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점빵이다. 어쩜 옛날 우리 고향마을하고 똑같아여!""하하하! 그러게 이 글꼴 좀 봐. 진짜 옛날에는 가게마다 다 저런 글씨체로 썼었다. 지금 생각하면 억수로 촌스러운데 그땐 어디든지 다 저렇게 썼다.""여기 봐! 소리사도 있고 이발소도 있어. 저~는 사진관인갑다.""허허, 아예 마을 하나를 통째로 옮겨놨네. 여기 참 잘해 놨다."
경북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문 닫은 학교(옛 산성중학교)에다가 새롭게 마련한 박물관이 있답니다. 세상은 참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옛 추억을 먹고 사는가 봅니다. 푸근하고 정겨운 어릴 적 고향마을 통째로 옮겨 놓은 듯 박물관 안은 온통 옛 기억들이 넘실댑니다. 17일 들머리에 걸어놓은 펼침막에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라는 글귀를 보면서 어릴 적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납니다.
장마가 지나가고 이때다 하고 발악하듯 내리쬐는 땡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고갯길을 넘어오니, 저 멀리서 아름다운 간이역인 화본역 급수탑이 우뚝 선 채로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기네요. 몇 해 앞서 갔을 때 역 안쪽에서 본 풍경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뒤쪽에서 보는 급수탑은 그 모습이 더욱 늠름하네요. 내친김에 자전거를 달려 가까이로 가봤어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화본역 급수탑 사진을 많이 봐왔어도 이렇게 뒤에서 찍은 사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아래부터 저 꼭대기까지 올곧은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어 참 놀랍더군요. 그리고 오늘 그 고생을 하면서 달려온 보람이 있군요. 가장 먼저 손전화기로 그 늠름한 모습을 찍어서 엄지뉴스로도 보내고 화본리 마을 안으로 들어갔어요.
담장마다 온통 벽화로 새 단장한 화본리 마을"허허! 자장구 타고 왔네? 날이 이키나 더운데 거 힘들겄네!""아 예. 어른 안녕하세요.""어데서 왔어요?""구미서 왔어요.""으응? 하이고 이키 더운데 자장구 타고…. 저기 나무 밑에 가서 좀 쉬었다 가여.""네. 여기 사진 좀 찍고요.""사진 찍는구나. 자 나도 찍어봐! 그런데 둘이 댕기믄 심심하겠다. 셋은 돼야지.""괜찮아요. 신랑각시 둘이서 다니는데요. 아주 재밌어요.""하하하 그려? 그럼 그건 더 좋다."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마을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를 보고 말을 건네십니다. 구미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는 입을 쩍 벌리며 놀라시네요. 저기 다리 밑에서 탁배기 한 사발 하고 오는 거라면서 사진을 찍는 우리를 보고 옷매무새를 만지면서 사진도 찍어 달라고 하셨어요. 일흔 한 살 어른의 말투와 몸짓에서 무척이나 살가운 정이 느껴졌답니다.
"아니? 이거 봐! 여기 언제 이렇게 해놨지? 전에 우리가 왔을 땐 이런 거 없었잖아?""이야! 멋지네. 담장마다 전부 다 그림이네. 참 잘 해놨다.""그림이 기가 막히네. 진짜 잘 그렸다. 하하하"300년 넘은 회화나무 앞 '회나무 상회'를 지나 모퉁이를 도니, 참말로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화본리 마을 담장마다 온통 그림을 그려놓았어요. 몇 해 앞서만 해도 없었는데, 그림 곁에 그린 이와 날짜를 자세히 보니 모두 올해 4월에 그렸나 봐요. 군위군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인각사가 있는 고장이기도 하답니다. 군위군과 급수탑이 있는 화본역을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그림이 무척 많았어요. 금이 가거나 부서진 담장에도 그 위에다가 그림을 그려놓아 있는 그대로 그 모습도 퍽 인상 깊더군요.
화본리 마을이 이렇게 벽화로 새 단장을 하고, '화본 근현대사 박물관'까지 새롭게 문을 연 걸 보니,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참 알차게 꾸려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들어 급수탑과 어우러진 화본역으로 꽤 이름나 있는 마을인데, 앞으로도 더욱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겠어요. 이젠 역 앞, 언덕배기 옛 산성중학교 자리에 세운 박물관을 찾아갑니다.
옛 추억, 고향집 골목길을 거닐다"허허, 여긴 꼭 옛날 우리 고향집 골목 같네.""그래그래. 이야 옛날에 쓰던 물건이 참 많네. 저기 저 딱지 좀 봐라. 옛날에는 저거 하나씩 사서 모으고 딱지 따먹기 하고 그랬는데….""옛날 담배도 다 있네?""하하하 새마을, 백자, 은하수 이런 것도 있네. 그러고 보니, 저기 있는 담배 한두 개 빼고는 다 피워봤네. 하이고….""헉!""왜 그래?""아~니….""뭔데? 으응?"
고향집 골목길 같은 박물관을 하나하나 구경하며 신기해하다가 먼저 모퉁이를 돌아간 남편이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네요. 사진을 찍다 말고 얼른 뒤따라가니, 모퉁이 길에 난 문이 나왔어요. 뭔지 궁금해서 열었다가 나도 같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어요.
