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의 첫인상
벨리코 투르노보에서 소피아로 가는 길은 꽤나 멀다. 국도를 타고 야블라니차까지 140㎞를 간 다음 그곳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소피아까지 110㎞를 가야하기 때문이다. 총 거리가 250㎞지만, 발칸산맥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3시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중간에 휴식시간을 감안한다면 3시간 15분 정도는 잡아야 할 것같다. 차는 처음에 발칸산맥 북쪽 구릉지를 달린다. 이곳 역시 노란 해바라기가 끝없이 펼쳐진다.
그리고 야블라니차부터는 고속도로로 들어서 발칸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도로가 좋아서 그런지 산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다리와 터널이 있어 도로가 그렇게 구불거리지도 않는다. 오후 6시 45분쯤 소피아 시내로 들어서게 되었고, 오후 7시쯤 시내 동쪽에 있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성당 앞에 내릴 수 있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성당은 소피아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러시아 건축가 포메란체프에 의해 1912년에 건립되었다.
우리는 성당 외관만을 구경하고 성당 옆의 공원을 지나 라콥스키 거리로 들어선다. 이 길은 차르 오스보보티델 대로와 만나는데 우리가 저녁을 먹을 식당이 바로 그 대로변에 있다. 그런데 그 대로변에 양파 지붕의 러시아정교 교회가 하나 있다. 성 니콜라이 교회다. 이 교회 역시 1912-14년 사이에 러시아 건축가 프레오브라젠스키에 의해 지어졌다. 교회의 한 가운데 금칠한 양파모양의 돔이 두드러지고 그 주변을 네 개의 작은 돔이 감싸고 있다.
이러한 건물을 통해서 불가리아가 전통적으로 러시아와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성당도 러시아와 터키간 전쟁(1877-78)에서 불가리아 독립을 위해 죽은 20만 명의 군인을 추모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지어준 성당이고, 성 니콜라이 교회 역시 내·외부 모두 러시아풍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에는 공산당이 집권해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을 탄생시켰고, 이때부터 친소노선은 더욱 분명해졌다.
1989년 유럽에 불어 닥친 민주화와 자유화 물결로 불가리아 역시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졌다. 1990년 6월 선거를 통해 온건공산주의 계열인 불가리아 사회주의자당이 집권하였다. 1991년 7월에는 대통령보다 수상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한 헌법이 통과되었고, 새로운 정치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뚜렷한 경제성장과 생활수준 향상을 이루지 못했다.
루마니아는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부진을 돌파하기 위해 2000년대 들어 친서방 정책을 취하기 시작한다. 2004년에는 나토에 가입하였고, 2007년에는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유로존에는 아직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2009년부터 불가리아는 중도우파 정당인 '유럽 불가리아 개발 시민연합'이 승리하여, 당수인 뵤코 보리소프가 수상이 되어 내각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그의 뿌리 역시 불가리아 공산당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불가리아는 동유럽 발칸 국가 중 아직도 사회주의·공산주의적인 요소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소피아 구시가 살펴보기
소피아를 제대로 둘러보는 일은 다음날 아침 시작되었다. 아침에 호텔에서 밖을 내다보니, 멀리 산이 보인다. 그리고 도심지역은 완전 평지로 멀리까지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소피아가 넓은 분지에 자리 잡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소피아는 비토샤산 북쪽 산록에 자리 잡은 도시로, 서쪽으로는 류린산이 위치하고 있다. 우리는 소피아 동남쪽 엑스포 센터에 있는 엑스포 호텔을 나와 구도심 한 가운데 있는 네자비시모스트 광장에서 차를 내린다.
이제부터는 걸어서 소피아 시내를 구경해야 한다. 광장에서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지혜의 여신 소피아 동상과 구 공산당사다. 소피아 여신을 수호신으로 삼은 도시 이름 소피아는 1376년 처음 언급된다. 소피아는 이후 옛 이름 세르디카와 공존하지만, 18세기말 터키로부터 독립하면서 소피아로 고정된다. 소피아 동상이 서 있는 자리에는 과거 레닌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구 공산당사는 전면 기둥을 그리스 신전처럼 코린트식으로 만들었다.
광장을 지나 우리가 처음 찾아간 곳은 노천온천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물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이곳에서 따뜻한 물(46.8℃)에 손을 씻는다. 우리 동양에서 노천온천이라면 발을 담글 생각을 하는데, 서양에서는 손을 씻고 그 물을 먹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통에 물을 받아가는 것이다. 노천온천의 한쪽에는 아폴로 조소상이 서 있다. 일반적으로 아폴로가 의학과 치료의 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천온천 옆에는 멋진 2층의 대중목욕탕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1913년 건설되어 1988년까지 그 기능을 했고, 현재는 소피아 시립역사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하고 있다. 그러나 외관은 옛 목욕탕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흰색 대리석에 붉은색 장식을 넣어 화려함을 더했고 그 위에 둥그런 돔을 얹어 예술적 아름다움을 더했다.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목욕탕 건물 앞에는 분수공원이 있고, 그 건너에 바냐바시 모스크가 있다. 이름 그대로 '목욕탕이 많은' 곳에 있는 사원이다.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던 1576년 건축가 미마르 시난에 의해 세워졌다. 전체적으로 붉은색 돌을 사용했고, 15m 높이의 돔과 1개의 첨탑(미나레트)이 인상적이다. 평상시에는 700명 정도의 무슬림이 이 사원에 모여 기도도 하고 모임을 갖기도 한다. 현재 소피아에는 3만 명 정도의 무슬림이 살고 있다.
