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가 한창이다. 여기는 집들 사이에 담이 없기 때문에 능소화가 높은 담을 넘어서는 광경은 볼 수 없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 수영장으로 향하다 보면 전신주를 감고 올라간 능소화가 가로등에까지 닿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주 찾은 나이아가라 언 더 레이크(Niagara-on-the lake)에도 능소화가 한창이었다. 조금 오래된 집 정원에 무성한 잎들 사이로 작은 트럼펫 모양의 주황색 꽃들이 소담스럽게 송아리들을 이루고 있었다.
나이아가라 언 더 레이크를 두 달 만에 다시 찾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게 5월 5일이었다. 목련이 한창일 때였다. 날짜를 기억하는 건 외우기 쉬운 두 숫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도 김 작가 때문이었다.
김 작가가 현재 83세의 백인 목사인 제임스 힐스와 결혼한 건 8년 전 일이다. 여자의 나이를 굳이 밝히긴 뭐 하지만 두 사람의 결합이 단순히 인간의 뜻을 넘는다는 걸 드러내자면 나이차가 23 살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움 돋은 곳이 나이아가라 언 더 레이크다. 이 작은 도시는 토론토에서 약 65 Km 떨어져 있는데 온타리오 주에서는 제일 아름다운 마을이다. 심지어 캐나다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투표를 받기도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수가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난 다음 협곡을 채운 물은 강이 돼 약 20 Km를 달려간다. 그 강어귀의 언덕에 세워진 도시가 바로 나이아가라 언 더 레이크다. 200년 이상이 된 도시라 빅토리아 시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구경할 수 있다.
전 남편과 사별한 김 작가는 이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친한 친구를 방문해서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러다 역시 아내를 사별한 힐스 목사의 눈에 들어 두 사람은 김 작가가 한국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책 2권 분량의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결혼식장에서 신부 김 작가의 손을 잡고 입장한 사람은 그녀의 아들이었다. 20대 초반의 아들은 어머니의 손을 신랑 힐스 목사에게 넘겨주었다.
5월 5일 김 작가를 찾은 것은 인사차 들리는 친선방문 차원이었다. 토론토로 돌아가는 길에 차나 한 잔 얻어 마실 작정이었다.
원래는 나이아가라 폭포 지역에 있는 식물원 앞의 목련을 구경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목련들이 식물원 앞 한 구간의 길에 터널을 이뤘다고 나이아가라 폭포 교외에 사는 지인이 우리 부부를 초청했다.
그 지인을 찾아 우리는 일부러 시골길을 한가하게 2시간 이상 달렸다. 차도 별로 다니지 않는 시골길을 달리다 보니 어릴 때 외가를 찾아 시골길을 걸었던 생각이 절로 났다. 털털거리는 버스에서 내리면 마을로 가는 작은 신작로가 있었고 초가지붕들 사이로 고샅길이 나 있었다. 그 고샅길에서 몇 집을 더 가면 외가의 삽짝 문이 으레 반쯤 열려 있었다.
"캐나다에서 40년 이상을 살면서 아쉬웠던 게 뭔지 알아? "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글세," 아내의 대답은 머춤했다. "푸근한 마음으로 찾아 갈 친척이 없다는 거지. 약속을 하거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찾아 갈 수 있는 그런 친척 말이야.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잃어버리고 산 게 뭔지 알아? 찾아간 사람을 쫓아 나와 반겨주던 사람들을 그 이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야. 왜 옛날엔 버선발로 뛰어나와 토방에 올라서는 사람을 두 팔로 붙잡고 얼마나 반가워했는데..." 아내도 내 말에 동의하는지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우리집 현관에는 판화에서 찍어낸 그림이 한 장 걸려 있다. 그림 왼쪽 밑엔 작은 연필 글씨로 '귀향'이라고 적혀 있다. 아마 1980년 대 초였을 것 같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돕기 위한 행사에서 산 것이라면 30여 년을 현관 벽에 걸어 두었다는 얘기다.
'귀향'은 머리를 뒤로 묶은 처녀가 고향집 마당을 들어서는 장면이다. 옷차림만으로 볼 땐 학생은 아니고 도시의 공장에서 일을 하던, 속칭 공순이가 추석 즈음 부모를 찾아오는 광경이다. 마당까지 뛰어내려 얼싸안는 어머니는 신발을 미처 신지 않았고 버선발은 아니지만 양말을 신은 채다.
삽짝 울 밖에서 바지게를 지고 돌아오던 오빠의 얼굴에도 웃음이 넘친다. 안방에 있는 아버지, 부엌에 있는 올케와 조카도 모두 입을 벌리고 시선집중이다. 떨어져 있다가 돌아온 살붙이를 허둥지둥 어쩔 줄 모르면서 반가워하는 정겨운 풍경인 것이다.
