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참정권을 확대하기 위해 공무원과 교원이 개인자격으로 정당에 가입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 1998.3.11 <경향신문>
"일반직 공무원과 교원의 정당가입을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 1999.9.10 <매일경제>
정당에 월 5000원~1만 원의 후원금을 기부했다는 이유로 교사·공무원 1647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1998년과 1999년에 교사의 정당가입과 정치자금 후원을 허용하는 방안을 정부가 추진했던 것이 확인되었다.
1998년 당시 여권인 DJ정부와 새정치국민회의(현재 민주당)는 국민의 참정권을 확대하는 차원에서 교사와 공무원의 정치후원금뿐 아니라 정당 가입을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당시 자유선진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자민련도 동의하여 함께 이 방안을 추진했다. 경찰과 군인, 소방공무원 등은 정당 가입 대상에서 제외했다.
민주당, 특별한 이유 없이 야5당 정책협의회 불참
하지만 민주당은 13년 전 DJ정부의 견해를 뒤집고 여기에 훨씬 못 미치는 안을 최근 들고 나왔다.
지난 8월 3일 민주당 손학규, 민주노동당 이정희, 창조한국당 공성경, 진보신당 조승수, 국민참여당 유시민 이상 야5당 대표들이 직접 여의도 국회 본관에서 한진중공업 문제와 교사·공무원 집단 기소 등 노동현안 해결을 위한 야5당 대표 긴급 회동을 하고 합의문을 발표했다.
야5당 대표들이 직접 만나서 이런 합의문을 발표한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야5당이 합의한 두 번째 내용은 "우리 야5당은 한진중공업 문제와 교사·공무원의 정치기본권 확대 등 긴급 노동현안의 책임 있는 해결을 위해 야5당 정책협의회를 구성하여 운영한다"이다.
이 합의에 따라 9일 정책협의회 첫 모임을 열기로 했다. 이 모임은 내년 총선과 대선 승리를 위한 야권 연대의 교두보일뿐 아니라 교사·공무원의 정치기본권 확대를 위한 중요한 계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날 첫 회의에 민주당은 특별한 이유 없이 불참했고, 나중에야 일정을 몰랐다고 해명했다.
12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정세균 최고위원은 "민주당이 야권통합을 말하면서 5당 대표의 합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면서 "교사·공무원의 정치기본권 보장을 위한 정책협의회 참가 약속을 지키고 8월 국회에서 정치자금법 등 관련법 개정에 나설 것"을 민주당 지도부에 요구했다.
당시 민주당은 비공개 토론을 통해 "교사·공무원의 정치기본권 입법 필요성은 절감한다. 정치자금법 8조 1항 개정안을 내는 것을 당 입장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정도의 원칙만 확인하는 수준에서 관련 내용을 정리했다. 이후 이인영 최고위원이 정책협의회에 민주당 대표로 참가하기로 했다.
교사는 국회의원 정치자금이나 대라?
민주당 소속 법사위원장인 우윤근 의원도 "교사·공무원 정치기본권 관련 법 개정의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협조하지 않는 한 법 개정은 사실상 불가능한데 한나라당이 반대하고 있다고 난색을 보였다.
그런데 22일 교사공무원정치기본권찾기공동행동(이하 정치기본권공동행동)의 복수 관계자들에 따르면 민주당은 사실상 교사·공무원의 정당 가입과 정당 후원을 허용할 수 없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특히, 이번 8월 국회에서 청목회 관련 법안으로 재판을 받거나 기소를 앞둔 국회의원들이 100명이 넘는 상황인데, 단체와 법인 관련 정치자금을 허용하는 정치자금법 개정(이른바 청목회법)만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관계자에 따르면 우윤근 법사위원장실에는 이미 김진표 원내대표의 "그렇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고 한다.
정치기본권공동행동과 민주노동당 등의 강력한 반발에도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 측이 내놓은 안은 "이번 8월에는 교사·공무원의 정치인 후원만 허용하는 것으로 정치자금법을 개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교사·공무원의 정치기본권 확대라는 기존 약속을 뒤집은 것으로밖에 볼 수 없는 안이다.
사실 지금도 정치자금법상에는 교사·공무원이 개인적으로 국회의원 정치자금을 후원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 그러나 국가공무원법과 복무규정으로 금지하고 있다. 즉, 교사·공무원의 국회의원 후원이 가능하도록 정치자금법이 개정되어도 국가공무원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여전히 불법 소지가 남는다는 의미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이것이 정치기본권 확대인가라는 물음이다. 민주당이 말하는 교사·공무원의 정치기본권 확대는 기껏 "국회의원이 교사·공무원에게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에 불과하냐"는 비판도 나온다.
