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그에게 대선에 출마하지 말라고 사정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시장직을 걸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시의회와 담을 쌓고 '불통'으로 일관하더니,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강행했다.
난데없는 '대선 불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그것으로는 별로 '약발'이 안 먹히자 질질 짜며 시장직을 걸겠다고 무릎을 꿇었다. 단 하나의 목표, '복지포퓰리즘에 맞선 전사' 이미지와 '보수의 아이콘' 브랜드를 쟁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소원대로 '낙동강 전선'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보수의 전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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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아이들 밥그릇 빼앗기에 시장직을 건 희한한 투표 게임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판을 확 키운 '서울판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처음부터 '오세훈에 의한, 오세훈을 위한, 오세훈의 정치도박'이었다. 영화에 비유하면, <조중동>이 기획하고, 복지포퓰리즘추방 국민운동본부 '어버이'들이 대거 엑스트라로 출연한 'B급 영화'였다.
수준 높은 관객은 결말이 빤한 이런 'B급 영화'에 환호할 까닭이 없다. 서울 시민은 오세훈이라는 주연배우를 띄우기 위해 '조중동'과 '어버이'들이 급조한 이 싼티 나는 'B급 영화'를 외면했다. 이제 흥행에 실패한 '도박사 오세훈'을 기다리는 것은 '정치적 파산'이다.
'진보 vs. 보수' 아닌 '상식 vs. 비상식'의 대결무상급식 주민투표는 진보와 보수, 분배와 성장의 대결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이었다. 오세훈은 '여소야대'로 바뀐 서울시의회 상황 자체를 못 견뎌 했다. 그는 서울시의회가 무상급식 조례안을 의결하자, 6개월간 시의회 출석을 거부한 채 주민투표라는 '출사표'를 던지면서 이렇게 천명했다.
"의회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시장이란 정치적 오명을 남기더라도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그 나름으로 비장감을 표출한 것일 터이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도 싶다. 그러나 '의회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시장'은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독재'라는 오명을 듣더라도 '불통'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라면 그런 정치적 오명을 남겨선 절대 안되는 것이다. 오세훈의 비극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2004년 1월 6일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의원이 한나라당 당사의 기자회견장에 섰다. 한나라당내 소장개혁파 모임인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미래연대)' 공동대표로서 총선을 앞두고 '5·6공 인사 퇴진론'을 주장해 물갈이 논란을 증폭시켰던 오세훈 의원이었다. 그는 이날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정치가 아니라 전쟁을 하듯 늘 갈등만 했던 게 부끄럽다."그의 말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불출마 선언에 앞서 지구당 위원장 사퇴, 후원회 해체 주장 등 당시로는 여야를 통틀어 누구보다 개혁적 실천을 해온 대표적 개혁파였기 진정성이 느껴졌다. 서울 강남을 지역구로 둔 그는 한나라당에서 그 누구보다도 공천과 재선이 무난한 의원이었기에 그의 불출마는 울림이 컸다. 그러나 기자의 의무는 국민이 궁금해하는 일말의 가능성마저 확인하는 것. 어떤 기자가 물었다. 서울시장 출마설이 있던데? 그의 답은 이랬다.
