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여기 왜 왔을까잉?""회장 엄마. 그럼 어떻게 해. 기자 내쫓아버려?""아 뭐더러 와. 줄 게 하나도 없는데 왜 왔어~!"배은심(고 이한열 열사 어머니)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장의 표정이 밝지 않다. 이대로 내쫓기는 건가 싶었다. 일상에서 본 이소선 어머니의 모습을 알고 싶다 하니 "말 해줄 게 없다" 한다.
며칠 전 '유가협 어르신들이 본 이소선 어머니의 삶'이라는 내용의 취재요청서를 보냈는데 이를 전달한 박제민 사무국장이 어머님들에게 혼이 났다고 한다. '(이소선) 어머님이 병상에 누워 계시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이었다. 기고 요청은 고사하고 인터뷰 요청도 거절당했다.
다음 날(8월 17일) 아침. 무작정 서울 창신동에 위치한 '한울삶'으로 찾아갔다. 꼭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특히 이소선 어머니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배은심 유가협 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요청했다. 유가협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고 2시 유가협 회원들이 참석하는 기자회견에 다녀온 뒤 저녁이 다 돼서 배은심 회장을 만났다. 하루 종일 퍼부은 비 때문이었는지, 이소선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마음 때문인지 배 회장의 몸짓이 무거워 보였다. 어색하고 긴 침묵 뒤에 그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18년 먼저 자식 묻은 가슴으로 유가족들 감싸"나는 1987년 6월 이전의 일은 암 것도 몰러."최루탄 열기가 거리를 온통 뒤덮던 1987년 6월, 연세대 어느 곳에서 배은심 어머니는 민주화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자식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을 만났다. 유가협 부모님들과의 만남이었다. 그중 한 분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돌아가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다.
"(이소선) 어머니를 우리들이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어머니는 18년째더라.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동안 어머니는 이미 18년 전에 엄청난 일을 당하셨고, 쭉 운동판에서 사셨던 분이야. 그땐 운동권 학생들 접하면서 하기 힘든 심부름 같은 거 하면서 사셨대. 어머니가 감옥에도 몇 번 가셨는데 그건 1987년 이전에 가신 거야. 교도소에 계셨던 것도 우리들은 어머니 얘기만 듣고 안 거지."배은심 회장은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자식을 잃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슬퍼하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 안아주신 분이 이소선 어머니였다. 앞이 안 보일정도로 화가 나서 미쳐버리는 순간이 있다. 자식을 잃어 제어가 안 될 정도의 화가 치밀어 오르는 유가족들의 가슴을 한 평생 동안 끌어안고 다독여주고 같이 화냈던 사람이 이소선 어머니다.
"1989년 봄 어느 날. 먼저 간 자식들 생각에 서로를 위로하며 슬픔을 억제 못하고 있을 때 이소선 어머니가 벽에 걸려 있는 영정들을 가리키면서 '저 초롱초롱한 눈을 봐. 우리는 저 사람들을 데리고 이리저리 이사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하든지 자금을 만들어 움막이라도 좋으니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하셨어. 우리 가족들은 하나 같이 찬성했지. 그래서 마련한 곳이 종로구 창신동의 유가협 한울삶이야."(이소선 여사 칠순잔치 중 '내가 본 어머니' - 배은심)
"정신적 지주인지는 모르겠고 친정엄마는 맞지"천만 노동자의 어머니, 한국노동운동의 정신적 지주…. '이소선'이란 이름을 수식하는 문구는 상당히 많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원로의 대열에 들어서는 게 순리. 그래서 다가서기 힘든 거대한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울삶에선 이소선 어머니가 특별하다는 것을 느끼진 못했다고 다들 입을 모은다.
"정신적 지주 그런 건 너들(노동자들) 쪽에서 하는 얘기고. 여기 한울삶에선 다 똑같은 생활을 하고 똑같이 갔던 거야. 똑같이 밥 먹고 집회 갔어. 그 속에서 (이소선) 어머니가 단련이 됐으니까 성실한 점도 있었지. 울덜보다 더 20년 먼저 재야 어르신처럼 사셨으니 그게 몸에 밴 거야. 하지만 크게 어머니가 특별하다는 것을 느끼진 못했어. 여기선 다 똑같아."옆에 있던 박제민 사무국장이 말을 거든다.
