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만 명의 인구에 남한의 반 정도 되는 면적의 라트비아. 그리 크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 나라는 상당히 복잡다단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라트비아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수백 년 동안 독일, 스웨덴, 러시아, 폴란드 등 그곳을 지배한 수많은 나라들이 수도 리가 한가운데 남겨놓은 침략의 흔적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구시가지를 기억할 것이다. 소련의 지배를 받던 때 대거 이주해온 러시아 유민들 문제는 여전히 신문의 국제면을 장식하는데, 이는 이 나라에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음을 알려준다.
라트비아 동부 지역인 라트갈레 역시 자신들만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바탕으로 독립 이후 라트비아와 차별성 있는 지역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라트비아를 구성하는 또 다른 모습이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립을 하기 전까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독립국을 건설하지 못하고 독일이 발트해 연안에 건설한 리보니아(Livonija)라는 나라의 일부분으로 존재했다. 리보니아는 그 후 제정 러시아, 스웨덴 등 여러 나라 사이에서 소유권이 왔다 갔다 하다가 끝내 쇠락했다. 지금은 역사책 속에만 남아 있는 전설이 되었지만, 리보니아는 별도의 기사단까지 갖추고 중세에 발트해의 무역과 정치를 좌지우지한 적도 있었다.
리보니아라는 이름은 1201년 독일인들이 발트무역 거점을 건설하기 위해 리가 앞바다에 배를 댄 후 처음 조우한 민족인 리브(Liv)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리브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지금의 라트비아 일부 해안지대에 집중되어 있어 당시 인구 비율상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던 민족이었으나, 리보니아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리브인들이 졸지에 이 영토의 주인처럼 되고 말았다.
리브인들은 동방 진출을 꾀하던 독일기사단과 끊임없이 충돌했고, 끝내 독일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들에 복속되어 완전히 사라지는 비운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라져 버린 것 같던 민족의 후예가 기지개를 켜며 역사에 다시 등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 수백 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놓여 있던 사람들의 삶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200명 정도에 불과한 리브인, 다시 기지개를 켜다그들이 살고 있다는 마을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리브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라트비아 지도에서 서쪽으로 깔때기처럼 불쑥 튀어나온 부분의 꼭짓점격인 콜카(Kolka)다. 그곳에 가려면 내가 살고 있는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에서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까지 버스로 약 4시간 30분 동안 가고, 그 후 리가에서 콜카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거리는 150km에 불과해 한국 같으면 두 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을 거리이지만, 모든 정류장에 들러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보니 무려 3시간 반이나 걸리는 여정이었다.
어렵사리 찾아간 그곳에서 나는 라트비아 내 리브인들의 권익 보호와 문화 보전을 담당하는 리브인연합회의 대표인 다비스 스탈츠(리브어로 스탈테)를 만나 남쪽으로 13km 더 떨어진 마지르베라는 마을로 이동해야 했다. 전통적으로 마지르베 해안 지대에 리브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리브인연합회의 본부격인 리브문화센터도 그곳에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사는 카우나스에서 마지르베까지 이동하는 데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콜카와 마지르베는 라트비아 최대 국립공원 중 하나인 슬리테레 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다. 그렇지만 이곳의 국립공원은 관광보다 자연 보호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
스탈츠가 대표를 맡고 있는 리브인연합회는 1923년 그의 할아버지격인 카를리스 스탈츠가 설립한 최초의 리브인 연합 단체다. 설립자인 스탈츠는 현재 리브인들의 국가격인 노래에 가사를 붙이고 리브인 운동의 방향성을 설정한 중요한 인물이다.
스탈츠의 식구들은 모두 라트비아에서 리브인의 문화를 홍보하는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특히 아버지인 다이니스 스탈츠는 리가 시의회에서 일하며 라트비아 의회 진출을 노리고 있다. 리브인들에게 정치적 무게를 실어줄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셈이다. 스탈츠의 두 누이 역시 리브인 민요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스탈츠의 말을 들어보면 리브인은 현재 유럽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민족 중 하나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라트비아 전체에서 자신들을 리브인의 후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200명 정도에 불과하고, 그중 고유어인 리브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20명에도 못 미친다.
리브어는 인도-유럽어족의 일파인 라트비아어와는 모든 면에서 확연히 다르다. 동부의 라트갈레어는 한때 라트비아어의 사투리 정도로 치부되었을 정도로 어휘나 문법에 공통점이 많다. 이와 달리 리브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지 않고 헝가리, 핀란드, 에스토니아와 계통이 동일한 핀-위구르어에 속한다. 언어를 놓고 보면 리브어는 라트비아어보다 에스토니아어에 더 가깝다.
하지만 현재 리브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린 시절부터 리브어를 모국어로 사용한 사람 중 생존하고 있는 이는 단 1명으로, 현재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리브어를 구사하는 이들은 얼마 안 되는 노인들로부터 혹은 구전 민요를 통해 언어를 배웠다. 이 때문에 리브인들은 문법책과 사전 편찬 등 리브어 관련 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
스탈츠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콜카와 마지르베 지역에는 리브어를 구사하는 원주민이 꽤 많이 살고 있었다. 19세기 말 핀-위구르어족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진행되면서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에서 많은 학자들이 이곳을 찾아 민속 연구 및 수집 작업을 했다. 당시 수집된 자료에 의하면 라트비아 해안지대에 사는 리브인은 적어도 수백 명에 달했다.
