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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연주 전 KBS 사장.
 정연주 전 KBS 사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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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쯤 언론인 정연주를 처음 만났다. 한국언론재단에서 주최한 대안언론 기자들의 모임에서다. <한겨레> 논설주간으로 한국에 돌아온 지 1년쯤 됐을 때다. 그는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11년을 포함해 2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다왔다.

언론계 선배이자 강사로 이날 모임에 참석했던 그에게 뒤풀이 자리에서 물어봤다. '오랜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온 소감이 어떠하냐'고. 그는 "오랫만에 개구리 울음 소리를 들으니 '내가 한국에 왔구나'라는 느낌이 든다"며 향수에 젖었다. 그는 젊은 후배 기자들과 즐겁게 어울리며 밤새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는 몰랐다. 인간 정연주의 인생 역정이 어떠했는지, 언론인 정연주의 나이테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저 <한겨레>의 종잇값을 올려놓았던 대표적인 기자이자 칼럼니스트였고, 후배 기자들에게 글쓰기의 귀감이 되었던 선배라는 사실밖에 아는 게 없었다. 신문 지면에서만 그를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정연주 칼럼은 고인이 된 리영희 교수, 김선주 전 논설주간의 칼럼과 함께 <한겨레> 독자 입맛을 까다롭게 만드는데 이바지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펴냈던 <서울-워싱턴-평양>(2002)이라는 책을 읽었다. 리영희 교수의 자전적 에세이 <역정-나의 청년시대>처럼, 그 책은 '죽비'였다. 개인과 시대의 만남, 불합리·몰상식과의 싸움, 고통스러운 인내, 포기하지 않는 원칙, 역사 발전에 대한 낙관…. 두 사람의 글과 삶은 닮았다. 책을 덮고나니 정연주라는 사람에게 한발짝 더 다가간 느낌이었다.

리영희와 정연주, 두 사람의 글과 삶은 닮았다

지인들에게 <서울-워싱턴-평양>이라는 책을 권하려고 해도 절판돼 구할 수가 없었다. 개인의 기록을 넘어서 시대의 기록이었는데, 안타까웠다. 최근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서울-워싱턴-평양>을 크게 고치고 보완해 더욱 탄탄하게 엮은 책 <정연주의 기록>(유리창)이 새로 출간된 것이다. 부제에서 보여지듯이 이 책은 '동아투위에서 노무현까지'의 생생한 기록을 담고 있다. 이 책의 화자는 정연주이지만, 그를 둘러싼 언론 환경과 시대 상황이 씨줄 날줄 엮이며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

개인사이건 시대사이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과거도 한때 현재였고, 현재도 곧 과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과거-현재-미래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시계바늘을 움직인다는 걸 안다면, 과거의 무게가 미래 못지 않게 중요하게 다가온다.

<정연주의 기록>에 나타난, 1970년대 동아투위의 활동은 박정희 정권 아래서 말살됐던 언론자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그 오래된 과거는 이명박 정권 아래서도 또다른 모습으로 자본잠식 당하듯 사라져가는 언론자유의 현주소와 맞물린다. 국민의 감시가 약해졌을 때 언론과 권력은 언제든 부정한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 당신들이 무기력과 굴종의 깊은 늪에 빠져 있는 동안, 이 땅에는 너무나 엄청난 비극이 거침없이 함부로 저질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억눌리고, 금력에 우롱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에 허덕이며 갈 길을 찾아 거리를 방황하는데도 그들의 신음과 고통을 감싸주고 치유해주어야 할 당신들은 이를 외면하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습니다. 당신은 이들의 핏발 선 눈동자를 보지 못하십니까? 당신은 외치다 외치다 끝내 아무런 메아리 없어 지치고 쉬어버린 저 서러운 목소리를 듣지 못하십니까? ……." (월간 <대화> 1977년 10월호)

30대 초반이었던 <동아일보> 해직기자 정연주가 쓴 글이다. '재벌의 마름 신세가 된 언론계 간부들에게, 잘 길들여진 서커스단의 곰같은 기자들에게' 보낸 편지 글이었다. 이 글이 빌미가 돼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대화>는 폐간됐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당시 이 원고를 검토했던 송건호 선생(<한겨레> 초대 사장, 작고)의 말처럼 "이 원고는 1970년대 한국 언론을 증언하는 중요 문건"이 되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30년 후 KBS 사장이었던 정연주는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아' 이명박 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임되는 또다른 해직 사태를 겪었다.

'조폭언론'의 저작권자, 동갑내기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

박정희 정권 아래서 '감방'에 갇히고, 전두환 정권 아래서 '수배자'로 살았던 정연주는 1982년 '자의 반 타의 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서른여덟의 나이에 새롭게 경제학 공부를 시작해 대학 강단에도 서고, 경제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러던 차에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면서 제2의 기자 인생을 시작했다. 1988년 통신원으로 <한겨레신문>과 인연을 맺고, 1989년에는 워싱턴 특파원으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 특파원 첫 해부터 사회주의 붕괴와 냉전 구조의 해체라는, '격동'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 국내에서는 '통일의 꽃' 임수경의 방북과 공안통치가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북핵을 둘러싼 남북 간의 첨예한 갈등은 그가 워싱턴 특파원을 하면서 내내 밀착할 수밖에 없었던 사안이었다. 워싱턴에서 11년 동안 특파원으로 지내며 그는 미국과 한반도에 대해 더욱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정연주의 기록> 6부 '워싱턴-서울, MB와 부시' 편은 워싱턴 특파원의 경험과 날카롭게 현실을 직시하는 칼럼니스트로서의 직관이 잘 결합돼 있다. 논설주간 당시 정연주가 쓴, 2003년 이라크 침략과 미국의 일방주의를 경고하는 '야만의 시대'라는 <한겨레> 사설에 대해 리영희 교수는 "한국 언론사에 '시일야방성대곡' 이래 첫 명사설로 후세에 길이 빛날 것"이라고 극찬했다.

지금은 보통 명사처럼 돼버린 조·중·동과 조폭언론이라는 표현의 저작권자도 정연주다. 2000년 10월 11자 <한겨레> 칼럼 '한국 신문의 조폭적 행태'에서 탄생했다. 조폭언론과의 싸움 과정에서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고, 이후 KBS 사장에 취임해 주류 매체 안에서 언론개혁이라는 숙제를 풀어나갔다. <정연주의 기록>을 통해 새롭게 공개한 '바보 노무현'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는 쓰는 이나 보는 이, 모두를 아리게 하는 대목들이 적잖게 나온다. 공교롭게도 노무현과 정연주는 동갑내기다. <정연주의 기록> 맨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인간적이다. '잘 가시라 노무현, 나의 좋은 친구'.

 2010년 4월 9일 정연주 전 KBS 사장이 투병중인 리영희 전 교수를 찾아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2010년 4월 9일 정연주 전 KBS 사장이 투병중인 리영희 전 교수를 찾아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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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정연주의기록#노무현#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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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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