22일 저녁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교사공무원정치기본권찾기 촛불집회에 참석한 경기도의 한 교사는 "교사의 정치기본권 보장을 말하던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교사는 자기들 정치자금이나 대라는 것인지 묻고 싶다"며 "김진표 의원 지역구 사무실 점거 농성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김진표 안은 황우여 등 한나라당 의원 면제부 주자는 안
정치기본권이라 하면 당연히 정당 가입, 정당 후원, 정치인 후원, 공직선거 출마, 선거 운동, 정치적 의사 표현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 그런데 민주당이 허용하겠다는 것은 이중 딱 하나, "교사와 공무원의 국회의원 정치자금 지원 허용"이다.
왜 민주당에서조차 이런 내용이 나왔을까에 대해 여러 추측이 나온다. 그 가운데 "한나라당과 청목회 법안을 주고받기한 게 아닌가"하는 의혹도 있다. 현재 한나라당의 황우여 원내대표, 김정권 사무총장, 이군현 전 수석부대표, 김학송 의원 등이 교장 등 교사에게 수백에서 수천만 원의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확인되었다.
청목회 관련 정치자금으로 현재 민주당의 강기정, 한나라당 유정현 의원 등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 외에 소위 쪼개기 후원금으로 기소를 앞둔 의원들이 120명에 이른다고 한다. 만약 이들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벌금 100만 원 이상 형의 선고를 받으면 다음 총선에 출마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청목회 관련 법 개정에 절박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자금법을 개정하여 교사의 국회의원 후원을 허용하면 황우여 원내대표와 김정권 사무총장 등은 형사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또 단체와 법인의 정치자금을 허용함으로써 청목회와 쪼개기 후원금 관련 형사 처벌 위기에 처한 국회의원들 역시 기소를 면하거나 무죄를 주장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김진표 원내대표가 내놓은 '교사 공무원의 국회의원 후원만 허용하는 정치자금법 개정안'은 형사 처벌 위기에 놓인 여야 의원들의 살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김선동 민주노동당 의원은 22일 '후원회 회원 가입 대상자 확대'와 '지정 기탁금제 신설'을 주요 골자로 하는 '정치자금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은 선거위를 통한 기탁금을 정당을 지정하여 낼 수 있도록 하는 "지정기탁금제"를 신설하고, 교사·공무원도 후원회원의 자격으로 국회의원에게 정치자금을 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안 역시 교사 공무원의 정치기본권 보장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 정치자금법 개정안은 교사·공무원의 정당 가입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선관위를 통해서 정당이 후원금을 받는 것은 인정하지만 교사·공무원은 정당가입 불허를 전제로 하고 있어 정치자금 후원 이외에 어떤 정치적 권리도 인정받지 못한다.
이 안은 또 다른 문제도 갖고 있다. 이미 민주노동당은 권영길 의원의 대표발의로 지난 2월 교사·공무원의 정당 가입과 정치자금 후원 등을 허용하는 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제출하였다. 이정희 대표도 이런 견해를 수차례 확인했다. 그런데 이번에 제출된 안은 그런 당론에 정면으로 배치되거나 대폭 후퇴한 것이다.
이번에 정치자금 후원으로 기소된 서울의 한 교사는 "민주노동당까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교사의 정당 가입은 물론 정당후원회 가입도 허용하지 않는 안을 어떻게 민주노동당이 제출할 수 있느냐. 그럼 지금 정당후원회에 월 1만 원씩 낸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구제를 받느냐"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국회의원만 살겠다고 교사·공무뭔 버리나
민주당, 특히 김진표 원내대표가 한나라당과 함께 청목회 법안만 8월 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한 것이나 교사·공무원의 국회의원 후원만 허용하는 법안을 들고 나온 것은 여야 의원들만 살겠다는 꼼수로 보인다.
그리고 교사·공무원들에게 국회의원들이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면서도 현재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1647명의 교사·공무원들을 구제하는 일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13년 전인 1998년에도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추진하였던 교사·공무원의 정당 가입과 후원 허용을 지금에 와서는 못하겠다는 민주당의 말 바꾸기와 모르쇠가 8월 국회에서 어떻게 결론이 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