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1일 독립예술축제인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서막이 올랐다. 1998년에 시작된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은 연극이나 음악무대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독립예술을 지원하며 소개하고 있다. 이번 페스티벌에서는 사회문제를 소재로 한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이주노동자와 레즈비언의 이야기도 작품 중에 포함돼 있다. 무대 위에서 그들은 어떻게 재현되고 전달되고 있을까. 두 편의 연극에서 그들을 만나보았다.
# <목소리> 이주노동자는 입 없는 청자?... 소통의 본질을 묻다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목소리>는 파키스탄인 시논과 사장의 대화를 통해 소통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다. 1980년대 중후반까지 인력을 수출하던 한국은 2011년 이주 노동자 100만의 인력 수입국이 되었다. 하지만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은 파키벌레,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붙이며 살아간다. 그들의 임금 체불과 산업재해 등의 문제에는 그래도 적지 않은 이들이 나서 해결하려 하지만 정작 그들과의 소통과 인식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시논은 일하다가 손가락이 세 개가 절단된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다. 시논은 산재처리를 하겠다고 하지만 사장은 수주에 차질이 생길까봐 이를 만류하려 한다. 두 사람은 마주 앉지만 실상 대화다운 대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대화는 뚝뚝 끊기기 일쑤이고 사장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잔뜩 내뱉고는 "알아들어?"라고 묻는다. 사장은 시논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를 흡수하지 않는다. 그에게 시논은 입 없는 청자일 뿐인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장은 힌두교인 시논에게 족발과 소주를 권하고 "못 사는 나라가 뭘 그렇게 가려 먹냐"며
무지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연극은 소위 돈 있는 나라의 종교와 언어는 선망의 시선으로, 비교적 가난한 나라의 종교와 언어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한국 사회의 모순된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이라크에서 지뢰파편까지 맞은 한국의 이주노동자였던 사장이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팍팍한 세상, 고립된 사장의 이야기영세한 사업체의 경우 미등록 외국인이 추방되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을 구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대부분이 3D 업종인데다가 많은 월급을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극 중 사장도 시논이 추방되면 당장 어려워질 상황이다. 잘 풀리지 않는 사업,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는 사람들 속에서 '내 편'은 없다는 외로움이 사장을 고립시키고 있었다. 각박한 본인의 생활이 예전의 자신 모습과 닮은 시논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들들 볶는 이유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 사장에게서 우리 아버지, 삼촌의 외로움을 발견한 것만 같아 가슴이 시렸다.
연극에서 한때 시논처럼 이주 노동자였던 사장은 시논 손가락 두 개를 늦게 찾은 게 미안해 잠 못 이루고, 시논은 "나도 너무 힘들다"며 울다 자신의 다리에 기대 잠든 사장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연극은 이런 이야기 등을 통해 관객이 스스로 소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끔 열린 결말을 제시한다.
상대의 마음을 듣고 싶다면 자신을 내보여야 한다. 힘들고 버겁다는 이야기가, 말이 통하지 않는 시논에게도 통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간 소통을 단절시키고 나쁜 사람으로 인식돼 온 사장의 이야기도 들려주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라는 메시지를 준 연극 <목소리>. 우리가 통하고 있다고 생각한 이들과 정말 제대로 된 '소통'을 하고 있는 건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내 또래인 선화의 이야기는 이해할 수 있을까, <분홍박각시나방> 속으로 들어가보자.
# <분홍박각시나방> "레즈비언이어도 난 엄마의 딸"나의 여고 시절, 한쪽 머리를 얼굴을 뒤덮을 만큼 길러 남자 아이돌 분위기를 물씬 풍기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사복을 입을 때면 흰 남방에 까만 넥타이를 즐겨 착용했다. 친구들에게도 당당히 여자를 좋아하노라고 고백했다. 레즈비언이어도 성격만 좋음 됐다는 쿨한 친구들도 많았지만 주변 친구들은 그 아이하면 '레즈'라는 단어부터 떠올렸다.
튀는 아이는 흘기고 보는 여고생들이 레즈비언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당시 레즈비언은 우리와는 다른 유전자를 가진 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요즘도 그 아이를 길거리에서 마주친 친구들은 '아직도 그러고 다닌다'며 '대단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 모습을 일부러 고수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게 그 아이의 정체성인데 우린 여전히 여고 시절 사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 깨뜨린 선화와 아영의 사랑문화인권모임인 맥놀이가 제작한 옴니버스 연극 <분홍박각시나방>은 청춘을 소재로 한 두 가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나는 재회한 고등학교 동창들이 담임선생님에 대한 다른 기억을 털어놓으며 상처를 어루만지는 내용의 연극이고 다른 하나는 레즈비언인 선화와 엄마의 갈등이 주축이 되는 이야기다. 고등학교 시절, 그 아이에 대한 편견을 서슴없이 내뿜던 나를 반성하며 극 중 선화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선화와 아영은 '자기'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저장할 만큼 절친한 사이다. 실제로 초·중·고 시절에는 친구들과 우정반지를 맞추고 러브장을 쓰는 게 우정을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선화는 아영에 대한 감정이 친구 이상의 것임을 깨닫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 친구도 그랬을까? 둘의 사랑이 시작되고 나서 사람들의 냉대에 힘들었을 그 아이가 떠올랐다.
친동생에게도 손가락질 받는 선화친구들이 '레즈년'이라 손가락질하는 것을 견딜 수 없던 아영은 결별을 고한다. 헤어지면서 아영은 "니가 남자였으면 좋았을텐데"라는 말로 선화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사랑을 수습한 선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길 수 없어 엄마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장면에서 나는 문득 학창시절 몇 번 가보았던 그 아이의 집에서 만난 어머니가 떠올랐다. 선화의 집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 집에도 벌어졌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선화는 커밍아웃에 관계없이 난 엄마의 딸이라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달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엄마는 딸이 불행해질까 두려워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다. 처음엔 이해해줄 것처럼 굴던 동생도 평범한 언니가 갖고 싶다며 선화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한다. 선화는 다시 누군가의 딸, 언니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나방의 한 종류인 분홍박각시나방은 죽을 걸 알면서도 형광등으로 뛰어든다. 형광등과 부딪히면서 날개 가루가 흩어지고 나서야 수정이 되기 때문이다. 선화가 맞이할 세상은 분홍박각시나방이 마주하는 형광등과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날개짓을 시작한 그녀의 뒷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선화의 고백과 눈물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인정받기 위한 첫 단추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들을
포용해야 할 대상이 아닌, '공존하는 대상'임을 인정한다면 그녀의 두 번째 단추도 잘 끼워질 것임을 믿는다. 세상으로 뛰어든 선화, 그리고 오랜 시절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동창인 그녀에게도 화이팅을 외쳐본다.
덧붙이는 글 | 박주희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단 '오마이 프리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