"원로 선생님들은 저를 만나면 '너 그전에 왜 일을 그렇게 처리했냐!'고 호통을 치시는데 엄마(이소선 어머니)는 밥 먹었는지부터 물어보세요."박씨가 유가협 사무국장을 맡게 된 것은 지난 2006년 2월. 처음 이소선 어머니를 만날 때는 긴장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한울삶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가 저녁이었어요. 문이 열리는데 그림자가 길게 촥 늘어지더라고요. 아마 뒤에 저녁 해가 있었나 봐요. 그때 되게 큰 그림자가 들어오는 거예요. '어머니가 생각했던 이미지보다 크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문 앞으로 고개가 빼꼼히 들어오면서 경상도 사투리로 '안녕하쎄요~ 국짱님' 하시더라고요. 그때 깜짝 놀랐죠. 너무 조그마한 거야."이소선 어머니는 유가협 어머니들에게 '친정엄마'로 불린다. 자식 잃은 슬픔도 모자라 몇 십 년 동안 죽음의 진실을 따라 산다는 것이 한결같을 수 있을까. 그래서 잦은 집회나 기자회견에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일흔이 넘은 어르신들이 많아 몸도 불편해서 잦은 집회나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집회에 갈 때 대부분은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계단 앞에만 서면 크게 심호흡을 내쉰다. 한 계단 한 계단이 고행이다.
사실 유가협 회원들의 얘기 중 절반 이상은 '몸 아픈 곳'에 대한 것이다. 기자가 동행한 날에 비가 와서인지 유독 무릎이며 다리를 많이 주무른다. 그럴 때마다 병상에 누워계신 이소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진다. 회원들을 어르고 달래서 같이 움직인 사람 역시 이소선 어머니였다고. '때론 어머니께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면서 한울삶 안쪽 방 맨 구석, 어머니가 항상 앉던 빈자리를 한 회원이 하염없이 바라본다.
아들의 유서를 가슴에 품고 사는 어머니한울삶 안에서도 부모들의 자식 자랑은 대단했다고 한다.
"이 방에 걸려 있는 사진들. 어떤 자식도 모자란 놈이 하나도 없어. 다들 자기 자식들이 최고라고 하는 거야. 당신들 집에선 듬직하고 믿을만한 자식들이었던 거야. (이소선) 어머니 역시 태삼이(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씨)도 있고 딸들도 있었지만 그때 당시는 안 보였데. 태일이가 가장 컸던 거야. 믿음직한 큰아들이었던 거지. 그런데 자식이 먼저 죽을지 누가 알았겠어. 그런 전태일은 어머니께 당부를 하고 갔어.""(태일이가) 언젠가 환하고 좋은 세상이 올 수 있다고 했어요. 싸워주겠냐고 묻더라고.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내 말 안 들어주면 나중에 천국에서 엄마 만나도 안 볼 거야. 내 말 들어준다고 꼭 대답 해줘' 말을 할 때마다 (태일이의) 명치 부근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내 몸이 가루가 되도 끝까지 할 거다' 하니, 더 크게 대답하라고 하는 거야, 말을 할 때마다 피가 쏟아지고. 크게 대답하라하고, 또 피가 푹 쏟아지고, 그걸 보고 탁 쓰러졌지."(전태일 열사 36주기 기념 이소선 어머니 인터뷰 중)"'죽고 없는 자식을 어머니는 저런 식으로 사랑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웠지. 왜 내 자식이 저 대열에 끼었는가. 그걸 알기 위해 나 역시 그 대열 속으로 들어갔지. 그 속에서 세상을 읽고, 느꼈어. 아들이 어떤 현실에 아팠을지 깊숙이 파고 들어가 봤어."이소선 어머니의 삶을 특별하지 않았다고 배은심 회장은 말한다. 그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죽음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전태일이 남긴 유서를 사랑하시더라고. 그것을 헛되지 않게 하려고 어머니는 사셨어. 그런 부분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지.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자식에 대한 사랑, 죽음에 대한 사랑. 어머니는 그것을 충분히 지켜오셨어. 그건 위대한 건 아니야. 당신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니까. '(이소선) 어머니는 위대해!'가 아니라 어머니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고 사셨어.그것을 지킴으로서 그 삶이 노동자들의 마음에 전파가 됐고, 또 노동자들의 힘으로 어머니가 힘을 얻어서 자식에 대한 죽음을 간직하게 되고…. '내 죽음을 헛되지 하지 말라.' 그게 지금 어머니 삶의 동력이 될 거야. 어머니는 40년을 그렇게 사셨어. 내가 어머니의 삶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면 그런 걸 거야. 그것을 설명해 볼라니까 영 어렵네."얘기가 끝나고 배은심 회장은 맥주를 몇 잔 들이켰는데 취한 듯했다. 박 사무국장의 얘기론 취한 게 맞단다.