"지금 그만두면 그 길로 가나? 그게 연관이 되나? 글쎄, 서울시장 선거가 2년 이상 남았는데 그것을 위해 벌써 그만두는 정치인이 있었나?"오세훈의 '대통령과의 담판'에 담긴 메시지
그 뒤로도 2보 전진(서울시장 출마)을 위한 1보 후퇴(의원 불출마)가 아니냐는 의심을 가졌지만,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울시장 출마가능성을 부인했다. "서울시장은 경륜이 필요한데 나는 충분치 않다"고 겸양을 떨던 그였다. 그로부터 2년 뒤 40대 서울시장 오세훈은 혜성처럼 등장했다. 같은 당 김문수를 누르고 전국 최다득표의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거칠 것 없었던 그는 2010년 선거에선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아픔을 맛보았다. '세빛둥둥섬'으로 상징되는 '디자인 서울'과 '한강 르네상스'에 막대한 세금을 쏟아부은 오세훈에 대한 서울시민의 '경고'였다. 심지어 이명박 정부 감사원조차 지난 6월 '한강 르네상스'의 핵심축인 서해뱃길 사업에 대해 '경제적 타당성이 없는 특혜사업'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전시성 비리 르네상스'에 대한 시민과 감사원의 '경고'를 겸허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의회는 감사원 감사결과를 토대로 '한강 르네상스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관련 사업을 낱낱이 파헤치겠다고 별렀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기자들에게 "서해뱃길 사업을 대통령과 담판을 지어서라도 추진하겠다"고 전의를 불살랐다. 난데없는 '대통령과의 담판'에 담긴 메시지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선배님은 '청계천 브랜드'로 대통령이 되셨지만 저는 '한강 브랜드'로 치적을 쌓아 대통령이 되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박근혜에게 권력을 넘기지 않으시려면 무상급식과 감사원 경고로 궁지에 몰린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한강 르네상스와 서해뱃길을 통해 순조로운 대권 항해를 꿈꾼 그에게 이명박 감사원의 경고는 예상치 못한 암초였다. 그것은 '한강 브랜드 전략'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기에, 그로서는 대권 야심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였다. 그래서 그는 무리를 해서라도 여소야대 상황을 주민투표로 정면 돌파하려고 했다.
'보수 성전의 가미카제' 되라는 조중동 나팔소리에 막차 탄 오세훈 무상급식 주민투표 청구는 오세훈이 밀어주고 '복지포퓰리즘추방 국민운동본부'라는 급조된 단체가 끌어준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이 단체 주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그가 한 때나마 추구했던 '합리적 보수'와는 거리가 먼 '어버이'들의 연합일 뿐이다. 지난 1월 이 단체의 발족식에서 축사를 한 '지도층'의 면면을 보면 그렇다.
이날 보수세력의 단결을 호소한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은 12.12 군사 쿠데타 주범 중 1인이다. 전국에 1000여개 사찰과 250만 신도가 있다는 '삼화불교 조계종'의 총무원장 혜인 스님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선 먹는 것 역시 각기 먹고 싶은 것을 먹어야 하는데 오늘 점심은 모두 우동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 좋은 정책이냐"고 반문했다. '대한불교 조계종'이 아닌 유사 조계종은 거개가 '1인 창업교주'인 경우다. 축사를 한 최연소자인 조전혁 한나라당 의원은 "가장 교육적인 급식은 어머님이 싸주는 도시락인데 무상급식은 일부 게으른 젊은 엄마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부분도 있다"고 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엄밀히 따지면, 단계적이건 전면적이건 의무급식 시행은 서울시교육감의 영역이지 서울시장이 관여할 일도 아니다. 정작 김상곤 경기교육감이 촉발시킨 무상급식 논란의 진원지인 경기도에서는 김문수 지사와 도의회 그리고 김상곤 교육감이 3자대화를 통해 '무상급식' 문제를 '친환경급식 지원'으로 해결했다. 그런데 그는 김문수가 타협한 공간을 '복지포퓰리즘에 맞선 전사'로 자리매김해 '보수의 아이콘'으로 이미지를 굳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했다. '비정한 보수'로 가는 막차였다.
한때 '합리적 보수' '깨끗한 보수' '따뜻한 보수' 이미지였던 그에게 '비정한 보수'로 가는 막차를 타도록 부추긴 것은 <조중동>의 현란한 '나팔소리'였다. 마치 일제하 "대동아 성전에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했던 <동아><조선>처럼, 조중동은 그를 "한나라당 간판급 타자"의 "포퓰리즘에 맞서는 의로운 투쟁"을 넘어 "박근혜-손학규보다 대한민국 발전사에 더 의미 있는 인물"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중앙>의 김진은 '오세훈의 포퓰리즘 전쟁'을 일종의 '대선 꽃놀이패'에 비유했다.
