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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다큐멘터리 <뉴타운컬쳐파티>(연출 정용택)는 홍대 앞 두리반 투쟁을 함께 했던 인디밴드들의 이야기다. 이후 이들은 '독립'을 넘어선 '자립'을 외치며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을 만들기에 이른다. <뉴타운컬쳐파티>는 사회적 제작을 표방한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개인과 단체들이 십시일반 제작비를 모은다. 만들어진 영화는 1년 후 공개 라이선스로 전환해 사회에 환원된다. 수익은 독립영화 제작지원금, 인권-철거-인디음악에 공공 기부된다. 사회적 제작은 대기업과 유통자본은 돈을 벌지만, 창작자들은 굶주리는 현실에서 대안적 저작권을 모색하고, 지속 가능한 독립영화 제작 환경을 만들기 위한 시도다. 이러한 사회적 제작을 위한 제언을 4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말>
 <뉴타운컬처파티> 사회적 제작 웹자보 중 일부.
<뉴타운컬처파티> 사회적 제작 웹자보 중 일부. ⓒ 뉴타운컬처파티

얼마 전 <워낭소리>를 찍은 이충렬 감독의 근황을 전하는 뉴스를 텔레비전에서 봤다. 이른바 '대박 독립영화'로 알려진 <워낭소리> 때문에 건강도 친구도 삶의 의미도 잃어버린 이 감독의 한탄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워낭소리>의 성공으로 인해서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이 반짝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잠깐 빛이 들긴 했지만, 독립영화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어둡기만 하다. 독립영화가 고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립영화는 '독립'을 앞에 내세운 태생의 한계 때문에 결코 주류 영화와 같은 '흥행'을 기대하기 어렵다.

 

왜 '이상한 영화'에 시간·정력을 쏟나?

 

독립영화는 문자 그대로 자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만들어지는 영화를 일컫는다. 독립영화가 표방하는 '독립'은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서 홀로 서는 것을 뜻한다. 이런 까닭에 자본의 이해관계가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영화산업의 관점에서 독립영화를 바라본다면 한 마디로 답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의 논리가 횡행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굳이 독립영화가 필요한가. 영화제작의 목적이 흥행도 아니고, 이윤을 획득하는 것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독립영화라는 '이상한 영화'를 만드는 일에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야 하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독립영화야말로 자본이라는 하나의 기표로 모든 욕망을 통일시키고, 모든 삶의 가치를 획일화하는 조건에 얽매이지 않기 위한 상상력의 실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중적인 독립영화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형용모순에 가까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영화는 공동체의 합의를 깨트리는 불편한 상상력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한다는 이념 자체에서 독립영화는 이미 주류의 삶에 순응하는 영화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긴다.

 

아무리 독립영화라고 해도, 제작을 위한 최소 비용은 필요하지 않은가. 자본에 종속되지 않겠다는 결심은 훌륭하지만, 연료가 있어야 차도 움직이듯, 물질적인 지원이 있어야 독립영화도 굴러갈 것이 아닌가.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한량들이 만드는 것이 독립영화가 아니라고 한다면, 결국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여러 가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독립영화가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부터 독립을 추구한다고 해도, 당장 제작비가 없다면 만들 수가 없다. 아이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저예산 영화들이 최근 들어 부쩍 눈에 띄지만, 역시나 이런 영화들도 저예산이라는 자기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당연히 아무리 적더라도 예산이 필요하다.

 

도대체 이 예산은 어디에서 확보할 수 있을까. 하나의 방법이 있다. 국가의 지원을 받는 것이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모든 국민에게 공평하게 쾌락을 분배하는 관리 장치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국가가 직접적으로 국민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은 아니다. 국가를 대리하는 정부가 세금을 걷고 예산을 편성해서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다.

 

MB정부에서 가장 형편이 나빠진 이들은?