삶의 터전과 말을 빼앗겼던 시련의 세월이랬던 이들이 어쩌다가 불과 몇 십 년 만에 종적을 감췄을까. 이렇게 되는 데 큰 영향을 준 사람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존속했던 라트비아 1차 공화국 시절 권위주의 정치를 한 카를리스 울마니스 대통령이었다. 그는 라트갈레, 리브인 등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장하기보다는 라트비아인의 권위를 최우선으로 하여 '라트비아인이 이끄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라트갈레어와 리브어 등의 사용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
소련 지배 때도 리브인들은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라트비아의 해안지대가 전부 군사지역으로 편입되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면서 리브인들은 생활 근거지였던 바다를 등지고 내륙으로 강제 이주해야 했다.
리브어와는 완전히 다른 라트비아어를 사용해야 하는 환경에서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리브인들은 리브어의 존속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없었다. 원래 내륙에 살았던 라트갈레인들보다 리브인들의 언어 보존 환경이 더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소련 정부는 리브어 관련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리브어를 연구하거나 보존하려 하는 사람은 공공의 적으로 간주돼 시베리아로 끌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공용어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리브어는 의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정에서만 겨우 사용되는 언어로 전락했다.
1991년 라트비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리브인들은 그동안 갈망해온 언어와 문화를 창달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권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라트비아 정부의 지원은 만족스럽지 않았고, 정부 지원 외에 재원을 조달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 여러 어려움에 봉착했다.
"리브어를 배우는 이유? 내 몸에 리브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다행히 리가에 있는 라트비아 대학교와 에스토니아의 타르투 대학교에 리브어를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과정이 생겼다. 리가와 벤츠필스 같은 대도시에서도 리브인들의 연합회와 문화 관련 단체들이 생겨났다. 리가에 있는 대표적인 리브 민요 단체인 리브리스트는 리브인의 춤과 민요를 소개하며 전 세계를 누비고 있고, 마지르베가 속한 둔다가(Dundaga)군의 지역신문에서는 리브어로 기사를 낼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해 주고 있다.
리브어 보존에 노력하는 이들이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강습회다. 1994년부터 마지르베에서 열리고 있는 이 강습회에는 자신을 리브인의 후손이라고 여기고 있는 학생과 젊은이들이 참여해 리브어를 중점적으로 학습한다.
재정 문제 때문에 강습회를 매년 열기는 어려웠지만, 이들은 다음해로 연기하는 한이 있어도 행사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열었다. 올해도 강습회가 열렸다. 올해 강습회에는 20여 명의 학생이 참여했고, 수준도 3단계까지 있을 정도로 질도 향상됐다.
리브어 학습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학생을 만났다. 17세의 마티스 펠드메니스는 리브인 사회에서 촉망 받는 학생으로 손꼽힌다. 어머니가 리브인인 마티스 펠드메니스는 현재 축구를 열심히 하고 있고 비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그는 리브어 강습회에서 언어를 습득하는 것 이외에도 지인들과 리브 음악을 알리는 단체를 만들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라트비아어와는 전혀 다른 리브어를 열심히 배우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마티스 펠드메니스는 "내게 리브인의 피가 흐르는 것 이외에는 어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리브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리브인으로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지 못한 것이라 확신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산타는 소련 시절에 리브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마티스 펠드메니스는 다비스 스탈츠 같은 리브 관련 단체 회원들이나 강습회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만 리브어를 사용한다. 리브어는 여전히 교재나 사전 등이 부족하여 배우기가 어렵다는 점 외에도 사용할 기회도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와 함께 리브어는 대부분 2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컴퓨터, 냉장고, 세탁기 등 그 이후에 퍼진 개념들을 표현할 적당한 단어를 찾기 어렵다. 리브어를 보존하려는 사람들은 그럴 때 라트비아어 단어를 차용해서 리브어화하거나 에스토니아어에서 힌트를 얻고는 한다. 그래서 리브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대부분 에스토니아어도 꽤 잘 구사한다.
강습회에 민요 교육까지... 리브어 부활 노력에 포기는 없다리브어 학습은 구전 민요 교육을 통해서도 이뤄진다. 리브 민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진트라 타우니냐는 콜카에 있는 음악학교에서 리브어 노래를 지도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진트라 타우니냐가 활동하는 리브 민요 단체의 이름은 라울라. 리브어로 '노래하라'라는 뜻이다. 타우니냐는 노래 이외에도 라트비아의 전통 현악기인 코클레(리브어로는 칸틀라)도 강습한다. 타우니냐는 애석하게도 콜카 주변 지역에서 실업률이 급격히 올라가고 경기가 좋지 않아 배우려는 아이들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리브 문화에 대한 관심을 도시에서도 더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 같다. 콜카와 마지르베에 집중되어 있던 리브인들의 문화 활동을 대도시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게 된 데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리브인들을 취재하기 위해 콜카와 마지르베를 방문한 1박 2일의 짧은 일정 동안 내가 만난 리브인들은 동아시아 출신의 기자를 극진하게 대하고, 숙박할 곳이 마땅치 않은 콜카에서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안방까지 내주었다. 매년 이곳을 찾아오는 짧은 여름처럼 아쉬운 만남이었지만, 이방인이 아닌 발트해의 주인공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리브인들의 노력이 계절 변화와 상관없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