"민중이 잘못된 선택을 해도 그는 잠시 죽을 뿐 오래 살 것이다. 반대라면 그는 민중과 함께 흥하는 것이다.""밥 안주겠다고 우는 놈은 처음 본다"는 낙인 효과
'보수 성전의 가미카제'가 되어라는 조중동의 나팔소리에도 불구하고 그가 '합리적 보수'로 돌아설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7월 27일 100년만의 집중호우와 우면산 산사태에 휩쓸려 서울시민 18명이 죽어나갔다. 오세훈에 대한 마지막 경고이자 기회였다. 그에게 최악의 선택은 수해 복구의 와중에 주민투표 강행을 공표한 것이다.
그는 '100년만의 집중호우'를 강조할 뿐 시민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다음날로 예정된 주민투표 발의를 잠정 연기했을 뿐이다. 물난리로 인한 시민의 안위보다는 주민투표의 영향을 걱정하는 시장의 모습이었다. 그는 우면산 산사태가 발생한 지 9일만에 시민들에게 사과했다. 복잡한 계산을 거친 단계적 사과였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아이들 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 일정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버렸다.
시민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로서는 무상급식이란 정책이슈를 정치이슈로 변질시켜서라도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삽질'과 '닭짓'이 난무했다. 4년 임기 서울시장에, 그것도 턱걸이로 당선된 지 1년밖에 안된 젊은 시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촌극을 벌임으로써 SNS에선 너도나도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는 놀림감이 되었다. 천만 시민이 아닌 자신을 중심으로 사고한 결과였다.
끝내 그는 아이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데 '정치적 생명'까지 거는 초강수로 무상급식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기를 꺼린 한나라당까지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갔다, 박근혜도 꺼리는 '복지포퓰리즘에 맞선 전사' 이미지와 '보수의 대표 아이콘' 브랜드를 쟁취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한때 '꽃미남 정치인'의 상징이었던 그의 느끼한 대권 야망으로 얼룩진 눈물 연기와 무릎 꿇기는 대중에게 추하고 비루하게 비쳐질 뿐이었다. 대중의 반응은 이런 트위터 명언으로 나타났다.
"밥 안준다고 우는 놈은 봤어도, 밥 안주겠다고 우는 놈은 처음 봅니다."조중동의 '주술'에 취해 일확천금을 노린 '도박판'백 가지 이론보다 간명한 '낙인 효과'였다. 사실상 게임의 승패는 이때 이미 결정되었다. '밥 안주겠다고 우는 놈'은 7년 전 "정치가 아니라 전쟁을 하듯 늘 갈등만 했던 게 부끄럽다"면서 불출마를 선언했던 그가 아니었다. 그 '놈'은 정치가 아니라 전쟁을 해서라도, 의회와 갈등을 무릅쓰고서라도, 의회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시장이란 정치적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자신만의 확고한 브랜드를 가져야 한다는 '전투적 프레임 전략'을 맹신하는 '대통령병 환자'였다.
한때 '합리적 보수'였던 그가 대권 야망에 취한 나머지 중도로 확장할 수 있는 '성장판'을 스스로 닫아버린 결과였다. "포퓰리즘에 맞서는 의로운 투쟁"에 나선 그가 장렬하게 전사하더라도 "잠시 죽을 뿐 오래 살 것"이라는 조중동의 '주술'에 취해 일확천금을 노린 '도박판'을 벌인 결과였다. 그리고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자기만의 확고한 고유 브랜드가 있어야 한다는 '정치판'의 공학을 맹신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뛰어난 정치인은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탁월한 정치인은 반대를 즐긴다. 위대한 정치인은 반대를 만들어낸다... 반대가 많은 것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대중은 반대할 만한 가치와 힘을 가진 정치인이나 정당에게만 반대하기 때문이다."보수 정치인들이 즐겨 읽는, '정치게임에서 승리하는 20가지 법칙'을 담은 책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박성민 저)에서 제12법칙은 '반대를 즐겨라'이다. 그는 게임하듯 반대를 즐겼는지 모른다. 그런데 반대를 즐길 '때'와 '장소'를 잘못 선택했다. 그래서 '집'도 '절'도 잃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