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22일부터 5월 16일까지 25일 동안 KBS 노조(위원장 박승규)는 '희한한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정연주 사장 퇴진과 낙하산 사장 반대'라는, 두 개의 독립된 사안을 하나로 묶는 서명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제정신 가진 사람 중에 '낙하산 사장을 찬성'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뻔한 의제까지 하나로 엮어서 '정연주 퇴진'에 힘을 실어보겠다는 꼼수였다. '정연주 퇴진' 하나만 내걸고 서명운동을 하는 게 훨씬 당당했을 터인데, 그러지 못했다. 진정성도, 도덕성도 없었다.
'정연주 퇴진'과 '낙하산 반대'를 하나로 묶은 해괴한 서명운동
이런 엉터리 서명운동의 결과는 생각만큼 압도적이지 못했다. 특히 피디와 기자들의 참여가 저조했다. 피디 직군은 10%도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고, 기자는 40%에 그쳤다.
이에 반해 KBS 교향악단, 국악관현악단은 90% 이상이 서명에 참여했다(나중에 증언하겠지만, 나는 재임 중 KBS 교향악단의 독립재단을 추진했다. 교향악단 단원들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드세게 저항했다). 총무팀, 시설관리팀 등 행정지원 직군도 80% 이상 참여했다. 기술직군의 참여율도 높게 나왔다.
지역별로도 크게 차이가 났다. 노조 집행부의 '정연주 퇴진 올인'에 반대했던 부산, 경남 도지부, 충북 도지부는 서명참여를 거부했고, 대구, 제주, 진주, 김제, 원주 등은 거의 100%가 서명에 참여했다.
이런 결과에 대해 KBS 노조는 2008년 5월 19일자 '노보 특보'에서 "전체 조합원 가운데 70%를 초과한 높은 참여율을 보였다"며 "조합원들의 의지는 단호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연주 사장은 KBS를 즉각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조선일보>가 5월 21일자 기사에서 '정연주 사장 퇴진, KBS 노조원 70% 서명'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 KBS 노조는 "여론조사와 달리 서명은 실명을 걸고 참여하는 만큼 정 사장 퇴진에 대한 조합원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오는 22일 조합원 대토론회를 통해 새로운 차원의 활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밝혀, 퇴진 압박을 더욱 강하게 할 것임을 예고했다.
실제 당시 박승규 노조위원장은 6월 말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정연주 퇴진 운동 계속... 더욱 강력하게 한다"고 밝혔다.
'정연주 퇴진 찬성' 27% 여론조사는 묵살당시 KBS 노조의 부도덕하고, 진정성 없는 행태는 그 뒤 다른 사건에서도 나타났다. 이 사건은 <한겨레21>이 폭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영방송 포위됐다'라는 표지 기사(2008년 7월 1일자 )에서 <한겨레21>은 KBS 노조가 5월에 '정연주 퇴진'과 관련한 여론조사를 했는데, 노조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자 이를 공개하지 않고 묻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KBS 노조는 한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 국민 1천 명과 전문가 1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는데, 응답자 가운데 66%가 '정연주 사장의 남은 임기를 보장해야 한다'고 답했고, '사퇴해야 한다'는 반응은 27%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정연주 퇴진'에 올인해 온 KBS 노조는 이처럼 자신들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오자 이를 공개하지 않고 묻어버렸다는 것이다. <한겨레21>은 KBS 한 기자의 말을 인용해 "노동조합은 자신들의 의도와 전혀 반대되는 결과가 나오자,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 여론조사에는 'KBS 사장 선임구조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사장 선임에 국민이 참여해야 하는지' 등과 같은, KBS가 가야할 길과 사장 선임 방법을 묻는 건설적인 항목들이 있었음에도, '정연주 퇴진'과 관련하여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자 KBS 노조는 여론조사 결과 자체를 아예 발표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겨레 21>은 "정연주 사장 진퇴와 관련한 조사 결과를 공개하기가 껄끄러워 전체 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노동조합이 '정연주 사장 퇴진'이라는 목적에 매몰돼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판했다.
박승규 위원장 "정연주 퇴진 운동 더욱 강력하게"
위의 두 가지 사례는 당시 KBS 노조 집행부가 얼마나 '정연주 퇴진'에 몰입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무모하고 부도덕한 짓을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노조의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KBS 안팎에서 많이 나왔다. 당시의 상황과 KBS 분위기는 <오마이뉴스> 전관석 기자가 쓴 2008년 6월 26일 기사에 잘 요약되었다. 당시 박승규 KBS 노조위원장과의 인터뷰 기사 도입 부분이다.
