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저것들이 뭔가 했습니다. 컬러풀한 색상과 요란한 치장,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차선 무시, 정류장 무시를 기본으로 도로를 질주하는 택시도 아닌 그렇다고 버스도 아닌 저것들이 뭔가 말입니다.
지프차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고, 그렇다고 트럭도 아닌 것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승객이 없는 빈차만 골라 타는 것도 아니고, 교차로에서 각자의 길로 경로가 바뀌는 걸 보면 정해진 규칙이 있는 듯 보입니다.
지프니가 필리핀에 등장한 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라고 합니다. 최초의 지프니는 전쟁이 끝나고 미군들이 남겨두고 간 수백 대의 군용 지프차를 솜씨 좋은 필리핀 사람들이 여러 명의 승객들이 탈 수 있도록 좌석을 늘리고, 지붕을 만들어 개조한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중고 자동차 엔진과 두꺼운 함석, 알루미늄을 이용해 차체를 만듭니다. 보닛(bonnet, 본네트라 알고 있는 부분)에는 '벤츠' 마크를 달고 엔진은 한국산, 몸체는 필리핀산 함석, 핸들도 한국산이 많습니다. 속도계는 아예 없고, 연료 미터도 없습니다. 가끔 운전석 밑에 있는 연료탱크의 주입구를 열고 막대로 찍어 연료를 확인합니다. 오늘은 벤츠, 내일은 혼다, 아우디를 골라 타는 재미가 있습니다.
거지처럼 보여서 돈을 주는 게 아닙니다
길거리에 난무하는 지프니를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잡아탈까요? 지프니 앞 유리와 옆면에는 행선지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지프니는 우리의 노선버스와 같은 역할을 한답니다. 일로일로 시내에만 20개 정도의 주요 노선이 있는데 가는 방향을 확인한 후 목적지만 맞으면 택시처럼 잡아타면 됩니다. 아무 곳에서나 손만 들면 세워줍니다. 정해진 정류장은 없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마을입구나 쇼핑몰처럼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 자연스럽게 지프니가 와서 섭니다.
요금은 7.5페소, 우리 돈으로 200원이 안됩니다. 일단 뒤로 올라타고 운전사에게 요금을 건네줘야 하는데, 굳이 뒤쪽에서 앞쪽에 있는 운전사에게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손님들이 릴레이식으로 전달해 주고, 거스름돈도 그렇게 전달해서 받습니다. 안쪽에 앉았는데 옆 사람이 돈을 준다고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거지처럼 보여서?'라고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자연스럽게 운전사에게 전해주면 됩니다.
교회 의자 같은 긴 의자에 우리나라 지하철처럼 마주보고 앉는데 20명 정도 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뒤에 매달려 갈 수도 있고 승객들 무릎 사이에 쪼그려 앉을 수도 있고 더러는 지붕에도 앉아 갈 수 있어 규정된 정원은 없는 셈입니다.
내릴 때도 아무 곳에나 내리면 됩니다. "빠라~"라고 외치면 쏜살같이 차를 세워줍니다. "빠라"를 잊어도 관계없습니다. STOP(스톱)이라고 외치거나 천장을 손바닥으로 두드려도 됩니다. 특히 우리 같은 외국인은 어물어물 내리는 시늉만 해도 옆에 앉은 필리핀 사람들이 내리냐며 대신 "빠라"라고 말해줄 겁니다. 열대나라에선 한발자국만 걸어도 더운데 아무 곳에서나 내리고 타니 참 편리합니다.
하지만 지프니는 쾌적한 승차감은 포기해야 하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창문이 없어서 먼지와 매연을 그대로 마셔야 하고(손수건이 필요합니다), 뜨거운 태양에 달궈진 양철 지붕임에도 에어컨이 없어 무지 덥고, 난폭운전과 역주행, 포장도로를 벗어난 갓길 운행이 일상이기 때문에 심하게 덜컹거립니다. 더구나 오래된 차량이 많고 엔진의 노화로 인해 지프니는 대기오염의 주범으로 몰려 구박받고 있습니다.
필리핀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필리핀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지프니 기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운전기사의 사명은 운전을 잘하는 겁니다. 지프니 기사의 운전 실력은 역주행에 끼어들기, 추월하기, 급정거, 도로 한가운데 막아서기까지 과히 환상적입니다.
지프니 기사는 운전은 물론 호객행위, 차비 계산, 차량정비까지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일단 달리면서 길에 서 있는 손님을 눈여겨보고, 목적지가 같은 손님 앞에 차를 세워야 합니다. 차를 세울 때는 뒤를 보고 같은 경로를 가는 다른 지프니가 있다면 '절대' 추월하지 못하도록 막고 세워야 합니다.
손님이 타면 차비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거스름돈을 내주어야 하는 손님이 대부분입니다. 지폐는 받아 돌돌 말거나 왼손가락에 일일이 접어 넣고, 팔을 뒤로 뻗어 거스름돈을 내어줍니다. 도중에 비가 내리면 차를 세우고 차창에 말아놓은 비닐커튼을 풀어내려야 합니다. 손님의 "빠라~" 소리를 놓쳐서도 안됩니다. 재활용 엔진을 올린 지프니는 틈틈이 냉각수를 보충하는 것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정말 지프니 기사는 눈 코 뜰 새가 없습니다.