나는 이 그림을 걸어두고 사람이 사람을 반기는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가끔 확인해 보곤 한다. 캐나다에서 40여 년 동안 살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낡은 이 그림을 아직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나이아가라 식물원 앞 목련 길에서 사진도 여럿 찍은 다음 김 작가의 집을 향했다. 폭포 쪽에서 나이아가라 언 더 레이크까지는 자동차로 반시간 이상이 걸렸다. 우리가 김 작가 집 앞에 이르자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버선발로 뛰어나온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도가 지나친 과장이다. 아니 그런 환영을 받았다는 얘기다. 김 작가는 집에서 차 있는 데까지 뛰어나왔다. 그리고 차문을 열자마자 내 손을 덥석 붙잡는 거였다.
그녀의 얼굴은 반가움을 참지 못하는 웃음이 넘치고 있었다. 사실 그녀와는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다. 그녀는 소설로 나는 시로 이곳 토론토 동포사회에 조금 알려졌을 정도다. 인사 차 처음 방문한 나를 인사불성으로 반길 그런 사이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다 나이아가라를 향해 시골길을 달리면서 40여 년 동안 그 어느 누구로부터도 온통 반가움뿐인 환영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아쉬움을 얘기했는데, 바로 같은 날 뜻 아니 하게 김 작가로부터 온통 반가움뿐인 원형 그대로의 환영을 받게 된 것이었다.
김 작가는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1년 계간 '문학과 의식'에서 단편소설로 데뷔했다. 그간 '못질' 등 다수의 단편소설들과 '그대 안의 길' '유쾌한 결혼' 등 다수의 장편소설들을 펴냈다.1997년 한하운 문학상 소설부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몇 년 전 김 작가는 고국 방문길에 전 남편의 묘소를 찾았다. 힐스 목사와 함께였다. 김 작가가 가자니까 거리낌 없이 따라나선 힐스 목사였다. "다른 묘지는 작은데 창재(김 작가와 전 남편 사이의 아들)아버지 묘지는 왜 더 크지?" 힐스 목사의 질문이었다. "창재 아버지의 회사에서 이다음 나까지 죽으면 함께 묻으라고 크게 준비를 했대요." 김 작가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힐스 목사의 다음 질문이 가관이었다. "나이 순서로 하면 내가 먼저 죽을 텐데 나 죽으면 이곳에 같이 묻힐까?" 그리고는 곧 덧붙였다. "만일 내가 이곳에 묻히면 내가 당신을 사이에 두고 창재 아버지와 많이 싸우게 될 텐데 어쩌지?"
김 작가는 그녀를 두고 두 남자가 무덤 속에서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절로 폭발했다. "천국에는 다툼도 시기도 없다면서요? 당신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했잖아?" "그러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그렇게 설교했네!" 힐스 목사가 머리를 끄덕였다.
힐스 목사는 캐나다에 태어나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1982년서부터 난민선교에 뜻을 두고 미국의 국경도시 버펄로로 들어오는 매년 약 1000명의 난민들을 돕는 일을 해왔다.
1979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고 1982년 부산의 월남 난민 수용소에 있는 보트피플들을 돕는 일을 주선하기도 했다. 근래는 매년 몽고로 가서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복지를 위해 애쓰고 있다. 수도인 울란 바토르로부터 약 200리 떨어진 곳에 아브드란 교도소가 있다. 그 교도소를 10년 동안 매년 방문했다. 겨울이면 교도소 안의 감방 온도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 하지만 죄수들에게 모포담요가 지급되지 않는다. 자살자가 하루 한 명씩 나올 정도로 가혹한 환경이었다. 힐스 목사는 난민구호기관과 손을 잡고 교도소에 매년 1000불을 제공, 모포담요 100장씩을 구입해줬다.
목련이 한창이던 5월 초 방문했을 때 힐스 목사는 곧 몽고로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지난 주 우리가 방문한 것은 그가 돌아온 후였다. 이번에는 아브드란 교도소에 1000불을 들여 냉동고를 구입해줬다. 죄수들의 친척들이 고기를 차입하는데 냉동고가 없으니 고기를 보관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는 죄수들을 모아놓고 설교도 한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자살률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지난주 힐스 목사와 김 작가를 찾은 우리는 또 다시 푸근한 환대를 받았다. 첫 번 방문 때 피었던 목련 대신 능소화들이 참아 억제할 수 없는 여름의 열정을 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