'국민의 방송' KBS가 혼란스럽다. 감사원의 특별감사, 국세청의 세무조사, 정연주 사장에 대한 검찰의 소환 요구 등 외부적 요인 때문에 어수선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언론계 안팎에서 "정연주 사장을 물러나게 하려는 정권차원의 표적 작업"이라는 의혹에 무게가 실리는 양상이다. 문제는 (KBS) 노동조합의 '정연주 사장 퇴진 투쟁'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다. 지난 2006년 11월 '복지 대박, 코드 박살'이란 기치를 내걸고 당선된 노동조합은 줄곧 '반 정연주' 노선을 유지했으며, 지난 2월 중순부터는 본격적인 퇴진 투쟁을 벌이고 있다. 새 정부 들어 'KBS 차기 사장은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를 도운 OOO씨가 유력하다'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하면서 내부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KBS 노동조합은 "사장에 적합하지 않은 정연주 사장을 먼저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줄곧 펼치고 있지만, PD협회나 기자협회, 경영협회 등 직능단체, 일부 지역 총국 노조는 이런 노조의 주장에 저어하고 있다. "정연주 내보내면 청와대에서 생각하고 있는 낙하산 인사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KBS) 노조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각도 그리 곱지만은 않다. 전·현직 중견언론인 모임인 새언론포럼(회장 최용익 MBC 논설위원)은 지난달 성명을 내고 "KBS 노조는 방송사상 최대 규모의 자주권 독립투쟁으로 기록되는 '1990년 4월 투쟁'의 주역"이라며 "현재 KBS 노조는 '정연주 사장 퇴진과 낙하산 사장 반대'를 주장하고 있으나 우리가 보기에 내용상의 모순과 더불어 전략적으로도 설득력이 약하다"고 지적했다. "정 사장이 퇴진할 경우 낙하산 사장의 임명은 짜여진 수순이며 KBS 노조는 정부에서 획책하고 있는 '정연주 사장의 퇴진'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를 깨닫고 방송장악 반대투쟁에 나서라"는 것이다.매일 타오르는 KBS 앞 '공영방송 사수' 촛불 사이에서는 이미 '어용노조', '뉴라이트 노조', '한나라당 노조'라는 비아냥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 기사에서 지적한 KBS 내부의 노조 비판은 노조가 '정연주 퇴진 운동'을 전개할 때부터 줄기차게 나왔다. 특히 피디협회와 기자협회는 협회 차원에서 KBS 노조의 '정연주 퇴진 올인'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KBS 기자·피디 협회, 별도 여론조사 실시...결과는 노조와 반대KBS 기자협회와 피디 협회는 구체적으로 협회 회원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발표했다. 기자협회는 2008년 6월 16일부터 이틀 동안 여론조사기관인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기자 상대 여론조사를 했다. KBS 기자협회원 513명 가운데 특파원, 연수자, 휴직자 35명을 제외한 478명 전원을 대상으로 전화조사를 했는데 이 가운데는 여론조사를 거부하거나, 연락이 되지 않은 사람은 제외되었다.
조사 결과는 이렇게 나왔다.
'공영방송 사수투쟁이 중요한 시기이므로 이 시기에 정연주 사장 사퇴를 촉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58.8%(234명)'정연주 사장의 임기가 공영방송 독립성 유지에 관계가 없거나 오히려 걸림돌이다. 따라서 정 사장 사퇴를 촉구하는 것은 적절하다' 41.2%(164명)피디협회의 여론조사는 기자협회보다 1주일 뒤인 6월 24일부터 이틀 동안 있었다. 여론조사기관인 미디어리서치에 의해 진행된 이 조사에서는 피디협회 회원 943명 가운데 연수자 4명을 제외한 939명을 상대로 조사가 실시되었다. (응답자는 786명). 결과는 이렇게 나왔다.
'공영방송 사수투쟁이 중요한 시기이므로 이 시기에 정연주 사장 퇴진을 촉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71.3%(560명)
'정연주 사장의 임기가 공영방송 독립성 유지에 관계가 없거나 오히려 걸림돌이다. 따라서 정 사장 사퇴를 촉구하는 것은 적절하다' 22%(173명)KBS 기자협회와 피디협회가 이처럼 KBS 노조 활동에 브레이크를 걸고 나선 것을 비롯하여, 나의 강제 해임과정과 그 뒤 '특보 사장' 출현에 대한 KBS 노조의 형식적인 저항 등을 헤아려 보면, 기자협회·피디협회의 회원들인 젊은 기자·피디들이 그 뒤 탄생한 'KBS 새 노조'의 기틀이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진화현상이었다.
KBS 노조는 이처럼 KBS 내 일부 직능 단체들과도 마찰을 빚었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연주 퇴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런 가운데 KBS 사내 게시판과 피디협회보 등에는 당시의 상황을 개탄하고, 비판하는 '명문'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난세에 영웅이 탄생하듯, KBS가 처해있는 어려운 형국에서 '명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