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8일)은 고(故) 김대중 대통령님 2주기가 되는 날이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님 생전에는 그분으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바른 가치들을 학습받았고, 그분의 별세 후에는 그분과 연관하여 내 노친을 심각한 병마에서 구출해낼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
내 모친은 올해 연세 88세, 김대중 대통령님과 동갑이신 분이다. 지난 2009년 6월 서울성모병원에서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임파선에도 암이 있다고 했다. 호스피스 병동에 열흘 가량 입원했다가 퇴원할 때는 여생이 6개월 정도라는 말을 들었다.
음식을 드실 수 있는 동안만이라도 맛있는 음식들을 드시게 할 생각으로 매주 외식을 했다. 노친이 좋아하시는 여러 가지 음식을 골고루, 번갈아가며 드시도록 했다. 노친은 비교적 음식을 잘 드시는데도, '6개월 여생'을 실감시키듯 점점 수척해지는 모습이었다.
그해 8월 18일, 나는 또 한 번 서울성모병원을 갔다. 완화의학과 담당의사에게 어머니 상태를 보고하고 약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 나들이 길에서 김대중 대통령님의 서거 소식을 들었다. 집에 내려온 나는 과거 그분 생전에 그분에 관해서 지면에 썼던 여러 개의 글을 찾아서 일일이 읽어보았다.
그리고 장례가 끝난 직후 그 분을 추모하는 뜻으로 세 개의 글을 인터넷 매체에 차례로 올렸다. <태안신문>은 <오마이뉴스>에 오른 글 하나를 전재했고, 포털 <네이버>는 내 블로그를 메인면에 노출시키기도 했다.
중국 복건성에서 사시는 분의 전화를 받았다. 여자분이었다. 내게 감사를 표하면서 내 건강상태를 묻는 것이었다. 2008년 태안 앞바다 원유유출사고 때 과로로 '세균감염'에 의한 병을 얻어 고생을 했지만 나보다도 어머니가 문제라고 답했고, 어머니 상태를 자세히 말해 주었다.
그분은 중국에서 유명한 대체의학전문가인 주욥 박사의 한국인 부인이었다. 그분은 지레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보기를 권하며 여러 차례 전화와 메일로 식이요법과 대체의학 방법들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우리 부부는 즉시로 노친께 식이요법과 여러 가지 대체의학 방법들을 시행했다. 기연가미연가한 가운데서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런 방법들이 있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는데도 시도를 하지 않으면 훗날 필경 후회를 할 터이니, 한을 남기지 않으려는 뜻이기도 했다. 말이 쉬워서 식이요법이고 대체의학이지 그것은 본인은 물론이고 온 가족의 노고와 정성의 집합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도 절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9월 23일, 나는 모친을 서울성모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다시 정밀검사를 받았다. 컴퓨터 모니터를 보던 담당의사는 깜짝 놀라며 "폐가 깨끗해졌어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어머니를 모시고 내려오면서 비로소 폐암 말기였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가족 모두에게 기쁘고 편안한 생활이 이어지던 11월 1일, 노친은 갑자기 골반 통증으로 걷지를 못하더니 급기야는 아예 일어서지도 못하게 되고 말았다. 즉시로 다시 서울성모병원으로 모셨다. 골반통증의 원인을 찾기 위한 정밀검사가 시행되었다.
병명은 '암세포 골반 전이, 암세포 확장에 의한 골절'이었다. 엉덩이뼈로 전이된 암세포가 확장되면서 바로 그 암세포 부위가 골절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엉덩이뼈가 다시 아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정밀검사의 필수사항인 CT 촬영과 MRI 촬영 등을 하느라고 노친께는 거듭 조영제가 투입되었다. 지칠 대로 지친 노친은 여러 날 배변을 하지 못했다. 오래 배변을 하지 못하니 폐가 부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체의학을 조금 습득하는 과정에서 폐가 대장과 짝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심장은 소장과, 간은 쓸개와, 위장은 비장과, 신장은 방광과 짝을 이룬다고 했다).
의료진은 노친이 며칠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고, 호스피스 병동 간호수녀님은 임종이 임박한 환자 보호자들에게 실사하는 교육에 나도 불렀다. 나는 간호수녀님의 교육을 받으며 지레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일찍 장만해두었던 웅담과 흑마늘 엑기스를 노친께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그리고 간호사들에게 노친의 관장을 요구했다. 관장 등의 특별한 일은 환자 보호자의 강한 요구에 의해서 좀 더 쉽게 시행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관장에 의해 한 번 배변을 하게 된 노친은 조금씩 간격을 두고 여러 차례 배변을 했다. 일주일 이상 보지 못했던 숙변이 모두 배출되자 노친의 얼굴에 회생의 기미기 돌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중국 복건성 주욥 박사 소개로 바이오 기공수를 만드는 기계를 구입하여 사용했다. 회전전자파를 지속적으로 방출하는 기계 위에 플라스틱 물병을 4시간 정도 올려놓으면 물이 임산부 자궁 속의 양수와 똑같은 성격의 물로 변하는 기계였다. 나는 그 기계로 계속 기공수를 만들어 노친은 물론이고 같은 병실의 모든 환자들에게도 제공했다.
주욥 박사는 또 한 가지 정보를 내게 알려주었다. 수원 아주대학교 오흥국 교수가 개발하여 임상실험중인 회전전자파광합성 녹말을 구해서 써보라는 조언이었다. 나는 즉시 아주대학교를 가서 오 교수를 만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아주대학교를 가곤 했다.
고비를 넘기고 점차 상태가 좋아지신 노친은 그러나 여생이 2개월이라는 말을 듣고 11월 31일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을 떠나 태안의 서해안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 나는 서해안요양병원이 집에서 가까운 덕에 하루 세 번씩 요양병원을 다녔다.
바이오 기공수와 회전전자파광합성 녹말을 지속적으로 사용했고, 고가의 웅담은 계속 공급하지 못했지만 흑마늘 엑기스와 환 복용은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또 홍삼은 물론이고, 홍경천차와 나한과차를 사용하기도 했고, 온열치료기를 이용하면서 병원에 갈 적마다 안마와 지압에도 신경을 썼다.
드디어 노친은 완쾌되어 호스피스 병동과 요양병원을 합해 입원생활 8개월 만인 지난해 2010년 7월 5일 퇴원을 하셨다. 말기 폐암과 임파선 암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암세포가 전이되어 확장되면서 골절되었던 엉덩이뼈도 아물었다. 다시 당신의 두 다리로 걷게 되신 것은 물론이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시는 노친은 특별히 아픈 데도 없고, 식사도 잘하시고, 주일마다 성당에 가신다. 가족 외식행사와 한 달에 두어 번씩 갖는 덕산온천 목욕행사에도 늘 함께 하신다.
천주교 신자로서 당연히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기지만, 내게 대체의학 방법을 시행하도록 해주신 중국 복건성의 주욥 박사(가수 주현미씨 작은 아버지) 부부와 수원 아주대학교 오흥국 교수께도 감사한다. 그리고 그 모든 인연들의 시초를 열어주신 고 김대중 대통령님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덧붙이는 글 |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린 글입니다. 이미 여러 번 <오마이뉴스>에 부분적으로 소개된 내용입니다만, 고장에서 내 노친의 병구완에 대해 묻는 분들이 있어 고장의 많은 분들에게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전체적인 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