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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말에 입대한 아들이 외박을 나왔다. 6월에 훈련이 끝난 후 하루 집에 왔었고 보름 전에 가족이 자대배치 받은 곳으로 면회를 한 번 갔기 때문인지 표정이 매우 밝아 기분이 좋았다.

아들을 볼 때마다 혹은 전화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묻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부대에 구타가 없느냐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빙그레 웃으며 전혀 없다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가볍게 대답을 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런 일은 절대 없으니 앞으로 그런 것은 묻지 않아도 된다는 표정을 보여줘서 아내도 나도 마음이 무척 편안해졌다.

지난 6월과 이번에 물은 것은 다름 아니라 최근에 군부대에 많은 문제들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입대한 자식이 있는 부모는 다 똑같은 심정이리라. 그리고 나처럼 지금 50대인 남자들은 군대에서 여러 가지 일로 구타를 많이 겪었기 때문에 혹시나 해서 자꾸만 묻게 되는 것이리라. 다음에는 절대로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지만 다짐한 대로 잘 될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21세 되던 1979년 10월말에 입대했다. 하도 주위에서 성격이 여자 같고 소심하다고 해서 꼭 군대에 가서 남자다운 모습으로 바뀌기를 원했기에 친구들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입대했다. 전형적인 육군 소총부대로 자대배치를 받아서 비록 많이 힘들고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런 것들을 다 참고 이겨내야만 이 나라의 진짜 사나이가 된다는 마음으로 가까스로 참아가며 생활을 해나갔다.

두 달 간의 훈련 끝에 작대기 하나를 달고 드디어 자대 배치를 받아서 정신없이 생활하다가 일병이 된 후 몇 개월 뒤에 다른 부대로 가게 되었다. 가서 보니 내 바로 위의 고참이 나보다 7개월 먼저 입대한 상병이었다. 그리고 일병 중에서 내가 가장 위고 바로 아래가 1개월 후에 들어온 일병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식기당번 대표가 되었다.

일병 중 먼저 들어온 순서대로 세 명이 당번을 맡아서 매일같이 식기를 닦았다. 군대 생활이 요즈음은 어떠한지 모르겠는데 33개월 복무를 한 그 당시에는 일병이 가장 하는 일이 많았다. 식기 닦기, 총기 손질하기, 내무반 정리하기, 점호 준비하기 등 말 그래도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 태어나서 남자라면 누구나 겪는 것이기에 이를 악물고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그럼에도 고참들의 눈에는 우리들의 정성과 노력이 눈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트집을 잡아서 군기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경기도 야산에 있는 부대에서 생활하고 있던 어느 날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우리 식기당번 3명을 집합시킨 것이다. 군기가 없어서 식기가 제대로 닦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내무반 정리가 형편없어서 밤에 점호 취할 때마다 자주 지적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랴. 고참의 말은 하느님 말과 같아서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으니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우리들은 밤에 소대원이 돌아가면서 보초를 서는 무기고 옆 숲으로 갔다.

다른 두 명은 잘 모르겠다. 왜 그랬는지 나는 그때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몹시 불안해했었다. 식기당번은 셋이지만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선임이기 때문에 책임을 많이 물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무기고 옆 수풀에 우리 셋은 무릎을 꿇고 무서운 공포감에 휩싸인 채 고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고참들이 나타났다. 아마 세 명인가 네 명인가 됐던 것 같다. 순간 나의 몸이 완전 굳어졌다. 입안의 침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다 말라버렸다. 그들은 조용히 그러면서도 위엄 있게 우리들의 잘못에 대해서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뻔했다. 군기가 빠져버렸으니 맛 좀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소대가 매끄럽게 잘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일장연설이 다 끝나고 그 가운데 한 명이 우리 보고 무릎 꿇은 상태에서 '열중 셧' 자세를 하고 허리를 펴라고 했다. 그리고 배에 힘을 꽉 주고 숨을 쉬지 말라고 했다. 무서웠다. 그 시간이 정말 무서웠다. 도망이라고 갈 수 있으면 재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곳은 다름 아닌 바로 군대인 것을.

나는 그때의 일을 남에게 이야기할 때마다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한테는 기적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그렇게 가슴을 군홧발로 세차게 맞고도 살 수가 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오랫동안 군홧발로 부하의 가슴을 차는 못된 악습이 계속되었겠지만 말이다.

단 한 대 가슴을 맞고 뒤로 벌렁 쓰러졌다. 맞았을 당시에 나는 숨이 완전히 멈춰졌다. 그리고 순간 생각했다. 여기에서 나는 죽는다고. 세상에 태어나 23년 동안 살면서 그렇게 맞은 적은 없었다. 숨을 멈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파란 젊은 나이에 나는 겪은 것이다.

한 대 맞고 그런 상태였으니 그 다음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시 일으켜서 더 때렸는지, 아니면 나는 기절했으니 그것으로 끝나고 동료 둘은 더 맞았는지 기억이 없다.

그 당시 구타는 너무 심했다. 툭탁하면 집합이었다. 일병이 이등병을, 상병은 일병을, 병장은 상병을 계급별로 집합을 시켜서 군기를 잡아나갔다.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말하는 군기가 제대로 잡혔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그렇게 고참들이 바로 아래를 구타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구타를 당한 자들은 바로 아래를 집합시켜 심한 기합을 주는 것이다. 물론 거의 다 구타로 시작해서 구타로 끝나는 것이다. 구타의 악순환, 나는 부끄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것이 엄청나게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빨리 빨리 시간이 흘러가서 제대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말할 수 없는 공포 분위기에서 그 일을 겪은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됐다. 그런데도 아직 군대는 그런 잘못된 분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아 끊임없이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 그리고 부대마다 다르겠지만 그런 비인간적인 악습을 철저하게 뿌리 뽑아야 그런 문제가 사라질 것이리라.

아들이 곧 부대로 돌아간다. 아무 근심 없는 편안한 얼굴을 제대하는 그 날까지 보여주었으면 참 좋겠다. 고참의 횡포, 구타는 마치 딴 세상 이야기로 여기는 아들을 보며 지금 복무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복무할 군인들이 모두 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병영 구타의 추억



태그:#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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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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