너 소매치기였니? 다음에 만날 땐 3인조 어때?필리핀에 사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탑니다. 가족들도 지프니가 소매치기가 많아 위험하다며 제발 택시를 타고 다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차량을 타고 낯선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이국의 정취를 느끼게 합니다. 무엇보다 택시 요금은 지프니보다 10배 이상 비쌉니다.
그날은 지프니를 타고 재래시장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젠 지프니 앞 유리에 붙어있는 행선지를 보고 골라 탈 정도니 절반은 필리핀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합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2명의 필리핀 남자들이 탔는데, 한명은 제 옆자리에 다른 한명은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지프니를 탈 때 여러 명의 남자가 한꺼번에 타면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소매치기의 표적이 됩니다. 말을 걸거나 심하게 장난을 쳐서 정신을 빼놓거나, 옆에 앉아서 심하게 자리를 좁혀오면서 지갑을 훔쳐갑니다. 특히 남자들 뒷주머니 속 지갑이나 고급 휴대폰, 카메라를 좋아합니다.
맞은편에 앉은 놈(정체를 알았으니 '놈'이라 부르겠습니다)이 차비를 꺼내다가 그만 동전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친절한 한국인의 정신으로 허리를 숙여 발밑에 동전을 주워 주었습니다.
"고마워. 근데 너 발밑에 동전 하나 더 있어.""(고개를 숙여 봤는데 없습니다) 아니, 없어.""저기 아래 있잖아.""(옆에 앉은 놈에게) 니가 한번 봐. 없지?"그 순간 내 가방에서 옆에 앉은 놈(앞에 앉은 놈과 일행인 것을 압니다)의 손과 내 지갑이 함께 나오는 현장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너 뭐하니?""(현행범으로 딱 걸린 놈) 아... 아니 너에게 주... 주려고 꺼낸 거야."순간 머릿속에 '지프니 채로 경찰서로 가자고 해?', '소매치기에 실패했으니 나에게 보복하면 어쩌지?', '여기서 내릴까?' 오만 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하지만 나는 외국인이고 그들이 가져간 건 왕복 지프니 값만 들어있는 동전지갑이었습니다. 집에서 나서면서 큰 돈은 바지 주머니 깊은 곳에 깊숙이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거 지프니 차비인데.""그...그래." "돌려 줄 수 있니?""어... 그...그래." 녀석들 동전지갑을 건네주더니 두 놈이 동시에 지프니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소매치기에게 지갑을 돌려달라고 말하는 만용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지갑을 돌려주는 소매치기의 이해심(?)은 또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지프니에서 내린 녀석들도 어이없다는 표정입니다.
얼마 전 또 지프니를 타고 가는데 길에서 서성이는 그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한 놈이 알아보고 턱을 까딱 들며(필리핀 인사법입니다) 아는 체 하더니, 옆에 놈도 이내 인사를 합니다. 어이가 없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보코쥬스(코코넛 과즙으로 만든 음료)나 한잔 마시면서 '3인조' 결성을 의논해봐야겠습니다. 현행범으로 걸렸어도 웃으며 인사하는 '긍정적' 여유는 어디에서 오는 건지 물어나 봐야겠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필리핀 사람들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대기오염의 주범이라 구박받고 있지만 여전히 필리핀 생활에서 없어선 안 되는 필리핀의 명물 지프니는 오늘도 이렇게 '글로벌'한 인연을 만들어주며 힘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지프니 탑승 팁 |
1. 요금은 1인당 7.5페소, 하지만 8페소를 내면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다. "바얏호"하며 돈을 내면 된다. 5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는 1페소 (한화25원) 할인해준다. 뒤에 매달려도, 천장에 올라타도 요금은 같다. 고속도로를 뛰는 장거리 지프니는 30페소 이상인 것도 있다. 2. 지프니에 사람이 차지 않으면 20~30분씩 멈추고 기다릴 때도 있다. 3. 승객이 원하는 곳에 내릴 수 있다. "빠라~"라고 외치면 그 자리서 급정거 한다. 주먹으로 천장을 치거나, 동전으로 손잡이를 탕탕 두드려도 된다. 운전사가 나이가 있어보이면 "빠라뽀 "하면 좋다. '뽀'는 경어다. 4. 정원이 18명이라는데 보통 20명은 넘게 태운다. 상당히 비좁다. 비가 오면 승객쪽 창문의 비닐커버를 내려 습식사우나가 된다. 5. 조금이라고 먼지와 매연을 피하려면 손수건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필리핀 거주년수를 측정하는 방법, 맨 얼굴로 지프니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시원(?)하게 맞고 있으면 1년 미만이다. 6. 소매치기를 조심하자. 남자 몇 명이 갑자기 올라타 근처에 앉으려 한다면 조심! 양쪽에서 자리를 좁혀오면 경계! 갑자기 말을 걸면 위험! "빠라"를 외치고 재빨리 내려라. 7. 하루에 1500~2000페소를 지불하고 지프니와 운전사를 통째로 빌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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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리핀에서 현지인처럼 살기' 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우리 가족의 필리핀 정착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