오래된 성당과 교회목욕탕 광장을 나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거리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1400년경에 만들어진 성 페트카 지하교회가 나온다. 이 교회는 터키가 불가리아를 지배하기 시작(1393년)한 후에 세워졌기 때문에 지하교회로 만들어졌다. 붉은 벽돌로 만든 1층의 교회로 소박하기 그지없다. 이 교회 앞에는 여러 개의 묘지석이 보인다. 묘지석은 자주 보던 것으로 꽃과 나무 그리고 과일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교회 정문 위에는 성모 마리아가 동방정교식의 십자가를 들고 있다. 교회 안에는 15세기, 17세기, 19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다고 하는데 들어갈 수가 없다. 이 교회를 보고 나서 우리는 성 네델리아 교회로 간다. 성 네델리아 교회는 고대 로마유적인 세르디카 남쪽의 성 네델리아 광장에 있다. 이 교회는 10세기경 목조교회로 지어졌고, 14세기 후반에 석조교회로 변화되었다. 1858년 지진으로 인해 무너졌으며, 이반 보야닌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성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성 네델리아 교회가 소피아 최고의 성당이었다. 1925년 4월 16일 이 교회는 장례식에 참석한 보리스 3세 등 왕실 가족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폭탄 테러로 크게 파괴되었다. 사고 후인 1931년 교회는 건축가 바실리오프와 촐로프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때 실내장식은 조각가 스타미쉐프가 맡았고, 성화는 화가 도스펩스키가 맡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제단 뒤 벽면의 화려한 장식이 눈에 띈다.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운데 금박을 입힌 벽면에 예수상과 마리아상 그리고 그들의 행적을 보여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좌우 벽면에는 가운데 문이 있고, 그 양쪽에 역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밝고 화려하다. 이에 비해 벽면과 돔에는 검은 색조의 이콘화가 그려져 있어,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네델리아 교회를 나온 나와 아내는 소피아 구도심에서 남쪽으로 뻗은 비토샤 거리를 산책한다. 이곳은 소피아 최대의 번화가로 명품 상가들과 카페가 밀집해 있다. 거리에서 가장 먼저 두 마리 사자가 지키고 있는 대리석 석조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불가리아 대법원 건물이다. 그 건너에는 1900년 전후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도 보인다. 20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현대식 건물도 보인다. 그렇지만 이들도 모두 벽면에 예술성을 더했다. 화장품을 파는 가게의 외부 인테리어도 내 눈길을 끈다. 한 마디로 멋지고 재미있다.
이 도로에는 승용차나 버스가 달릴 수 없고 전차만 다닌다. 그렇지만 비토샤 거리와 수직으로 맞닿는 동서방향의 거리로는 차가 다닐 수 있다. 그러므로 교통상 별 문제는 없다. 비토샤 거리 남쪽 멀리로는 비토샤 산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성 네델리아 교회가 보인다. 이 도로가 비토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오스만 터키로부터 독립한 1883년 이후다.
로마시대 유적부터 대통령궁까지 비토샤 거리를 보고 나서 우리는 로마시대 세워진 성 게오르기 교회로 간다. 이 건물은 로마시대 목욕탕과 연결된 원형 건물로 세워졌다. 수도와 난방시설이 잘된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귀족들의 휴게소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원형의 지름은 9.5m이고, 높이는 13.8m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274-337) 때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이 건물은 기독교 교회가 되었다. 이후 서고트족과 훈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 때 재건되었다.
이 교회는 9세기 불가리아 사람들에 의해 성 게오르기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그것은 디아클레티아누스 때 박해를 받다 죽은 성인 게오르기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이때 교회 내부에 불가리아식 벽화가 그려졌고, 1183년까지 불가리아의 수호성인 이반 릴스키(Ivan Rilski)의 유해가 모셔지기도 했다. 그리고 한때 주교좌성당이 되는 등 번성했으나,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으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500년대 초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변해 미나레트가 세워지고 내부도 이슬람 양식으로 바뀌었다. 불가리아가 오스만 터키로부터 독립한 후 이 교회의 이슬람적인 요소가 제거되었다. 미나레트를 철거하고 내부 이슬람 장식을 벗겨 내고 성화를 찾아냈다. 내부의 성화는 불가리아정교 양식으로 그려진 것이어서 회화사에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곳에서는 현재도 미사가 진행되고 있다. 건축구조상 음향상태가 아주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를 나온 우리는 교회와 붙어있는 목욕탕 터로 간다. 이곳은 더 폐허화되어 벽돌로 된 일부 벽과 주추만이 남아 있다. 이들 로마시대 유적은 현대적인 건물들이 감싸고 있다. 서쪽에는 쉐라톤 호텔이 있고, 동쪽에는 대통령궁이 있다. 우리는 대통령궁으로 간다. 마침 근위병들이 교대식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간다. 문장에 보니 사자가 조각되어 있다. 대통령궁 앞에는 광장이 있고, 그 앞으로 알렉산드르 바텐베르크 광장이 펼쳐진다.
이 광장 옆에는 고고학연구소와 박물관이 있어, 고대유적과 문화유산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연구소 앞에는 고대의 주춧돌, 기둥, 묘지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는 이 광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분수대에서는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기 위해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다음에 찾아갈 곳은 소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성벽유적인 세르디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