"원래 술을 안 드시는 분이에요. 한 잔은 드시죠. 회장이니까. 기자는 지금 정말 보기 드문 일을 본 거에요. 회장(배은심) 엄마가 취하시는 분이 아닌데…. 오늘따라 이소선 어머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신 듯해요."배은심 회장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소선 어머니는 한 세상 잘 사셨어. 당신 소신껏 사셨으니까. 허세 안 부리고 허영 안 부리고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을 안고 소신껏 사셨어. 난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어. 그런데 그 소신이라는 게 너무 마음 아파. (이소선)어머니 누워계시는 거 보고 '아이고 어머니 평생 그렇게 사시다가 이제 가는거야~' 그렇게 얘기 하니까 태삼이가 '엄마 일어날 건데 왜 그러냐고.' 하더라. '아 일어날 때 일어나더라도 내가 엄마를 본깨 그런 생각이 들어….' 했지."
"어머니 밖에 비오는 것도 보고 그럽시다"서울대 병원 중환자실. 오후 7시부터 30분 동안 할 수 있는 면회에 기자도 따라갔다. 박제민 사무국장과 동행한 길에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태삼씨와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을 만났다.
"어머니. 여진이 아빠에요. 엄마. 눈 좀 떠보세요.""어머니…. 엄마…. 나야 나. 나도 몰라?""어머니 밖에는 비가 많이 와요…. 일어나서 비오는 것도 보고 그럽시다.""어머니 국장 왔어요. 엄마. 국장 왔어요. 지난주 금요일에 유가협 행사 잘 했어요. 사람들이 엄청 많이 왔어요. 다들 잘됐다고 난리야. 엄마만 없었어. 엄마. 일어나시면 내년에도 또 합시다. 올해 한번 다시 해도 되고…."대답 없는 안부가 울린다. 세 남자의 울먹임에도 어머니는 꼼짝을 않는다.
"어머니 손이 얼마나 고우신데…."주사약 기운에 부어오른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박 사무국장이 읊조린다. 팔도 주무르고 다리도 주물렀다. 그때마다 기지개를 핀다. 발바닥을 주무르니 간지러운지 어머니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런데 말이 없다. 아침에 잠꼬대 하듯 잠시 후면 일어날 것 같은 어머니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이소선 어머니는 지난 7월 18일 자택에서 정신을 잃은 채로 서울대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호흡은 돌아왔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상태. 중환자실이라 병원비가 만만찮을 것 같다는 얘기에 전태삼씨가 "병원비 해결책은 엄마가 일어나시는 거지"한다. 현재 병원비는 전태삼씨가 부담하고 있다.
전태삼씨는 "어머니가 속히 일어나셨으면 좋겠는데, 하실 일은 다 하셨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어린 여공들의 품안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으셨어. 시다들의 품이 어머니의 자리였어. 거기서만 편안해 하셨어. 고사리 같은 손을 잡으시면서 정을 나누셨어. 어머니는 여공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 그들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 모든 걸 내놓으셨어. '저들과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 이제 곧 한 방울의 이슬이 되려합니다. 그 한 방울의 이슬이 내리쬐는 햇빛에 마르기 전에 작은 힘을 주옵소서. 한 방울 이슬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소서.' 어머니는 한 방울 이슬의 바늘구멍만한 힘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셨어. 그들을 품음으로부터 시작하신 거야."금방이라도 일어나실 것 같은 어머니의 모습을 뒤로하고 나왔다. 내일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깨어나실까. 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어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이 기사는 이소선씨 별세 전에 작성돼 월간 노동세상 9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