"아이구 깜짝이야! 시기 놀랬네. 자기도 이거 보고 그랬구나?""하하하 거봐 너도 놀랬지?""내가 못살아 나 놀래라고 일부러 말 안 한 거지? 나빴어.""재밌잖아."문 안에는 다름 아닌, 공중변소였어요. 우리를 놀라게 한 건 실물과 똑같이 생긴 웬 사내아이가 엉덩이를 까고 볼일을 보고 있는 거였어요. 모형으로 만든 거였지만 하도 똑같아서 남편도 나도 놀란 게지요. 골목길처럼 꾸며놓은 박물관을 구경하는 재미가 무척 쏠쏠합니다. '월하의 공동묘지', '정무문', '1960~1970년대 영화포스터도 있고, 벽에는 여러 가지 구호를 적은 종이를 붙여놓은 것도 참 재밌었어요. 그 시절 생활을 그대로 느낄 수 있더군요.
'바늘 잃고 신고하여 황소도둑 잡었다네.''다 같이 쥐를 잡자 쥐약 놓는 날''임산부에 기쁜 소식, 아들이냐? 딸이냐? 해산일은?''말더듬이 치료'그 옛날 집집이 쥐가 많아서 쥐약 놓는 날을 나라에서 따로 잡아서 하기도 했지요. 또 임산부의 해산일이나 아들인지 딸인지를 미리 알려주는 점쟁이 광고도 붙어 있더군요. 골목길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지난날 초등학교 교실로 들어갑니다.
학교 가는 것보다 나무하는 게 더 큰 일이었던 그 시절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오래된 풍금 위에 빛깔이 누렇게 바랜 음악책이 펼쳐져 있어요. 책상 위에는 책과 공책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어릴적 가지고 다니던 책가방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공책을 보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테두리에 예쁜 문양이 그려진 부잣집 아이들이 많이 쓰던 공책이었는데, 어릴 땐 그걸 가지고 싶어서 몹시 부러워했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교실 뒤쪽에는 아이들이 쓴 그림일기도 여러 장 걸려있는데, 글을 읽어보니 웃음이 저절로 납니다.
『오늘은 내가 당번이다. 학교에 가려하니까 아버지께서 학교에 가지 말라고 나무하라고 걱정하셔었다.그래서 학교에 가지 않고 아버지와 같이 여름방학때 겨울방학때 다니던 먼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나무를 할 때 좋은 나무가 많이 있더니요사이 다벼가고 조그만 나무밖에 없었다.』"이야! 옛날에는 진짜 그랬다. 집에 농사일이 바쁘면 학교도 가지 말고 일하라고 했었다. 그땐 학교 가는 것보다 일하는 게 더 큰일이었으니까."남편도 옛날 생각이 나는지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 합니다. 그땐 학교에서 풀도 베어오라고 했다면서 아침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부역 나가던 일도 떠올리네요. 그 시절, 누구나 할 것 없이 참으로 못살던 시절이었지만, 세월이 흐른 뒤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정겨운 추억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런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보면서 그 시절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나 봅니다. 교실을 벗어나니 이번에는 웬 다방으로 들어갑니다. 지난날 음악다방이었어요. 저 앞에 뮤직 박스가 있고 그 앞에는 조용필, 박인희의 앨범도 보입니다.
그대 슬픈 밤에는 등불을 켜요~ 고요히 타오르는 장미의 눈~물지난날 즐겨 듣던 영사운드의 '등불'이란 노래가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벽에 '커피 팔아요' 라는 글을 적어놓은 걸 보니 이곳을 찾는 이들한테 지난날을 추억하며 음악을 듣고 커피도 한 잔씩 할 수 있는 곳이더군요.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가니, 지금은 거리에서 볼 수 없는 포니픽업차 한 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어요. 또 어릴 적에 많이 썼던 물건들을 전시해놨는데, 타자기, 뺑뺑이전화기, 선데이서울, 새농민과 같은 여러 가지 잡지들, 금복주나 삼양라면, 다이알비누, 바리깡 등등, 그 시절 물건들이 무척이나 많더군요. 이 모두가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 많은 것들을 꼼꼼하게 보는데 지난날 추억이 많이 생각났답니다. 누구라도 이곳에 오면 그때를 돌이켜보면서 옛이야기가 술술 나오지 싶어요.
우리들 마음속에 보석같이 알알이 추억으로 쌓였던 사금파리 같은 기억들, 지난 시절 우리가 흔히 쓰던 물건들을 볼 때마다 '아! 그래 맞다. 나도 저런 거 썼는데, 기억난다!' 하면서 저절로 탄성이 나옵니다. 화본 근현대박물관,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라는 구호를 보며 들어왔던 이곳에는 옛 추억들이 고스란히 배어있어요. 아련한 그리움, 추억이 고플 때엔 누구라도 여기에 와보면 좋을 듯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와도 부모들이 살아온 날들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산 교실이 될 거예요.
경북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급수탑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간이역 화본역과 함께 삼국유사의 역사가 벽화로 오롯이 담긴 마을, 살가운 정이 곳곳마다 듬뿍 묻어나니 이곳을 찾는 이들한테는 또 다른 추억거리를 안겨 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