 

한국에 처음으로 정부 차원에서 문화정책을 논의하고, 그 중요성을 제기한 때는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다. 문화예술의 측면에서 본다면 김대중 정부는 한국 사회를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당시에 김대중 정부는 문화예술부문에 대한 직접 지원을 문화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 기조는 노무현 정부로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독립영화도 안정적 제작환경을 일시적이나마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사뭇 달라졌다.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는 우파의 모토를 내세우면서 집권한 이명박 정부가 맨 처음 한 일은 문화예술계의 지원 대상들을 대폭 물갈이 하는 것이었다. 문화의 문제를 이념 대결로 몰고 가면서 이명박 정부는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측근들로 지원 대상들을 갈아치웠다. 더불어 예산도 확실하게 축소시켰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가장 형편이 나빠진 이들을 꼽으라면 아마 독립 문화예술인들일 것이다. 독립영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독립영화의 경우는 지원 축소나 중단에 그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들어온 터전들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중앙극장에 둥지를 틀고 있던 대표적인 독립영화집단 인디포럼이 상영관을 빼앗긴 것도 그 중 하나이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독립영화인들은 씩씩했다. 어차피 풍찬노숙이었으니, 정부 지원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정부 지원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다. 문화예술을 시장 논리에 맡겨야 잘 돌아간다고 믿는 것이 신자유주의를 종교처럼 신봉하는 우파의 논리라고 할지라도, 문화의 다양성을 위한 공적인 지원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함께 버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독립영화는 흥행이나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작업이고, 그 결과물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기에 공익의 목적을 가진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자본가도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이윤 추구를 위해서 공동체의 규칙을 깨트리는 특권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공통의 이해관계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한국에서 이렇게 제대로 된 자본가를 만나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한국의 기업가들은 대체로 자본가를 위장한 수전노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들이 말하는 시장 논리라는 것은 결국 기업하는 사람 마음대로 사회를 유린해도 법적 제재를 받을 필요가 없는 자본의 무법천지를 용인해 달라는 억지에 불과하다.

 

이런 까닭에 독립영화를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은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일이고,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것도 정책집행자로서 정부가 취해야할 정당한 태도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은 여전히 요원하고, 앞으로 출현할 정권의 성격에 따라서 결론이 불투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홍대 두리반 투쟁 1주년 기념으로 인디밴드 '단편선'이 공연하고 있다.
홍대 두리반 투쟁 1주년 기념으로 인디밴드 '단편선'이 공연하고 있다. ⓒ 구영식

고흐의 화가공동체와 '뉴타운컬처파티'

 

또 무작정 문화예술 정책을 정부 지원에 맡겨 두는 것도 문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이명박 정부가 명확하게 증명했다. 정부 지원은 집권세력의 이념에 따라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는 불안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독립영화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 생존하게 만들 생태계의 조성이 필수적이라는 합의를 자연스럽게 도출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독립영화를 자본이나 정부 지원에서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시민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노력의 일환이 바로 최근 '뉴타운컬처파티'라는 작품을 제작하면서 시도하고 있는 '사회적 제작방식'이다. 사회적 제작방식은 독립영화 작품의 제작 취지에 공감하는 개인이나 단체들이 제작위원회를 결성해서 사회적 기금을 조성해서 제작비를 조달하고, 그 수익금을 사회적 기부나 독립영화제작지원금으로 재출연한다.

 

당연히 이 기금에서 제작에 참여한  런닝 개런티도 충당하고, 작품의 저작권은 1년 후 상업적이거나 비상업적인 이용을 가리지 않고 공개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와 같은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빈센트 반 고흐를 비롯해서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건설하고자 했던 화가 공동체이다. 반 고흐가 구상했던 화가 공동체는 '뉴타운컬처파티'가 기획하고 있는 사회적 제작방식과 유사하게, 조합기금을 조성해서 가난한 신인 화가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제작의 선순환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술가들을 생존하게 만들어줄 경제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외부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내부적인 차원에서 십시일반 이루어내자는 생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독립영화의 내일을 위해, 아니 이런 거창한 표어도 필요 없이, 지금 여기에서 독립영화를 감상할 수 있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독립영화 자체를 생존시키는 일이다. 자본주의의 예술인 영화라는 장르를 자기해체적인 악순환에서 구원할 선순환의 구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사회적 제작일 것이다.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독립영화라는 특정한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 사회 전체에서 가난하지만 창조적인 신진 예술가들이 생존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할 수 있겠다. 그 중요한 첫 발자국이 지금 막 시작되고 있다. 독립영화는 진정 이렇게 홀로 서야한다.

덧붙이는 글 | 이택광 기자는 경희대 교수이자 문화평론가입니다. 

뉴타운컬쳐파티 제작위원회 홈페이지 : http://ntcp.kr
문의 : ntcp.ntcp@gmail.com / 010-5364-9885 (이상욱 프로듀서)


#뉴타운컬쳐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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