음을 놓았다가는 더 크게 놀랄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 못하고 있다.
자정이 넘어 날짜가 바뀌도록 나는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는 이의 페이스북을 들락거리고, 인터넷에 어머니 이름을 검색해 새로 올라온 기사가 없나 살핀다. 다행히 더 나쁜 소식도 더 좋은 소식도 올라오지 않는다. 아침에 내가 편집해서 올린 기사를 몇 번이나 다시 보고 기사 안에 있는 어머니 사진도 다시 보는데, 기사 아래에 누군가 달아놓은 댓글 하나가 결국 나를 울렸다.
"정녕 이대로 떠나시렵니까? 유성기업도 들르시고 한진중공업 고공에 매달려 있는 김진숙이도 만나봐야 되잖습니까? 아직 아들 만나 호강하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깨어나십시오!"그래, 내가 이렇게 속 편하게 앉아서 살찌고 호강하는 걸 보고, 어머니도 이제 먼저 간 아들 만나서 호강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을지도 모른다. 전태일과 이소선. 하나는 죽음으로, 하나는 삶으로 이 역사를 떠짊어진 모자(母子)의 이름 앞에서, 내 젊은 몸은 무슨 낯으로 서른 해나 살았나 싶어 미치도록 노여울 뿐이다.
어머니가 이틀째 잠들어 누운 밤, 나는 아직 잠들지 못해 주절거림만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